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그후③…돈키호테 수준의 북벌론
병자호란 그후③…돈키호테 수준의 북벌론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12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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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하는 명나라에 충성, 조선이 소중화라는 믿음…조종암 만동묘 세워 충성 맹세

 

경기도 가평 조종면 대보리에 조종암(朝宗岩)이라는 바위가 있다. 경기도기념물 28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바위에는 조선시대에 모화(慕華)사상을 가득 담은 글귀가 조각되어 있다. 바위에 비석을 세우고 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누구를 위한 제사인가.

숭명배청(崇明排淸).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베푼 은혜를 잊지 말고, 병자호란때 청()나라에게 받은 수모를 되새기자는 뜻에서 망한 명나라에 제사지내는 곳이다.

조선 숙종 10(1684), 당시 가평군수를 지낸 이제두(李齊杜)와 명나라 유신 허격(許格)과 백해명(白海明) 등이 큰 바위 면에 글씨를 새겼다고 한다. 조종(朝宗)이란 제후가 천자를 알현한다는 뜻인데, 조선시대 후기에 명분론을 앞세운 숭명배청론자들에 의해 정신적 지주로 삼는 장소였다.

글씨는 명나라의 마지막 임금 의종이 쓴 思無邪’(사은특: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이라는 친필을 허격이 가져와 맨 왼쪽 높은 바위에 새겼다. 그 아래에는 선조(宣祖)의 친필 황하가 일만 번 꺾여도 반드시 동녘으로 흐르거니, 명나라 군대가 왜적을 물리치고 우리나라를 다시 찾아주었네하는 萬折必東 再造蕃邦’(만절필동 재조번방)이 새겨져 있다. 조선 임금이 명나라 황제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었으니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의미다.

또 선조의 친손 낭선군(郎善君) 이우(李俁)‘(명나라) 황제를 뵙는 바위라는 朝宗巖’(조종암)을 새겼다. 조선후반기 주류 사상가인 송시열(宋時烈)이 쓴 효종의 글귀 일모도원 지통재심(日暮道遠 至痛在心: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지극한 아픔이 마음속에 있네)라는 글귀도 있다. 긴 세월의 풍상을 겪고 바위 면이 검은 이끼로 덮이긴 했지만 워낙 깊고 뚜렷이 각을 떴기 때문에 맨눈으로도 판독하는데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경기도 가평군 조종암 기실비 /문화재청
경기도 가평군 조종암 기실비 /문화재청

 

병자호란 이후 조선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은 숭명반청, 소중화(小中華)의 사고에 빠졌다. 그 중심에 송시열이 있다.

송시열은 고향이 충청도 회덕(懷德)으로, 인조 11(1633) 사마시에 장원급제해 생원이 되었고, 병자호란 직전에 봉림대군(훗날 효종)을 가르치는 사부가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청군에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주전론을 주장했으며, 인조가 홍타이지에 항복하고 봉림대군이 인질로 청나라에 끌려가자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했다. 그는 효종이 즉위해 부르자, 조정에 복귀했다.

송시열은 주자(朱子)를 공자의 도통을 계승한 유일한 사람으로 보았다. 주자는 여진족 금()나라에 쫓겨 양쯔강 남쪽으로 피신한 남송 시대의 사람이다. 송시열은 조성이 청에 당한 굴욕을 송()나라가 금에 당한 굴욕과 비교했다. 그는 남송이 주자를 받들어 중화의 문명을 유지했듯이 조선도 주자학을 받들어 여진 오랭캐 청에 저항해야 한다며 북벌론(北伐論)을 주장했다.

그는 효종이 부르자 1649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기축봉사(己丑封事)를 바쳤다.

공자가 <춘추>(春秋)를 지어 대일통(大一統)의 의리를 천하후세에 밝힌 뒤로 혈기가 있는 부류라면 모둔 증국은 존중해야 하고, 이적(夷狄)은 추하게 여겨야 할 것으로 알았습니다. …… (명나라) 태조 고황제(주원장)는 우리 태조 강헌대왕과 동시에 창업하여 군신의 의리를 정하였으니, 소국을 사랑하는 은혜와 충정의 절의가 거의 3백년 동안 침체되지 않았는데, 불행히 저번에 추악한 오랑캐가 마구 흉악을 부려 온 나라가 함락되어 당당한 예의지국이 온통 비린내에 더럽혀 졌으니, 이때의 일을 차마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 더구나 우리나라는 신종황제의 은혜를 힘입어 임진년의 변란에 종사가 이미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 존재되고, 생민이 거의 다 없어질 뻔하다가 다시 소생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의 물 한포기, 나무 한 그루, 백성의 머리털 하나까지 황은(皇恩)을 입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크게 원통해하는 것이 온 천하에 그 누가 우리와 같겠습니까.”

