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의 삼전도비…“그날, 햇빛이 없었다”
수난의 삼전도비…“그날, 햇빛이 없었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12 17: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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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홍타이지 명으로 항복 지점 삼전도에 세워…버려졌다 세워졌다 반복

 

영화 <남한산성>에 청나라 군대가 쏜 포탄에 행궁과 성벽이 무너지고 신하들이 허겁지겁 도망다니는 모습이 나온다.

작자 미상의 <산성일기>에는 1637124일자에 적이 남성(南城)을 침범하고 종일토록 행궁을 향하여 포를 쏘았는데, 철환(鐵丸)이 사발 같고 삼층 기와집을 뚫어서 한자가 넘게 들어갔다고 적었다. <인조실록>에는 청병이 첫포를 쏜 124일자엔 아무런 기록이 없고, 둘째날(125) “대포 소리가 종일 그치지 않았는데, 성첩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졌으므로,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고 기록했다.

이틀간의 포격을 당한 조선임금 인조는 닷새후인 130일 송파벌로 내려가 청의 칸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취한다. 식량이 떨어졌기도 하거니와 청군이 보유한 포의 위력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살고자 한다며 최명길의 의견에 따른 것이다. 원자폭탄 두 방에 무조건 항복을 한 일본 천왕과 다름 없다.

청군이 조선군에 비해 압도적 전력을 확보한 것은 비단 병력 수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청나라는 당시로선 동양에서 최신식 포를 갖추었다. 그 포가 바로 홍이포(紅夷砲)였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앞서 122일 청군이 강화도로 도망간 봉림대군(후에 효종)과 빈궁, 조정대신들을 포로로 잡은 것도 홍위포였다. <인조실록>은 이 장면에 대해 오랑캐 군사 3만이 갑곶진에 진격하여 잇따라 홍이포를 발사하니,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려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적이 이 틈을 타 급히 강을 건넜는데, 조선군이 멀리서 바라보고 도망쳤다.”고 기록했다.

홍타이지는 1631년에 홍이포 기수를 확보하고, 5년 후인 163612월 포병을 앞세워 조선을 침공했다. 남한산성을 멀리 보이는 망월봉에 포대를 설치해놓고 조선 임금이 굴복하길 기다렸다. 한달이 지나도록 조선이 굴복하지 않자 홍이포를 쏘았고, 닷새후 인조 임금은 삼전도로 내려갔다. 결국 홍이포의 포격에 겁먹은 인조가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산성일기>에는 1637130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무릎 꿇는 장면은 애달프게 기록했다.

 

“30일에 햇빛이 없었다.

임금이 세자와 함께 청의(청나라 복장)를 입으시고 서문으로 따라 나가실 때, 성에 가득 찬 사람들이 통곡하여 보내니 성 안의 곡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

(, 청 황제)은 삼밭(三田) 남녘에 구층으로 단을 만든 후 단 위에 장막을 두르고 황양산을 받쳤다. 단 위에는 용문석을 깔고 용문석 위에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교룡요를 폈다. 그 위에는 누런 비단 차일을 높이 치고 뜰에 황양산 셋을 세웠다. 정병 수만 명은 키가 크고 건장하기가 거의 비슷한 사람으로 가려 뽑아 각각 수놓은 비단옷과 갑옷을 다섯 벌 껴 입혔다.

한이 황금상 위에 걸터앉아 바야흐로 활을 타며 여러 장수들에게 활을 쏘게 하더니 활쏘기를 멈추고 전하로 하여금 걸어서 들어가게 하였다. 백 보 걸어 들어가셔서 삼공육경(三公六卿)과 함께 뜰 안의 진흙 위에서 배례하시려 할 때였다. 신하들이 돗자리 깔기를 청하는데 임금께서 황제 앞에서 어찌 감히 스스로를 높이리오.” 하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시자, 저들이 인도하여 단에 오르셔서 서향하여 제왕 오른쪽에 앉으시게 하였다. ()이 남향하여 앉아서 술과 안주를 베풀어 놓고 군악을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한은 전하께 돈피 갖옷 두벌을 드리고, 대신 육경 승지에게는 각각 한 벌씩 주었다. 임금이 그 중 한 벌을 입으시고 뜰에서 세 번 절하여 사례하시니, 대신들이 또한 차례로 네 번 절하여 사례하였다.“

 

2010년 이전 이전에 서울 송파구 석촌동 289-3에 있었던 삼전도비 /김현민
2010년 이전 이전에 서울 송파구 석촌동 289-3에 있었던 삼전도비 /김현민

 

2009년 여름,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읽고 뭔가 감명을 받아 인조 임금이 항복하러 내려간 길을 따라 걷고 싶었다. 인조가 내려간 길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남한산성 서문으로 내려가 삼전도까지 갔을 것이라 생각하고, 두 지점을 일직선상으로 가볼 작정이었다.

