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위기의 경고③] 실물경제 먼저 무너졌다
[IMF 위기의 경고③] 실물경제 먼저 무너졌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12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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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보 사태 이후 국내금융기관 신용도 하락…해외에서 연쇄 부도 우려

 

1997년 외환위기에 앞서 한국의 실물 경제가 붕괴됐다. 실물경제 붕괴는 재별 경제의 붕괴와 다름없다. 재벌 기업의 과잉 투자는 막대한 외채 차입을 유발하고, 경기 후퇴를 초래했으며, 그 결과 재벌 기업의 연쇄 도산, 금융시스템 붕괴, 나아가 외환 부족 현상으로 이어졌다.

반도체 호황에 가려져 있던 재벌 기업들의 탐욕은 국제 반도체 가격이 급락하면서 한국 경제에 심각한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반도체 가격 하락은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의 증설에도 문제가 있었으나, 한국의 삼성, 현대, LG의 증설 경쟁에 더 큰 원인이 있었다. 세계 최대의 반도체 생산국이 설비를 늘린데다 다른 동남아 국가의 설비 증가와 맞물려 가격이 폭락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재벌들은 설비를 두배 세배 늘리면 세계 시장 점유율도 두배 세배 늘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경제학의 초보인 수요 공급의 원리도 무시하고, 한국 재벌은 하면 된다는 허구의식에 매달려 해서는 안될 일을 저질렀다.

반도체는 그나마 몇 해 동안 벌어놓은 이익이 있었지만, 철강, 자동차, 유화는 이익도 남기지 못한 상태에서 설비 과잉에 따른 디플레이션을 맞았다. 경쟁력이 약한 고리서부터 서서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한보철강, 삼미특수강, 한화, 쌍용 자동차, 기아 자동차의 부도는 한국 재벌의 탐욕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1990년대 중반 공격 경영이니, 세계화니 하는 재벌들이 미사여구는 거품을 인식하지 못하는 재벌들의 환상이 만들어낸 경영구호였다.

 

서울 대치동 은마상가에 있던 한보그룹 사옥의 상호표시 /mbc 캡쳐
서울 대치동 은마상가에 있던 한보그룹 사옥의 상호표시 /mbc 캡쳐

 

그러면 한국경제의 실물 분야가 무너지면서 금융위기로 전환되는 과정을 외국 언론들의 관점에서 돌이켜 보자. (미안한 얘기지만, 한국 언론들은 재벌에 약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들은 재벌을 죽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국 언론들은 재벌 기업에 비판을 자제함으로써 재벌의 탐욕을 묵인함으로써 자멸의 길을 걷도록 방관했다. 오히려 외국 언론들이 일찍부터 비판적 시각에서 한국 재벌의 방만함이 경제 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진단했다.)

1997년 연초에 터진 한보 부도는 한국 재벌 구조의 문제와 정경유착, 금융시스템의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자기자본금이 900억원인 회사에 무려 57,000억원의 돈을 빌려주었다는 것은 국제 금융관행상 어느 나라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외국 언론들은 한보 사태가 한국 경제에 큰 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우려의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비즈니스 위크는 이렇게 썼다. 1)

 

심각한 (경제) 위기는 한국 정책 당국자와 재벌집단의 전략적 오류가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은 정부의 철저한 통제와 수츨 드라이브형 성장정책을 통해 국내 시장에서 재벌을 보호함으로써 아시아의 용이 됐다. 그러나 지금 이러한 중상주의적 정책은 한국의 기적을 한국의 병으로 만들고 있다. 그 대가로 한국 재벌의 경쟁력이 위협받고 있다. 자동차에서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사업을 다각화하는 바람에 재벌 기업의 마진이 낮아지고 있다. 아시아의 경쟁자들이 (한국 재벌이 벌이고 있는)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한보의 몰락은 한국 금융시스템에 대한 국제적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비즈니스 위크의 또다른 기사를 보자. 2)

한국 금융기관들은 기업의 재무구조보다 차입자의 정치적 커넥션을 중시하고 있다. 국제 신용평가기관들이 한보에 대출을 해준 3개 채권은행의 신용등급을 요주의 대상(CreditWatch)로 떨어뜨렸다.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은 한보 부도로 주가총액의 14%18,000만 달러의 악성 여신이 발생했다.”