송시열이 효종에게 기축봉사를 바칠 때 청은 순치제(順治帝) 6년으로, 베이징에 입성해(1644) 남하하고, 명의 잔존세력은 남명 정권을 세워 겨우 명맥만 유지할 때다. 청이 중국 대륙을 석권할 때에 숨만 붙어 있던 남명 정권에 충성하자는 명분을 내세웠던 것이다.

송시열은 기축봉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오늘날의 논의를 보면 모두 병력이 약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우리나라(조선)3분의1을 가지고도 수나라와 당나라의 백만 대군을 물리쳤고, 당 태종 같은 당대의 영웅도 안시성에서 고전했습니다. 이 오랑캐는 교활한 짐승인데, 어찌 태종의 만분의 일이라도 바랄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우리의 포수는 천하의 정예부대로서 그때는 없었던 것입니다. 급한 일은 오로지 군사를 훈련하고 장수를 뽑으며, 군량을 비축하고 군율을 엄하게 하는 것입니다.”

당대의 실력자이자 논객이라는 송시열의 사고는 거의 돈키호테 수준이다. 홍타이지의 기병 3백에 우왕좌왕하며 남한산성으로 도망가던 자들이 고구려와 안시성을 비유하고, 홍이포를 보유하고 있는 청군에 조총 포대로 싸우겠다는 무모함은 창을 들고 총포와 맞서겠다는 미치광이 기사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런 무모한 주장이 먹혀들어갔다. 효종은 부왕 인조가 삼전도에서 당한 굴욕과 자신이 8년간 선양에 볼모로 끌려가 겪은 수모를 잊지 않았다. 효종은 송시열이 기축봉사에서 제시한 북벌론을 받아 들여 군사를 조련하고 불벌에 대한 전략을 짜면서 시기를 기다렸다.

효종은 북벌의 꿈을 달성하지 못하고 즉위 10년만에 세상을 떴다.

효종이 이루지 못한 꿈은 현종에 이어진다. 하지만 남명 정권은 현종 3년인 1662년에 그나마 명맥을 끊어졌고, 더 이상 명의 부활에 기댄 북벌론은 의미가 사라졌다. 조선도 명의 소멸을 받아들여야 했다.

 

충북 괴산군 만동묘 정비 /문화재청
충북 괴산군 만동묘 정비 /문화재청

 

하지만 명나라가 멸망했어도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살아 있었다. 중국이 사라졌으니, 조선이 소중화로서 중화의 명맥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논리로 발전시켜 나간 것이다.

송시열은 정계에 은퇴한 후 충북 괴산군에 은거하면서 그곳을 화양동(華陽洞)이라고 이름지었다. ‘중국의 태양이 비치는 곳이라는 뜻이다. 실제, 송시열은 일상생활에서도 철저하게 명나라 의복과 의식을 고집했다고 한다. 또 끝까지 청의 연호 대신에 명의 연호를 썼다.

그곳에는 화양서원이 있는데, 숙종 30(1710)송시열의 제자들이 서원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웠다. 만동(萬東)은 가평 조정암에 선조가 썼다는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준 말이다. 이 사당에서 조선의 유림들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하여 원군을 파병한 명나라 신종(만력제)과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숭정제)를 제사지냈다.

사대부들, 특히 조선후기에 정권을 잡은 노론은 비록 명나라가 망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명나라를 섬기면서 이적(夷狄) 청나라에 저항하는 것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 뿌리깊은 사대주의는 조선말기에 서양을 오랑캐로 규정하는 척화사상으로 이어진다.

 

가평 조종암과 괴산 만동묘는 병자호란으로 수모를 당한 이후 숭명배청 사상의 사대부들이 정신적 지주로 삼는 장소가 되었다. 그들이 조종암을 얼마나 섬겼던지 보존회가 조직되고, 조종암문헌록을 펴내기도 했다. 만동묘에는 조정에서 제사 비용을 마련할 토지(祭田)과 노비를 주고, 묘당을 지어주고 사당을 지키게 하며, 세금을 면제하는 등 특혜를 주었다.

서양 세력이 이미 코 앞에 다가왔는데도,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던지를 보여주는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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