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의 다이애나, 엘리자베트 황후
합스부르크의 다이애나, 엘리자베트 황후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3.29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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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의 간섭, 맏딸-황태자 사망, 남편 외도…끝내 괴한에 피살

 

315일 종료한 국립중앙박물관의 합스부르크 600전시회에 매력적인 여인의 초상화가 걸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 엘리자베트(Elisabeth Amalie Eugenie, 1837~1898)였다.

그녀는 19세기에 손꼽히는 미녀였다. 엘리자베트는 미인인데다 독일의 3대 귀족 가문의 하나인 비텔스바흐(Wittelsbach) 가문의 공주로 태어나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후가 되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화제를 뿌렸다. 오스트리아인들은 그녀의 미모에 환호했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되었다.

이버지와 어머니가 미남 미녀였기에 그녀는 어려서부터 빼어난 미모를 드러냈다. 별명이 씨씨(Sisi)였던 엘리자베트는 머리숱이 많고 허리까지 내려오도록 길렀다. 머리를 다듬는데만 3시간이 걸렸다고 하며, 식이요법으로 몸매를 관리했다고 한다.

그녀의 인생을 좌우한 것도 그녀의 미모였다. 어려서 리하르토 백작을 좋아했지만, 공작 집안에서 신분이 낮은 남자와 결혼할수 없다는 어머니의 반대로 헤어지게 되었다. 백작은 얼마후 결핵으로 사망했고, 엘리자베트는 첫사랑의 실패로 좌절했다.

그러던 중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와 엘리자베트의 언니 헬레네 사이에 혼담이 오갔다. 프란츠 요제프는 18살에 황제가 되었고, 예비황후 헬레네를 만나게 되었다. 젊은 황제는 언니 대신에 동생 씨씨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황제는 어머니에게 헬레나가 아니라 씨씨와 결혼하겠다고 요청했다. 어머니는 씨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들이자 황제의 뜻을 존중해 둘의 결혼을 묵인했다.

1854424일 둘은 결혼했다. 황제의 나이 24, 황후의 나이는 16세였다. 황제는 엘리자베트를 열렬히 사랑했다. 하지만 황후는 결혼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과 궁정생활에 싫증이 났다. 시어머니이자 이모인 조피는 사사건건 황제 부부의 사생활에 간섭했다. 둘 사이에 사랑은 오래가지 못하고 부부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엘리자베트가 첫딸 조피를 낳자 시어머니가 데려가 키웠고, 둘째 딸 기젤라도 데려갔다. 맏딸 조피는 여행중 사망했고, 엘리자베트는 큰 슬픔에 빠졌다. 셋째는 아들을 낳았는데, 루돌프였다. 시어머니는 루돌프를 데려가 키우고 기젤라를 엘리자베트에게 돌려주었다.

엘리자베트는 헝가리를 좋아했다. 헝가리가 외로운 자기와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넷째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했다. 오스트리아는 황태자에게 주고, 헝가리는 둘째아들에게 왕위를 맡겨 자치를 강화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럴 결심으로 넷째를 임신했는데, 딸 마리가 태어나면서 그녀의 꿈은 사라졌다.

 

1864년(26살) 초상화
1864년(26살) 초상화 /위키피디아

 

황가에 늘상 분란이 일어났고, 그러는 사이에 남편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바람을 피웠다. 황제는 카타리나 슈라트라는 당대의 일류 여배우를 만났고, 그녀를 위해 별장을 지어주고 애지중지했다 둘의 밀회는 34년이나 지속되었다.

씨씨는 남편의 외도를 알고는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친정 아버지와 황제의 간청으로 빈으로 다시 돌아왔으나 외국여행, 승마, 패션행사 등으로 소일했다.

1889년 황태자 루돌프가 자살했다. 루돌프는 23살이 되던 1881년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와 정략결혼을 했다. 어머니처럼 자유분방했던 루돌프는 아버지와 자주 충돌했고, 아내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1888년 루돌프는 귀족의 딸 마리 베체라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황태자는 이미 결혼했고 카톨릭 교리와 합스부르크가의 전통으로 이혼과 재혼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사랑은 점점 뜨거워졌다. 루돌프는 황태자 자리를 버릴수도 있다고 선언했고, 교황청에 혼인무효 여부도 문의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두 사람은 빈 교외에 있는 마이얼링이란 별장에서 권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황태자 나이는 30, 마리는 17세였다.

 

1867년(29살) 사진 /위키피디아
1867년(29살) 사진 /위키피디아

 

아들을 잃고 엘리자베트는 크게 낙담했다. 그녀는 궁전에 거의 들어오지 않고 긴 여행을 떠났다. 18989월 황후는 제네바 호수를 여행하고 있었다. 910일 오후 1시반쯤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 루이지 루케니가 그녀에게 접근해 허리에 칼을 찔렀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칼을 맞은지 몰랐다고 한다. 나이 60살에도 허리를 20인치로 유지하기 위해 코르셋을 바짝 쪼이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녀는 조금 지나고 나서야 자신이 칼에 찔렸음을 알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녀의 인생은 그가 죽고 나서 반전이 일어났다. 황후가 죽고 나서야 프란츠 조세프 황제는 자신이 황후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황제는 가족들에게 그녀가 내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내가 그 여자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너희들은 모를 거야라며 큰 슬픔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뮤지컬 엘리자벳을 비롯해 그와 관련한 수많은 소설과 드라마가 쏟아져 나왔다. 20세기 영국에 다이애나비가 있었다면, 19세기 오스트리아에 엘리자베트 황후가 있었다.

뮤지컬 엘리자벳마지막 장면에 암살자는 이렇게 외친다. “내가 그녀를 암살한 건, 그녀가 원했기 때문이오.” 엘리자베트 황후는 당시 죽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그 마음을 캐치해 대사로 엮은 것이리라.

 

황태자가 죽었을 때인 1889년(51세) 엘리자베트 /위키피디아
황태자가 죽었을 때인 1889년(51세) 엘리자베트 /위키피디아

 

프란츠 요제프는 엘리제베트가 죽은 후 재혼을 하지 않았다. 이미 나이가 68살이었다. 엘리자베트가 낳은 황태자가 죽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황제 승계순위는 조카에게 넘어갔다. 조카이자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1914628이루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청년에게 암살당하면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프란츠 조제프 황제는 1차대전 발발 2년후인 1916년에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프란츠 조제프가 죽고 종질인 카를 1세가 제위를 이었는데, 그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황제다. 이로써 합스부르크 600년 왕조는 종말을 고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Empress Elisabeth of Austria

Wikipedia, Franz Joseph I of Austria

합스부르크 600; 팜플렛, 한국경제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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