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 신록에 눈이 부신 장성 백양사
연두 신록에 눈이 부신 장성 백양사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4.17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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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찰과 백학봉, 연못이 어우러지는 자연의 향연…비자나무 서식지

 

봄에는 백양사요, 가을에는 내장사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 말을 따라한 것은 아닌데, 지난해 가을 내장산을 다녀오고, 이번 봄에 백양사를 보았다. 지난해 11월 내장산에 갔을 때엔 온통 붉은 색이었다. 그때의 낙엽이 지고, 새봄이 돌아와 내장산 건너편 백암산 남쪽 사면은 새로 올라온 신록으로 연두색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자연은 언제나 신비롭고 웅대하다. 자연 속에서 인간은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정읍 내장산은 전라북도, 장성 백암산은 전라남도다. 이들 봉우리를 안고 있는 내장산국립공원은 호남을 남북으로 가른다.

백암산은 대한 8경의 하나로 경치가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백양사 대웅전은 큰 바위에 짓눌려 있는 느낌이다. 백암산의 저 봉우리 바위가 부처님 얼굴처럼 보인다. 유림의 눈에 저 산 위의 웅장한 바위가 부처님으로 보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 모습을 고고한 백학(白鶴)이라고 추리했다. 그래서 백학봉(白鶴峰)이다.

정도전, 이색, 정몽주, 김인후, 박순, 송순 등 당대에 내로라는 유학자들이 이곳을 탐방하고 글을 남겼다. 정도전의 정토사교루기, 정몽주의 기제쌍계루가 전해진다. 정치적으로 원수가 된 두 사람이지만 쌍계루 앞에서 백학봉을 바라보았을 때엔 자연의 위대함을 찬양함에는 다름이 없었다. 쌍계루 앞에 정몽주의 시가 적혀 있다.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 시달렸는데, 어느날 옷을 떨치고 그대와 함께 올라보리.” (久向人間煩熱惱 /拂衣何日共君登)

사대부들이 시를 쓴 곳은 지금 보아도 경치좋은 곳이다. 일은 하지 않고 좋은 곳만 찾아다니던 유한계급이었기에 조선 유림이 놀던 곳은 절경이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백양사 쌍계루 앞 연못 주변은 지금도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고 있다. 천년고찰과 백학봉, 연못이 잘 어우러지며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의 평안을 만들어 내는 곳이다.

 

연못에 비친 백학봉 /박차영
연못에 비친 백학봉 /박차영

 

우리는 KTX로 정읍까지 가서, 무궁화호로 바꿔타고 백양사역에 내렸다. 택시 기사분이 가을에도 백양사가 좋다고 자랑했다. 그분은 내장산의 단풍은 잎이 굵고 짙붉지만, 백양사 단풍은 아기자기 하고 색깔도 다채롭다고 설명했다. 내장산은 워낙 유명해서 단풍철엔 인파에 짓밟히지만, 같은 산덩어리의 남쪽 사면에 있는 백암산은 내장산의 유명세에 밀려 있는 느낌이다. 단풍의 양으로는 내장산이지만, 질로는 백암산이 낫다고 한다.

우리가 백양사를 찾았을 땐 신록이 한창이었다. 연두색이 곱게 내린 산천은 눈이 부셨다. 마침 굵은 빗줄기가 한시간 이상 떨어졌다. 가뜩이나 호남에 가뭄이 심한데 비가 내려줬다. 나중에 들었는데, 백양사 근처에만 비가 오고, 장성읍에는 한방울도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백양사 대웅전과 백학봉 /박차영
백양사 대웅전과 백학봉 /박차영

 

