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프랑스의 영구 화해 다짐한 엘리제 조약
독일-프랑스의 영구 화해 다짐한 엘리제 조약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10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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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과 아데나워의 결단…두 나라 정권이 바뀌어도 유지, EU 탄생의 원동력

 

프랑스와 독일은 오랜 역사 과정에서 으르렁거리며 싸웠다.

프랑스와 독일의 적대관계는 고대 로마시대에 골족과 게르만족의 전투에서 시작된다. 두 나라는 15세기 합스부르크의 프랑스 영토 영유, 18세기 나폴레옹의 프러시아 침공, 신성로마제국 해체, 19세기 빌헬름 황제의 파리 침공, 20세기에 두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맞싸웠다.

그러던 두 나라가 1963122일 엘리제 조약(Élysée Treaty)을 체결해 영구히 화해하기로 협정을 맺었다.

조약의 주역은 프랑스의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대통령과 서독 콘라트 아데나워(Konrad Adenauer) 총리였다. 조약 체결당시 드골의 나이는 72, 아데나워는 87세였다. 두 노정객들이 더 이상 두 민족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기로 한 것이다.

 

엘리제 조약 원본 /위키피디아
엘리제 조약 원본 /위키피디아

 

아데나워는 1958년 드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드골은 2차 대전때 나치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를 리드한 민족주의자였고, 자만심이 강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19589월 아데나워가 파리 교외의 드골 자택에 초대받았을 때 그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드골이 정중하게 두 나라의 화해와 외교적 협력을 요청했고, 아데나워는 아주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후 4년간 두 정상은 15번을 만나고 100시간 이상 토론하고, 40통의 편지를 서로 보내며 두 나라의 협력문제를 논의하고 우정을 쌓았다.

19627, 드골과 아데나워는 파리 외곽 랭스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양국군대의 사열을 받았다. 두 사람은 포옹하고 키스를 했다. 노트르담 성당은 1차 대전 때 독일군이 무차별 포격을 가한 상징적 장소였다. 그 곳에서 두 정상은 두나라 국민 앞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영원한 화해를 선언했다.

그로부터 반년후 파리 엘리제 궁에서 두 정상은 두 나라의 화해를 문서로 작성해 교환했다.

 

엘레제 조약이 체결되기까지 고비도 있었다. 1961년 소련이 서베를린에서 외국군대의 전면 철수를 요구하며 일촉즉발의 대치상태가 빚어졌다. 그때 미국과 영국은 미온적이었다. 아데나워는 드골을 찾아갔다. 드골은 독일-프랑스의 주축을 형성해 소련에 대항하자고 했다. 독일과 프랑스가 연합하자 미국과 영국도 마지못해 소련과 힘의 대결을 선언하고 소련이 물러서게 되었다.

그런데 영국의 EEC(유럽경제공동체) 가입 문제가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드골은 미국과 친한 영국을 미워했고, 영국이 EEC에 가입하면 유럽주의는 파괴된다고 생각했다. 이에 비해 아데나워는 영국이 가입해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미국도 드골의 신경을 건드렸다. 드골은 프랑스-독일을 국가연합체(supernation)로 격상시켜 미·소 대결에서 제3의 세력으로 자리잡겠다는 생각을 했다. 드골은 독일을 미국의 속방 쯤으로 보았기 때문에 독일에게 미국과 완전히 손을 떼라고 했다. 하지만 아데나워의 입장에서는 패전국으로서 무장이 해제된 상태에서 미국과의 돈독한 관계가 절실했다.

드골과 아데나워 사이에 틈이 벌어졌고, 드골은 독일인들이 돼지같이 행동한다. 그들은 스스로 미국의 품에 안겨 독일-프랑스 조약의 정신을 배반하고 유럽을 배반했다.”고 맹비난했다.

하지만 독일 의회는 19635월 엘리제 조약과 영국의 EEC 가입 인정, 미국과의 동맹 강화 등의 안건을 모두 통과시켰다.

드골은 엘리제 조약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드골의 예언이 빗나갔다. 드골은 나중에 사석에서 독일인들은 나를 실망시키기도 했지만, 나의 희망이기도 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1963년 1월 22일 파리 엘리제 궁에서 열린 조약 체결식 /위키피디아
1963년 1월 22일 파리 엘리제 궁에서 열린 조약 체결식 /위키피디아

 

엘리제 조약은 두 정상이 매년 최소 2회 이상 만나고, 분야별로 장관들이 정기적으로 회담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이외에도 교류재단을 통한 양국 청소년들이 교류하고, 연료순환·원자로등 핵분야를 공동 연구하며, 우주항공산업 기술 교류 환경협의회 설치 양국 교육대학 설립 TV문화채널 설립 양국 문화협의회 설치 등이 이뤄지고 있다.

또 두 나라 군인들로 구성된 연대를 창설해 유지되고 있다. 군사적으로 대결하지 않겠다는 상징적 표시다.

동안 두 나라의 청소년 800만명이 교류했다. 조약에서 청소년을 강조한 것은 어려서부터 서로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자는 것이다.

때때로 두 나라는 외교적 관점이 달라 대립하기도 했지만, 5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두나라는 엘리제 조약의 정신을 지켜나가고 있다. 엘리제 조약 40주년이 되던 20031월 독일 의회와 프랑스 의회는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합동회의를 열었다. 그곳은 1871년 독일 빌헬름 황제가 독일통일을 선포하고 황제즉위식을 연 곳으로, 프랑스인으로선 치욕적인 장소였다. 독일의 입장에서는 1차 대전에 패한후 굴욕적인 베르사이유 조약이 체결된 장소이기도 하다. 그 역사적인 장소에서 두 나라 의원들은 엘리제 조약을 영원히 지켜나가자고 약속했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정권이 바뀌어도, 독일이 통일된 이후에도 이 조약은 유지되고 있다. 엘리제 조약은 후에 EU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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