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이 그려낸 풍운아 흥선대원군
김동인이 그려낸 풍운아 흥선대원군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4.13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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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락호, 상갓집의 개 등의 표현은 과장이 심한듯…후대에 드라마의 소재로 활용

 

역사소설을 읽다 보면 내용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빠져든다. 그런 소설이 잘 쓴 소설이라고 할 것이다.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은 그런 뷰류의 하나다. 흥선대원군이 안동 김씨 세도에 수모를 당하며 비굴하게 살다가 조 대비와 은밀하게 접촉해 둘째 아들 재황을 임금으로 등극시키고, 권력을 잡는다는 스토리다.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은 흥선대원군에 관한 허구를 사실인양 믿어지도록 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했다. 소설은 후대에 드라마의 소재로 활용되고 대중들에게 집권 이전 대원군의 행적을 진짜인처럼 각인시켰다.

소설의 상당부분이 고증이 되지 않는다. 그런 소재가 확인하지도 않은채 드라마에 사실처럼 등장한다. 예컨대 철종 때 물 지게를 지는 홍순필이란 백성이 세도가 김좌근의 애첩 양씨의 눈에 들어 함경도 원님이 되었다. 순필이 임금을 알현한 자리에서 노형이 나랏님이요? 처음 뵙겠습니다.”고 했다는데, 사료 어느 곳에도 없는 내용이다. 김동인이 어디선가 비슷한 얘기를 듣고 지어낸 것인데, 이 이야기는 어느 방송에선가 사실처럼 인용되었다.

소설은 소설로만 보면 된다. 역사를 다루는 사람들에게 흥선대원군(1820~1898)에 대한 평가는 극에서 극으로 갈라진다. 풍운아라는 견해, 난세의 영웅이라는 주장도 있거니와, 권력의 화신이라는 비난도 있다. 어느 주장을 따르는지는 화자의 견해에 달려 있다.

책 표지 /네이버 책
책 표지 /네이버 책

 

김동인의 입장에서는 흥선은 풍운아다. ‘운현궁의 봄이 출간된 1933년엔 흥선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고, 시절은 일제시대였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풍요롭게 살던 김동인은 부모님이 돌아가신후 물려받은 재산을 흥청망청 다 써버리고 호구지책에 빠져 있던 시기다. 그는 글줄을 써서 돈을 벌어야 했고, 생계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원군의 스토리를 지어냈다.

소설가의 입장에서 대원군의 인생에 가장 센세이션한 시기가 집권 직전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는 파락호, 상갓집의 개에서 어느날 갑자기 조 대비와 손을 잡고 권력을 쥐게 된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갈등관계, 왕가와 세도가의 음모가 그려진다. 그 무렵 떠돌던 야사가 총 동원되고, 각색되고 덧칠해 졌다. 소설의 내용이 기정사실화되며 새로운 야사가 만들어진다. 김동인은 그 중심에 있었고, 그 역할을 통해 얼만가의 돈을 벌어 입에 풀칠을 했다.

 

실제 흥선대원군이 파락호 또는 상갓집의 개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고종에 앞서 철종이 강화도에서 나뭇꿋이었다는 사실을 비추어 그 무렵 왕족들이 세도가에 의해 갖가지 통제와 위협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외척의 세도질을 꼴 사납게 바라보던 민중들이 만들어 낸 얘기일 가능성이 있다.

흥선은 순조 때부터 계속되는 세도 정치로 20대에 한직을 몇 번 돌다가 그만두고 일신상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정치에 뜻이 없는양 가장하고 풍류객이나 건달을 자처한 것 같다. 심지어 안동 김씨를 찾아가 아들 취직을 부탁하다가 궁도령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철종 사후 유력한 왕위계승 순위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고 철저하게 위장을 했을 것이다. 만일을 대비해 안동 김씨와 척을 지고 있는 풍양 조씨와 가깝게 지내고, 그 정점에 있는 조 대비와도 선을 댔다. 혹여 기회가 생기면 재면이냐, 재황이냐의 고민을 했고, 절호의 기회가 생기자 둘째 재황을 선택한 것이다.

 

김동인은 운현궁의 봄에서 고종 등극과 대원군 집권까지만 다뤘고, 그후 대원군의 정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쇄국정책과 며느리 민비와의 갈등,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에서 행태, 맏아들 여러차례 고종 폐위를 음모했던 일들은 소설에서 그려진 대원군의 웅대함으로 실추시킨다.

 

운현궁의 봄에서 그려진 대원군은 파락호로 떨어진 김동인의 스토리일수도 있다. 평양 갑부 집안에서 태어는 그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취미생활을 하고 여자들과 놀아나며 돈을 펑펑 썼다고 한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졌다. 자신의 처지를 대원군에 대입해 그려내고, 언젠가 권력과 부를 다시 잡을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소설 속에 설정한 것이 아닐까. 그 다음 권력에 취한 대원군은 언급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운현궁의 봄은 대원군의 집권후 행태, 그리고 김동인의 그후 친일행각에 의해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했다. 다만 역사 소재가 빈약한 상황에서 그가 지어낸 창작은 드라마의 소재로 부활해 많은 사람의 뇌리에 사실로 굳어져 있다.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있는 운현궁 이로당 우물터 /문화재청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있는 운현궁 이로당 우물터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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