백양사는 백제 무왕 34(633)에 여환(如幻)스님이 백암사를 창건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후 정토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이후 중수되었다. 사찰의 역사나 유물에선 대단함을 그리 찾을수 없지만 조계종 18교구의 본사로서 26개소의 말사를 거느린 큰 사찰이다. 정토사라는 절 이름이 언제 백양사로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조선 선조 때라는 설, 숙종 때라는 설이 있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어느날 팔원(八元) 선사가 약사암에서 불경을 읽는데, 뒷산 백학봉에서 흰 양 한 마리가 내려와서 법화경 외우는 소리를 한참 듣다가 돌아갔다고 한다. 그 뒤로 정토사를 백양사로 부르기 시작했으며 팔원선사의 법호도 환양(喚羊)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백양사 구내 보리수 /박차영
백양사 구내 보리수 /박차영

 

지금의 백양사는 1917년부터 만암(曼庵) 선사가 절을 대대적으로 중창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때 세운 천왕문은 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익공식 맞배지붕 집으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마당 가운데 보리수 한 그루가 서 있고 좌우로 스님들 공부하는 방과 요사채, 그리고 고루와 종각이 늘어서 있다.

 

쌍계루와 백학봉 /박차영
쌍계루와 백학봉 /박차영

 

쌍계루는 운문암 계곡과 천진암 계곡의 두 물이 만나는 곳에 세워진 누각으로, 1350년 각진국사에 의해 세워졌으나, 1370년 큰비로 무너지고 1377년 청수 스님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그후 1950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1985녀 복원되었다. 그후 처마가 썩어 2009년 해체되어 다시 세워 지금에 이른다.

 

비자나무 숲 /박차영
비자나무 숲 /박차영

 

백양사 절 뒤의 백학봉 서쪽 기슭까지는 사철 푸른 비자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비자나무 분포 북한(北限)지대로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비자나무는 난대성 싱록침엽교목으로, 고려시대 각진국사가 구충제로 사용되었던 비자열매를 나눠주기 위해 심었다고 한다. 1962년에 이곳 비자나무 숲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백양사 입구 계곡과 운문암, 약사암, 천진암 주변, 가인마을 뒤쪽 청류암 입구 주변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백양사에서는 오랫동안 산과 나무를 맡은 산감(山監)스님을 두고 비자나무를 절을 대표하는 나무로 관리해왔고, 나뭇잎이 비()자 모양이라고 해서 비목(榧木)이라고도 불린다.

 

국기제단 /박차영
국기제단 /박차영

 

운문암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국기제단(國祈祭壇)이 있다. 국가의 환란이나 재당(전염병, 가뭄 등)이 있을 때 천신과 땅신에게 제사지내는 곳이다. 고려 충정왕 때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구전이 내려오며, 정토사 사적이 조선 선조 36년과 이듬해에 봉행기록이 있으며, 숙종 25년 전염병 창궐 때 임금이 친히 제문을 짓고 제를 올렸다고 한다.

 

고불매 /문화재청
고불매 /문화재청

 

백양사는 고불매(古佛梅)라는 매화고목으로 유명하다. 고목은 매년 3월 말경에 진분홍빛 홍매(紅梅)를 피우는데, 꽃 색깔이 아름답고 향기가 은은하여 산사의 정취를 돋운다. 아래부터 셋으로 갈라진 줄기 뻗음은 고목의 품위를 그대로 갖고 있으며 모양도 깔끔하여 매화 원래의 기품이 살아있다.

대체로 1700년경부터 스님들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100m쯤 떨어진 옛 백양사 앞뜰에다 여러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고 가꾸어 왔다고 한다. 1863년 절을 이쪽으로 옮겨 지을 때, 그때까지 살아남은 홍매와 백매 한 그루씩도 같이 옮겨 심었다. 그러나 백매는 죽어 버리고 지금의 홍매 한 그루만 살아남았다. 1947년 부처님의 원래의 가르침을 기리자는 뜻으로 백양사 고불총림을 결성하면서 고불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쌍계루와 백학봉 /박차영
쌍계루와 백학봉 /박차영
백양사 입구 /박차영
백양사 입구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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