한보 사태는 한국의 은행들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자금조달 코스트를 높였다. 한보사태 이전에 한국 금융기관의 해외자금 조달 금리가 LIBOR+0.27%였으나, 사건이 터지자 가산금리가 0.32%0.05% 포인트 상승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해외차입 가산금리 0.05% 포인트는 매우 높은 수준이다.

한보 사태 직후부터 국제 금융가에서는 한국 금융시스템에 대한 리스크를 고려한 한국 프리미엄(Korean premium)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당시 일본 금융기관의 가산금리가 0.10~0.15%였으므로 한국 프리미엄은 일본 프리미엄보다 2~3배 높았다.

재벌 기업들이 국제화라는 미명 하에 규제가 약한 외국에 공장을 지어대는 바람에 한국의 단기 외채가 누적되고 있었다. 따라서 해외차입 코스트 증가는 빚더미에 눌려있는 한국 기업에게 치명적이었고, 이 과정에서 돈을 빌려준 은행도 부실 더미로 변해갔다.

월스트리트 저널지는 한보 사태 직후 한국 14개 시중은행의 96년도 주가총액은 1965,000만 달러로 한해 사이에 523,000만 달러(21%)나 감소했고, 전 은행의 이익도 10% 위축된 것으로 추산했다. 3)

한국 금융당국은 부실 여신의 규모를 정확히 밝히지 않았으나, 국제 금융가에선 부실 여신의 규모가 상당 규모에 이를 것이라는 추측이 무성했다.

이 무렵 이석채 청와대 경제수석의 발언이 국제 시장을 흔들었다. 그는 부실 은행에 대한 한은 특융이 불가능하다며 은행이 쓰러져도 정부차원의 지원이 없음을 강조했다. 한국일보의 특종으로 전달된 이석채씨의 발언은 시장경제 원리로 보면 당연한 내용이다. 그렇지만 한국 금융기관의 부실여신을 걱정하던 국제 금융가에서는 그의 말이 역기능을 했다. 한국 금융기관의 부실이 생각보다 많은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았고, 국제시장에서 한국 프리미엄이 뛰었던 것이다.

실언이든 어쨌든, 이석채씨의 발언은 나중에 IMF가 제시한 처방과 같았다. 국제 시장에서 일시적 충격이 있었을지라도 정부 고위층이 생각했던 대로 부실 은행과 기업을 폐쇄할 수 있었더라면 한국은 국제 시장에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국제 기준에 맞춰 부실 여신의 규모를 발표하고, 부실 기업과 은행을 법정관리와 같은 구제 수단으로 살리지 않고 정리했더라면 한국은 외환 위기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뉴욕 월가의 사람들은 외환 위기 6개월 전에 한국이 개혁을 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한국의 금융위기가 그렇게 어려운지를 실감하고 있질 않았다. 한국 경제는 정부와 기업, 금융기관이 하나가 돼서 움직이는 한국 주식회사(Korea's Corp.)로 인식돼 있었다. 정부가 지원하는 이상, 시중은행의 부도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은행이 쓰러져도 도와주지 않겠다는 청와대 고위층의 목소리가 나오자, 국제 금융가에서는 한국 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한국을 자세히 들여다 보자는 쪽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 수석의 발언이 전해진 다음날 이경식 한은 총재는 부랴부랴 기자회견을 열어 현재로선 한은 특융을 거론할 상태까지 가지 않았다며 앞으로 상황이 어려워 지면 특융을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한은은 기아사태가 터진후인 97810억 달러의 외화자금을 시중은행에 지원함으로써 금융기관의 암 덩어리를 키워나갔다.)

당시 월스트리트 저널지의 지적을 들어 보자. 4)

한국 주식회사의 이런 노력(경제 개혁)이 성공하느냐 여부가 선진국이 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한국이 신속한 경제 개혁에 실패한다면 아시아 호랑이들 중에 가장 먼저 기력을 상실한 나라가 될 것이다. 한국 경제는 일본의 장기 침체를 따라 가고 있고, 태국과 같은 저개발국가(의 시장 동요)에 흔들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

태국 바트화 폭락으로 아시아 경제 위기가 시작되기 전에 나온 이 기사는 상당히 예리하게 한국의 금융위기를 예고했다.

 


1) 비즈니스위크, 1997127Why Seoul is seething

2) 비즈니스위키, 1997210Meltdown in Seoul

3) WSJ, 199723Hanbo puts strain on South Korean Bank

4) WSJ, 1997417Slowing down in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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