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년전 한국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00여년전 한국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3.24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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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원의 ‘저잣거리의 목소리들’, 구한말 언론 통해 당시 보통사람들의 삶 그려내

 

역사책들은 딱딱하다는 인상을 준다. 지배자들의 연대기를 다룬 것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 그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우리나라 근세사, 특히 구한말 역사를 다룬 많은 책들은 왕실과 고관대작들, 외세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일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이승원의 저잣거리의 목소리들은 그런 궁금증에 조금은 답을 주었다. 새로운 세기를 맞는 1900년대초 조선에서 이름을 바꾼 대한제국이 마지막 수명을 다해가고 있을 때 백성들은 어떠한 생활을 했을까. 이 책은 ‘1900, 여기 사람이 있다는 부제를 달았다. 책을 읽노라면 당대인이 타이머신을 타고 100여년 후에 환생한 느낌을 준다. 그들이 살아나 우린 그때 이랬지하고 증언한다.

1900~1910년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와 대한제국이라는 거창한 나라를 재건해 황제로 위세를 부린 시기였다. 하지만 칭제는 허세였고, 나라는 외세에 갈기갈기 찢겼다. 러일전쟁(1904~1905) 후 제국은 허울마저 벗기고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대한일보 창간호 1909년 6월 2일자 이도영의 삽화 /인터넷 캡쳐
대한일보 1909년 6월 2일자 삽화 /인터넷 캡쳐

 

작가 이승원은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작가다. 문화학자, 역사학자를 호칭이 붙는데,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학교의 탄생’, ‘사라진 직업의 역사등 다양한 자신의 저술을 냈다. ‘저잣거리의 목소리들를 구상한 계기는 1999년 구한말 신문이었던 대한민보를 읽다가 이도영 화백의 시사만평을 본 것이었다. 이도영(李道榮, 1884~1933)은 우리나라에 시시만화를 처음으로 도입한 서화가다. 그는 190962일자 대한민보 창간호에 연미복을 입은 개화신사가 "대국의 간형(大局肝衡), 한혼의 단취(韓魂團聚), 민성의 기관(民聲機關), 보도의 이채(報道異彩)"라고 말하는 만평을 그렸다. 이 만평이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라고 한다.

작가는 그후 10여년간 사회면인 대한민보 3면 기사를 두루 읽고, 한성순보,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 매일신문, 만세보 등의 신문과 대한계년사,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종시대사 등을 참조해 이 책을 펴냈다.

 

저잣거리의 목소리들은 역사의 씨줄과 날줄 사이에 비어 있는 보통사람의 스토리를 담았다. 나라가 망해가던 긴박한 시기에도 한국인들은 삶을 살아 나갔다. 그들은 여전히 미신을 믿었고, 고관들은 바람을 피웠다. 서양 풍속을 따라가는 개화가 미덕이었고, 언론에 사생활이 파헤쳐졌다. 정신병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생겼고, 박람회가 생겨났다. 성병치료제가 등장했다. 얼치기 개화꾼이라는 얼개화꾼이란 용어가 생기고 촛불시위와 같은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책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소개한다.

책표지 /네이버책
책표지 /네이버책

 

흥선대원군의 형 이최응의 손자 이지용의 부인 이홍경의 섹스스캔들이 저잣거리의 화제가 됐다. 이홍경은 1906년 남편이 일본특파대사로 갈 때 따라가 일본식을 따라 남편 성으로 개명하여 일본 사교계에 바람을 날렸다. 그녀는 주한 일본 공사관 하기와라 서기관과 통정하고 이토의 통역관, 한국주둔군 사령관 등과 밀회를 즐겼다. 이홍경은 일본공사관의 하기와라 서기관이 임기를 마치고 귀국할 때 서양식 작별인사로 입맞춤하다 혀가 깨물렸다는 저잣거리 이야기도 나왔다.

이홍경의 남편 이지용은 을사오적의 하나로, 진주 기생 산홍을 끼고 놀기도 하고, 고관대작 벼슬에 놀음에 빠져 화투대신이라 불렸었다. 그는 1910년 한일합병으로 백작 작위를 받았지만 1912년 화투판을 벌였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귀족 예우가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수련이란 여인은 무당이었는데,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황후의 혼백을 불러 아침저녁 제사를 지내고 고종 앞에서 굿을 하여 큰상을 받았다. 그러다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 저격당하자, 이토의 혼백상을 벌여놓고 경시청에 3년상을 치르겠다고 청원하고 조석으로 상식(上食)을 올렸다. 수련은 이토를 추모하는 봉신회(奉神會)를 조직해 추도회를 가졌을 때 600여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요물이라 불렀다.

진령군이란 무당은 임오군란 때 민비가 경기도 광주로 피신할 때 만나 환궁일을 알아맞혔다. 민비가 환궁할 때 그 무당을 궁으로 데리고 가서 진령군으로 봉하고 신당을 차려주어 궁궐에서 굿판을 벌이게 했다. 그녀가 황후의 총애를 받게 되자 정치에 개입하여 인사권을 휘둘렀다. 이유인은 진령군과 의남매를 맺고 법무대신, 고등재판장이 된 인물이다. 이 무렵 무당과 점쟁이로 장차관급 벼슬이 8, 군수급이 18명에 이르렀다. 1897년 서울의 무당과 점쟁이들이 1,000여명에 달했다.

매국노 이완용은 190912, 이재명의 칼을 맞고 대한의원에 입원했다가 석달만에 퇴원했는데, 며느리 임씨의 극진한 간호를 받는 사이에 색양으로 공경을 받았다는 소문이 났다. 당시 대한민보는 이완용이 며느리에게 어서 오라, 네가 오니 상처가 아프지 않구나라는 내용의 시사만평을 냈다. 하지만 사실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는데, 이는 민중이 이완용을 얼마나 싫어 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연극장은 남녀가 성을 탐닉하는 공간으로 인기를 끌었다. 관람객 중에는 공연보다 잿밥에 더 관심을 보인 사람들이 많았다. 연극장이 부킹장소로 활용된 것이다. 성매매를 알선하는 뚜쟁이들이 연극장에 득시글거렸다.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들과 이를 구매하려는 남성들도 연극장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언론에서는 연극장이 문명개화의 상징이 아니라 어린 학생과 남성이 갈보를 구경하는 곳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결국 사복경찰들이 연극장에 잠입해 성매매를 단속했다. 그렇다고 연극장의 성매매가 근절되지는 않았다.

 

이 책은 100년전 우리사회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았다.

만민공동회는 새로운 나라로 거듭나기 위한 격정적 축제의 현장이자 통과제의였다. 순종황제가 순행하는 길에 일본 국기를 들지 않으려 시위한 학생들, 삼십육계라는 도박의 광풍에 휩싸인 사람들, 문명개화를 일종의 패션이자 놀이로 여기며 애국계몽의 굴레에서 미끄러져 살아간 얼개화꾼, 신문지상에 근대식 교육에 대해 쓴소리를 남기며 일본 유학을 가겠다는 기생에 이르기까지 그 엄혹한 시기에도 민중들은 역동적인 삶을 살았다. 단발령과 함께 이발소가 등장하고, 사진이 처음 소개되었을 때의 당황함이 솔직담백하게 그려져 있다. 우리가 100여년전에 살았다면 이런 삶을 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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