낙화암 삼천궁녀, 애달프구나
낙화암 삼천궁녀, 애달프구나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3.19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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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기록에서 출발, 조선시대에 ‘삼천’ 표현 등장…망국의 슬픔을 표현

 

충남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다. 부여 하면 떠오르는 곳이 단연 낙화암이다. 의자왕 20(660)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오자, 사비 왕성에 있던 삼천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다.

낙화암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망국의 한에 대한 전설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다 삼천궁녀라는 부풀려진 스토리는 사실인 것처럼 전해지고 있다.

낙화암 바위 위에는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조그마한 정자가 있고, 그 아래에 전망대가 있다. 거기에서 보면 절벽이 아찔하다. 이곳에서 떨어지면 뼈도 추리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번쩍 든다. 14백년전에 망국의 한을 품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떨어져 죽었을 것이다. 물론 3천명은 아니었겠지만.

 

백화정 /박차영
백화정 /박차영

 

삼천궁녀설의 진원지는 일연스님의 삼국유사. 일연스님은 삼국유사 태조춘추공조에 이렇게 적었다.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아래로 강물을 굽어보고 있다. 전해 내려오기를, 의자왕이 여러 후궁들과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자살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는,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岩)이라고 한다.”

 

일연스님은 백제고기를 인용했다고 밝혔는데, :궁녀들만 떨어져서 죽었을 뿐이고 의자왕은 당나라에서 죽었다고 기록의 잘못도 지적했다.

 

백화정에서 본 백마강 /박차영
백화정에서 본 백마강 /박차영

 

삼국유사엔 낙화암의 원래 이름을 타사암(墮死巖)이고 했다. “떨어질 타”()를 써서 “(궁녀들이) 떨어져 죽은 바위. 타사암이 언제부터인가 낙화암이 되었다. 충남대 황인덕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고려말 이곡(李穀, 1298~1351)부여회고라는 글에서 하루 아침에 금성탕지(金城湯池)가 와해되어, 천길 높은 바위 이름을 불러 낙화(落花)로다라고 했다. 이곡의 글은 고려말에 부여가 전국의 관광명소가 되어 유람가들이 선호하는 방문지가 되었고, 낙화암도 그런 장소가 되었음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1천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며 망국의 슬픔은 잊혀지고, 여유있는 유람객들이 궁녀의 투신을 미화하며 낙화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삼천궁녀도 이런 맥락의 연장으로 파악된다. 황인덕에 따르면, 적어도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삼천궁녀란 표현이 없었다고 한다. 조선초기 김흔(金訢), 조위(曺偉), 민제인(閔齊仁)의 시에 삼천궁녀란 표현이 나온다. 삼천궁녀는 당나라 시인 백낙천(白樂天)의 시에 등장하고, 조선 사대부들이 여기서 인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유추가 설득력을 갖는다.

 

백마강에서 본 낙화암 /박차영
백마강에서 본 낙화암 /박차영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성리학자답게 의자왕을 근엄하게 꾸짓었다. 삼국사기는 의자왕이 궁녀들에 빠져 나라를 망쳤다는 점을 강조한다. 백제본기 의자왕조의 기록을 보자.

 

임금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좌평 성충(成忠)이 적극적으로 말리자, 임금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성충은 옥에서 갇혀 죽을 때 임금에게 글을 올렸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말씀 아뢰고 죽겠습니다. 신이 항상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데 반드시 전쟁은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서는 반드시 지형을 잘 살펴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다른 나라 병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야만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자왕은 이 말을 살피지 않았다. 그로부터 4년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를 공격하고 의자왕은 항복을 하게 된다. 그때 의자왕은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라며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4년이면 충분히 국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기간이다. 그런 황금같은 시간을 의자왕은 궁녀들과 향락에 빠져 허비했던 것이다.

낙화암에 위치한 백화정은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지은 정자다. 중국의 시인인 소동파의 시에서 따왔다고 한다.

 

고란사 /박차영
고란사 /박차영

 

가파른 계단 길을 내려가면 약수가 유명한 고란사(皐蘭寺)가 나온다. 바위 절벽 좁은 터에 법당 한 채를 돌아가면 바위틈에서 약수물이 흘러나온다. 이 절에 고란초가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절벽 아래쪽에 유람선 선착장이 있다. 유람선에 올라타 낙화암 절벽을 바라보니, 절벽이 가파르다. 절벽 아래에 붉은 글씨로 落花巖이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에 송시열이 썼다고 한다.

낙화암에 삼천궁녀가 즉은 게 사실인지, 아닌지 무엇이 중요하랴. 나라가 망하면 삼천이든, 삼만이든, 모두 죽는 것을.

유람선엔 배호의 노래 추억의 백마강이 심금을 울린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아래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파묻히며는/ 구곡 간장 올올이 찢어 지는 듯/그누가 알리오 백마강 탄식을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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