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정방 글귀 남아있는 정림사지 석탑
소정방 글귀 남아있는 정림사지 석탑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3.22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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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 남쪽, 사비 한가운데 세워진 정림사…제자리에 서 있는 유일의 사비 유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이 진리를 절감할수 있는 곳이 부여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에서 유일하게 제자리에 서있는 백제의 유물은 정림사지 석탑이다. 낙화암은 자연 그대로인데 전설만 부풀려 전해오고, 국립부여박물관의 명물 금동대향로는 땅 속에 묻혀 있다가 1천년이 훨씬 넘는 긴 세월이 지나 발견된 것이다. 신라가 백제의 흔적을 철저히 파괴하고 지운 것이다. 그래서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더욱 반가웠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박차영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박차영

 

정림사는 백제 성왕이 538년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길 때 건축한 백제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왕궁 정남에 위치하며, 나성을 기준으로 할 때 사비의 한가운데에 건립되었다.

정림사지 석탑은 절터에서도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새 수도의 중앙에 석탑을 쌓아 부처님이 나라를 지켜주길 기도한 것이다. 오층석탑은 높이가 8.33미터로, 작지 않은 탑이다. 탑신부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 상승감을 보여주며, 장중하면서 부드럽고 육중하면서 단아한 세련된 백제의 멋을 느낄 수 있는 백제계 석탑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준다.

석탑에는 슬픈 기록이 남아 있다. 1층 몸돌(탑신부)에는 신라군과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고 세운 기념탑”(大唐平濟國碑銘)이란 글씨를 새겨놓았다. 뚜렷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어렴풋이 그 글자가 보인다. 1943년 정림사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기 전까지 이 탑은 소정방이 세운 평제탑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는 정림사가 사비 백제의 중심이자 상징이었음을 반증하는 상처이기도 하다.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웠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다.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했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미술사학의 태두 고유섭(高裕燮) 선생은 정림사지 석탑이 목탑을 모방한 것이라는 연구를 발표했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을 넘어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준다.

정림사지 석타븐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남아 있는 2기의 백제시대 석탑 중 하나다. 미륵사지 석탑은 훼손된데 비해 정림사지 석탑은 온전하고 원형이 제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백제 석탑이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부여 정림사지 /박차영
부여 정림사지 /박차영

 

정림사(定林寺)1942년 일본인 후지사와 가즈오(藤澤一夫)가 발굴조사를 하던 중에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란 명문이 적혀 있는 기와조각을 발견하면서 이름이 밝혀졌다. 태평 8년은 고려 현종 19년인데, 그때까지 정림사로 불리웠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정림사지,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정림사와 사비 왕궁의 관계는 중국의 낙양성(洛陽城)의 황궁과 영녕사(永寧寺)의 관계와 유사해 사비도성의 기본구조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1979~1980년에 충남대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 가람의 규모와 배치, 1028년에 중건된 사실 등이 드러났고, 다수의 소조(塑造)인물상 조각과 백제·고려시대의 막새기와편, 백제시대의 벼루·삼족토기(三足土器) 등이 출토되었다. 20082010년에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절터 주변 전체를 다시 발굴해 회랑 북단의 동서승방지와 강당지 뒤편의 북승방지를 확인했다.

발굴조사 결과로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 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확인한 중문 앞 연못은 옛모습을 재현해 정비했다.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박차영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박차영

 

정림사지엔 오층석탑과 함께 석조불상이 남아 있었다. 이 불상은 석탑과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다.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작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모양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현재 불상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현재의 보호각 건물은 석불을 보호하기 위한 1993년에 건축되었다.

 

정림사 추정도 /박차영
정림사 추정도 /박차영

 

석탑이 위치한 곳에 정림사지 박물관이 20216월 리모델링 후 재개관했다. 첨단기술을 접목해 정림사지 축조와 발굴까지의 과정을 표현했다. 정림사지 인피니티룸, 스피어영상관, 미디어아트. 무안경 VR 체험 등이 있다.

 

1910년 정림사지 오층석탑 사진(정림사지박물관) /박차영
1910년 정림사지 오층석탑 사진(정림사지박물관) /박차영
보호각 설치 이전의 정림사지 석불좌상 사진(정림사지박물관) /박차영
보호각 설치 이전의 정림사지 석불좌상 사진(정림사지박물관)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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