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혼 상징이 된 민영환의 혈죽
민족혼 상징이 된 민영환의 혈죽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4.26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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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자택에 핀 혈죽에 초미의 관심…울사조약후 국혼 개념 정립에 기여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죽음으로 항거한 우국지사다. 흥선대원군의 처남 민경호의 아들로 태어나 17살에 동몽교관이 되었고, 1878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고속승진했다. 고종의 왕비 민씨의 친정 조카뻘이기도 하다.

1905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시종무관이었던 그는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했다. 그는 백관을 거느리고 상소를 올리고 궁중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고종은 비답을 내리지 않았고, 대신에 일본 헌병에 의해 왕명 거역죄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풀려난 후 그는 대세가 기울어졌음을 알고 죽음으로 항거할 것을 결심하고 자택에서 자결했다. 1130일 아침 6시경, 나이 45세였다.

왕실의 혈족이자 장관급의 자결 소식은 충격이 컸다. 조병세를 비롯해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등 많은 사대부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민영환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키쿠다 마코토 사진관에 의뢰해 촬영한 민영환 자택의 혈죽도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일본인이 운영하는 키쿠다 마코토 사진관에 의뢰해 촬영한 민영환 자택의 혈죽도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그가 순국한지 5개월이 지나 그가 죽은 자리에서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김영환이 사용한 칼과 옷가지를 보관하던 뒷방의 마룻바닥에서 붉은 반점을 띤 대나무가 돋아난 것이다. 그의 집은 종로구 안국동 조계사 옆 우정총국 근처에 있었다.

실내에서 대나무가 자라는 것이 무척 드문 일이라 사람들은 이를 그의 피가 대나무로 환생했다 하여 '혈죽‘(血竹)'이라고 했다. 놀라운 것은 대나무 잎의 개수가 45개로 순국 당시 민영환의 나이와 일치했다.

그는 유언에서 죽어서도 죽지 못하고구천을 떠돌며 동지들의 투쟁을 돕겠다고 했다. 그의 유언도 다시 회자되었다. 죽어서 혈죽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혈죽 소문이 빠르게 한양을 떠돌았다. 가뜩이나 외교권과 내정의 주요 권리를 빼아긴 마당에 거물 정치인의 목숨을 건 항거는 백성들의 마음을 동요시켰다. 혈죽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민영환의 집 바깥에 몰려들었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써 일시 정간을 당했던 황성신문도 기자를 민영환의 집에 보냈다. 황성신문 기자는 혈죽을 보고 이렇게 썼다. “천둥번개처럼 이 나라 방방곡곡을 질주한 이 소식이 처음에는 믿기질 않았다. 이 나무를 보자 하늘을 우러러보며 이렇게 외쳤다. ’이것은 대나무가 아니다. 이것은 피다.‘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불길한 기운을 떨쳐냈으며, 나아가 우리 2천만 동포의 독립 정신을 대표했다. ! 민영환은 죽었으나, 우리 조선은 죽지 않았다. 우리 조선이 죽지 않은한 민영환도 죽지 않았다.”

 

대한매일신보 광고란에 실린 혈죽도(1906년 7월 17일자)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대한매일신보 광고란에 실린 혈죽도(1906년 7월 17일자)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민영환을 추도하는 시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수많은 혈죽도가 그려졌다. 혈죽도에는 누가 민영환이 죽었다고 말하는가라는 구절이 쓰였다.

대한매일신보는 한면을 민영환의 대나무를 그린 삽화를 싣기도 했다. 4면을 내던 시절에 신문사가 한 면에 그림을 내는 것은 대단한 용기였다. 가뜩이나 미신타파를 외치며 근대화, 서양화를 가조하던 대한매일신보가 민영환의 혈죽에 관한한 미신성을 따지지 않고 민족혼을 강조했다.

민영환이 죽은후 피어난 혈죽은 나라를 빼앗긴 후 민족혼(國魂), 국수(國粹)이라는 개념으로 정착해 나가는 단초가 되었다.

 
 
화가 양기훈이 그린 혈죽도.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화가 양기훈이 그린 혈죽도.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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