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자동 종침교의 사연
내자동 종침교의 사연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4.15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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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종·허침 누님의 혜안이 돋보이는 곳…“동궁이 있는데 어찌 어미를 죄 주랴”

 

인왕산 백운동계곡에서 발원해 서촌을 흐르는 냇물을 백운동천(雲洞川)라 하는데, 풍경이 좋아 조선시대엔 도성내 5대 경승의 하나로 꼽혔다고 한다. 이 냇물은 경복궁 서쪽을 감싸 광화문으로 흘러 청계천과 합류한다. 지금은 이 내가 모두 복개되어 보이지 않는데, 지도를 보면 물 흐르는 자리가 사선으로 드러나 있다. 조선시대에 종로구 내자동에 냇물을 건너는 돌다리가 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종침교(琮沈橋) 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이 돌다리가 종침교가 된데는 사연이 있다.

 

종침교 위치 /네이버 지도
종침교 위치 /네이버 지도

 

조선 9대 성종은 한명회의 딸과 결혼했으나 한비는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성종은 왕자를 낳은 후궁 윤씨를 계비로 맞았다. 윤비의 몸에서 난 왕자가 연산군이다.

윤씨는 시기심이 많고 버릇이 없었다. 윤씨는 후궁들을 독살하기 위해 비상(砒霜)을 숨겨두었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고,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폐비 논의에 휩싸였다.

성종은 윤씨를 폐하고 사사를 하는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신하들을 불렀다. 우의정 허종(許琮)이 왕의 부름을 받고 입궐하는 도중에 시간이 좀 이르고 해서 종침교 근처에 살고 있는 누님 댁에 들렀다. 동생 허침(許沈)도 비슷한 시간에 도착했다. 형제는 누님에게 오늘 어전에서 논의할 사안을 설명하고 의견을 구했다. 누님은 이렇게 비유했다.

어떤 집의 주인이 하인에게 부인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하인은 주인에게 복종해 부인을 죽였다. 세월이 흘러 아들이 주인이 되었다. 어머니를 죽인 하인이 아들의 총애를 받을수 있을까.”

누님도 글을 많이 배워 문장과 식견이 뛰어났다고 한다. 두 형제는 누님을 매우 공손하게 섬겼고, 조정에 중대한 논의가 있을 때면 찾아가 의견을 묻곤 했다. 누님은 아들이 동궁으로 있는데, 그 어미를 죄 주고서 어찌 국가가 편안하고 탈이 없겠는가?”라고 말해 주었다.

누님의 의견을 들은 두 형제는 깨달은 바 있었다. 허종은 누님 집을 나와 돌다리를 건너면서 일부러 낙마해 부상을 입고 그것을 핑계삼아 입궐하지 않았다. 동생 허침은 입궐했으나 임금의 뜻을 거슬러 말했고, 그 이유로 직위에서 쫓겨났다.

 

종침교 표지석 /박차영
종침교 표지석 /박차영

 

세월이 흘러 성종이 죽고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이 임금이 되었다. 연산군은 포악했다. 어머니 윤씨의 폐비에 찬성했다 하여, 윤필상·김굉필 등 수십 명을 살해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 등을 부관참시하는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켰다.

이때 허씨 형제들은 어전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참석했다 하더라도 폐비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목숨을 건졌다. 사람들은 그 누님의 뛰어난 식견에 탄복했고, 허종이 부러 낙마한 다리를 형제 이름을 따 종침교라 불렀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도성대지도와 한양도성도에는 종침교 위치에 송교(松橋)라고 표시되어 있으며, 1925년 백운동천을 복개하는 과정에서 소멸되었다.

종침교는 줄여 종교(琮橋)라고 했으며, 인근 마을 명칭이 종교동이다. 근처에 종교교회가 있는데, 교회면 교회지 무슨 종교교회냐는 사람이 있다. 종교교회의 종교는 한자로 宗敎가 아니라 琮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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