하산한 지점에 공수특전부대가 있었고, 순환고속도로를 지나 잠실들까지 터벅터벅 걸어서 갔다. 370년 후에 임금이 항복하는 길을 걷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치욕의 역사 현장을 한번 밟아보자는 생각이었다.

지금은 삼전도비가 잠실 롯데월드 석촌호수에 서 있지만, 그 무렵엔 석촌동 주택가에 있었다. 당시 주소는 송파구 석촌동 289~3으로 그때도 그곳에 어린이 공원이 있었다. 어린이공원 한쪽 구석에 문화재로 보호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었다.

그후 20104월에 역사적 고증을 거쳐 삼전도비를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비문은 만주어와 몽골어, 한자로 쓰여 있었다. 아마 우리나라 비석 중에서 만주어로 된 것이 이게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리석은 조선 왕은, 위대한 청국 황제에게 대항했다. 청국 황제는 어리석은 조선 왕을 타이르고, 자신의 대죄를 납득시켰다. 양심에 눈을 뜬 조선 왕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맹성하고, 위대한 청국 황제의 신하가 되는 것을 맹세했다. 우리조선은 이 청국 황제의 공덕을 영원히 잊지 않고, 또 청국에 반항한 어리석은 죄를 반성하기 위해서, 이 비석을 세우기로 한다.”

 

비석은 대리석 계통의 돌로 만들어졌다. 거북이 모양을 조각한 받침(龜趺, 귀부) 위에 비문을 새긴 몸돌을 세우고 위에는 이수(螭首, 지붕돌)로 장식했다.

이 비는 병자호란 때 청 태종(홍타이지)의 요구로 세워진 것으로, 정식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지만, 문화재 지정 당시 지명을 따서 삼전도비라고 지었다. 국가의 자존심상 원명을 쓰지 못하고 지명을 딴 것이다.

 

석촌동 삼전도비의 부조 /김현민
석촌동 삼전도비의 부조 /김현민

 

삼전도(三田渡)는 도성에서 송파에 이르는 한강나루로, 1950년대까지 나룻배가 다녔으나, 1970년대 이후 한강 개발로 인해 사라진 포구로 현재 롯데월드 석촌호수 근처다.

인조 임금의 삼전도 항복 자체가 역사의 굴욕이지만, 이 비석도 굴절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16371월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는 인조의 항복을 받고 돌아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항복을 받은 수항단’(受降壇)에 세우라고 요구했다.

신하들은 아무도 서로 항복비에 넣을 글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인조는 장유·조희일에게 글을 짓게 해, 이들이 마지못해 글을 지어 청나라에 보냈는데, 청은 그들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번번이 거부했다.

누군가는 청나라 비위에 맞는 글을 써야 했다. 인조는 당시 이조판서와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 있던 이경석(李景奭)에게 글을 쓰도록 했다. 이경석은 악역을 떠맡았다. 그는 홍타이지의 마음에 들도록 글월을 지어 바쳤고, 청 조정은 흡족해 했다. 그 글을 받아 당대 명필 오준(吳竣)이 쓰고, 전액(篆額) 글씨는 예조참판이었던 여이징(呂爾徵)이 써 비문이 새겨진 것이다. 이 비는 삼전도 항복 이듬해인 1639(인조 17)에 세워졌다.

청나라에겐 전승비이지만, 조선에겐 항복비였다. 소중화 사상에 빠져 있던 조선 사대부에겐 이 비석이 치욕의 상징처럼 보였다. 후에 송시열은 이경석이 삼전도비를 쓴 것을 문제삼아 그를 공격하기도 했다. 어쨌든 청나라의 속국에 편입되어 있는 한 삼전도비는 인조가 항복한 그 자리에 세워졌다.

 

하지만 청나라가 일본과의 전쟁(청일전쟁)에서 패하고 조선에서의 영향력이 사라진 1895(고종 32)에 일본의 압력에 의해 비석은 강 속으로 쓰러졌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다시 세웠다가, 해방후인 1959년 이승만 정부가 국치의 기록이라 해여 다시 매몰했다.

어느해 장마로 한강이 침식되면서 몸돌이 드러났다. 1963년 비석은 사적 101호로 지정되어 석촌동 어린이공원근처에 세워졌다가 2010년 원래의 위치인 석촌호수로 이전했다.

 

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삼전도비 /문화재
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삼전도비 /문화재

 

20072월에는 30대 남성이 삼전도비에 붉은 페인트를 사용해 '철거 370'이라고 적어 훼손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370은 비석이 세워진지 370년이라는 의미였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정치인들이 나라를 잘못 이끌면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게 된다는 점을 경고하기 위해서 삼전도비를 훼손했다고 밝혔다.

비석에 새겨진 글은 앞면 오른쪽은 몽골 문자, 오른쪽에는 만주 문자, 뒷면에는 한문으로 씌어 있어 17세기 만주어 및 몽골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서는 가치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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