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산성, 나당 협공엔 무방비
부소산성, 나당 협공엔 무방비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3.20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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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외곽 관북리에 추정궁궐터…외곽엔 8km 나성으로 둘러싸

 

백제의 도읍지 3곳의 공통점은 모두 강의 남쪽에 있다는 점이다. 한성백제의 도읍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은 한강 남쪽, 공주와 부여의 도웁지도 금강 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는 백제가 늘 고구려를 잠재적 적으로 여겨왔음을 보여준다. 백제와 고구려는 부여족에서 갈라져, 역사 속에서 원수처럼 지내왔다. 광개토왕비에 백제를 백잔(百殘)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두 나라의 갈등을 단적으로 대변한다.

부여는 백제시대에 사비(泗沘) 또는 소부리(所夫里)라고 했다.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에 예속되었을 때 부여군(扶餘郡)으로 개칭되었고, 그후 부여라는 명칭을 이어갔다. 이름에서 원조상인 부여족으로 돌아간 것이다.

 

상공에서 본 부소산성 /문화재청
상공에서 본 부소산성 /문화재청

 

부소산성(扶蘇山城)은 백제시대에 사비성 또는 소부리성이라고 불렸다. 부여의 부소산성이 공주의 공산성과 다른 점은 궁궐의 위치다. 웅진시대 궁궐은 성 내에 공산성 높은 곳에 위치한 반면에 사비시대 궁궐은 성의 외곽인 관북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주에도 공산성 남쪽에 충분히 궁궐이 자리잡을 평지가 있었지만 굳이 성내에 궁궐터(추정)가 있었던 것은 백제왕조가 공주에 잠시 머무를 생각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부여로 천도한 이후에는 장기적으로 머물 생각을 하고 궁궐을 성 밖 평지로 빼낸 게 아닐까.

궁궐터는 부소산성 남쪽 관북리 유적으로 추정된다. 1982년부터 충남대 박물관에서 5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했는데, 1983년도에는 방형석축연지(方形石築蓮池)가 발견되었고, 1988년 발굴조사에서는 북사(北舍)라는 명문이 발견되었으며, 1992년 조사에서는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남쪽 50m 지점에서 백제시대의 도로유적과 배수시설이 드러났다.

 

부소산성 현황 /박차영
부소산성 현황 /박차영

 

백제는 잠재적 적국인 고구려에 멸망한 게 아니라 동쪽에 있는 신라와 서쪽 바다 건너에 있는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나당연합군은 북쪽이 아니라 동서에서 협공해 왔다. 금강을 해자로 삼고 낙화암 절벽에 기대어 있는 부소산성은 나당의 공격에 무용지물이었다.

당군은 금강을 거슬러 올라왔고, 신라군은 황산벌을 공격했다. 삼국사기에 부소산성이 함락되는 내용이 전해진다.

 

부소산문 /박차영
부소산문 /박차영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도성 30리 밖까지 와서 멈추었다. 우리 군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전사자가 1만여 명이었다. 당나라 병사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치고 들어왔다. 임금이 사태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후회스럽구나.”

(왕은) 드디어 태자 효()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소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임금의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병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가니 백성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태는 이를 중지시키지 못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들을 시켜 성곽에 뛰어 올라 당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였다. 태는 형세가 다급해지자 성문을 열고 살려주기를 청하였다."

 

삼충사 의열문 /박차영
삼충사 의열문 /박차영

 

의자왕은 부소산성에 의지해 마지막 혈투를 벌이기는커녕 태자와 함께 도망가고, 둘째 왕자가 남아 지켰지만 방어에 실패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부소산성을 둘러보면 남쪽으로는 무방비 상태임을 쉽게 알수 있다. 당시 성은 토성이었다고 한다. 흙으로 아무리 높고 단단하게 쌓아보아야 숫적으로 우세한 적을 막는데 도움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부소산성은 부여 북쪽 관북리에 있는 해발 100m 나지막한 구릉에 쌓은 성이다. 북으로 금강을 자연해자로 삼고, 산의 능선에 산성을 쌓았다. 부소산은 골짜기가 나 있는 두 개의 산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부소산성은 테뫼식이면서도 골짜기를 연결한 포곡식으로 되어 있는 복합식 산성이다.

성 내에는 사비루(泗沘樓영일루(迎日樓반월루(半月樓고란사(皐蘭寺낙화암(落花巖)과 그리고 군창지(軍倉址)가 있었다. ··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사비루 /박차영
사비루 /박차영

 

부소산성은 538년 백제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롤 도읍을 옮긴후 660년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백제의 도읍을 지키는 산성이었다. 웅진시대에 부소산에 산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천도 이후에 본격적으로 축성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총둘레는 2,200m, 면적은 100에 달한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사비는 부소산성을 내성으로 하고, 8km의 나성으로 보호되었다. 나성은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자연지형을 이용해 부여 시가지 외곽을 둘러쌌다. 사비로 수도를 옮긴 538년경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데, 성벽은 흙으로 쌓아 만들었다. 지금은 약간의 흔적만 남아있다.

 

군창지 /박차영
군창지 /박차영

 

부소산성을 둘러보면 곳곳에 유적을 발굴했다 덮은 흔적이 있다. 현대 건축물이 많아 자연 이외에 백제시대의 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부소산문은 관광객용으로 만들었다. 삼충사 (三忠祠)는 성충·흥수·계백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1957년 지은 이 사당은 1981년 다시 지었으며, 해마다 10월 백제문화재 때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부소산성은 경치좋고 산책하기 좋은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궁궐터로 추정되는 관북리 유적지 /박차영
궁궐터로 추정되는 관북리 유적지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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