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 본거지 사충서원이 남아 있는 까닭
노론 본거지 사충서원이 남아 있는 까닭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4.14 13: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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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소설에 대원군 부하를 봐줬다고 함…노량진에서 보광동, 현재는 하남에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에 사육신묘가 있다. 그 입구에 조선 영조 때(1725) 사액서원으로 건립된 사충서원이 있었다.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시절에 전국의 서원을 대거 철폐할 때에도 살아 남았다.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한 곳이 없는데,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에 사충서원에 대한 스토리가 나와 있다. 아마도 이 스토리가 사충서원의 존속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사충서원은 사충사(四忠祠)라고 했다. 동작구청에 따르면, 이 서원은 사육신묘 입구 동산에 건립되었다가 1927년 철도용지로 수용되어 용산구 보광동 28번지로 이전, 6·25때 소실되었다.

조선 경종 때에 일어난 신임사화 당시 소론에 의해 사사된 노론의 4대신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이이명(李頤命)을 제사하던 사당이다. 노론이 정권을 잡은 후 자기네 선배들을 복원시킨 것이다.

이들이 사사된 것도, 복원된 것도 당파싸움의 결과였다. 숙종때 남인세력을 제거하고 장기집권하던 서인세력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려 경종이 즉위하자 후손이 없던 경종의 후계문제를 놓고 격돌했다. 경종을 옹립해 세를 잡은 소론이 왕의 동생 연잉군(영조)을 세자로 세운 노론 4대신 등을 역모로 몰아 죽였다. 하지만 경종이 곧 병사하고 영조가 즉위하자 영조는 자신을 옹립하려다 희생당한 4대신을 즉시 복권시키고 사충서원을 세워 모셨다.

 

원래 사충서원 위치 /동작구청
원래 사충서원 위치 /동작구청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이전의 어느날, 그를 따르던 조성하(趙成夏)가 사충사의 유일사 직책을 얻은 이 학사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유일사는 서원을 관리하는 직책이다. 패가망신해 가난에 찌들어 있던 선비가 5대조가 사충사 대신이라는 이유로 유일사가 된 것이다.

운현궁의 봄에 당시 서원의 폐해가 그대로 서술되어 있다. 서원은 훌륭한 유학자의 위패를 모셔 놓고 철따라 제사를 지내며, 학문을 익히고, 향촌의 교화를 담당하는 사학기관이었다. 16세기 중엽에 이황의 건의로 임금이 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을 백운동서원에 내리고, 읽을 책과 부릴 노비와 경비로 쓸 토지를 내려 주었다. 이것을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고 했다. 사충사도 사액서원의 하나였다.

성현을 모시고 학문에 힘을 써야 할 서원이 어느덧 권력기관이 되었다. 서원에 딸린 토지는 면세되었고, 그곳에 적을 둔 유생은 벼슬을 얻기가 쉬웠다. 이에 유학자의 자손이나 제자들은 수원을 세워 계보를 형성했고, 향촌에서 권력과 존경을 받는 배경이 되었다. 내세울 만한 학문적 업적이나 행적이 없는 인물이라도 돈푼이나 권력이 있으면 서원을 세웠다.

서원에선 제사를 지낼 때에 묵패(墨牌)를 돌렸다. 서원은 국왕의 옥새에 해당하는 조()라는 도장을 묵에 뭍혀 문서에 찍고 관아나 부호들에게 보냈다. 그러면 관아나 부호들은 그 묵패에 찍힌 내역대로 경비를 내야 했다. 만약 내지 않으면 고을 원은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며, 부호들은 마지 못해 돈을 내야 했다. 백성들은 서원의 수탈대상이었다.

 

조성하는 이 학사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어느 민원인이 흥선군의 부하 윤필주를 잡아 가둬달라고 호소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대원군은 권력에서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충서원에서 민원을 넣으면 관가에서 흥선군의 부하를 감옥에 집어 넣을 형국이었다. 조성하는 윤필주를 가두지 말아달라고 요청했고, 이 학사는 조성하의 요청을 받아 들였다.

소설의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되지 않으나, 사충사는 서슬퍼런 대원군 집권 시기에 살아 남았다. 조선시대에 한양엔 서원이 없었다. 명문 교육기관인 성균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강 건너편 노들나루에 있던 사충서원은 한양에서 가까운 서원으로 영향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은 노론의 근거지였던 충북 괴산군의 화양서원도 폐쇄했다. 그런 대원군이 한양근처 노론의 근거지였던 사충서원을 놓아둘리 없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대원군이 바닥 생활을 할 때 조성하의 부탁으로 대원군 졸개를 살려준 덕분에 이 서원은 문을 닫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경기도 하남시 사충서원 /한국문화원 연합회
경기도 하남시 사충서원 /한국문화원 연합회

 

사충서원이 이사해 새로 설립한 용산구 보광동은 광복 이전에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이었다. 6·25때 파괴된 서원은 1968년 경기도 하남시 성산곡동으로 이건했고, 현재 하남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봄·가을에 4대신에 대해 향사를 지내고 있다.

 

노량진역앞 사충서원터 표지판 /박차영
노량진역앞 사충서원터 표지판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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