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쌍릉의 주인은 누구일까
익산 쌍릉의 주인은 누구일까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5.03 11: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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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 또는 마한 무강왕이라는 기록…고고학적 발굴에도 여전히 미스터리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에 두 개의 대형 무덤이 200m의 거리를 두고 님븍으로 자리잡고 있다. 저 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 안내문에는 큰 무덤인 대왕릉은 백제 30대 무왕(武王)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소왕릉의 주인은 선화공주일 것이다. 그런데 두 무덤이 왕과 왕비의 부부묘라면 왜 200m나 떨어져 있는 것일까.

익산 쌍릉의 존재는 고려사에도 확인된다. 고려사 지리지 금마군조에는 후조선 무강왕(武康王)과 비의 능이 있다. 속칭 말통대왕릉이라고 한다. 일설에 백제 무왕이라고도 하는데,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이다고 쓰여 있다.(有後朝鮮武康王及妃陵 俗號末通大王陵, 一云, 百濟武王, 小名薯童) 고려사절요에는 도적이 금마군에 았는 마한의 조상 호강왕(虎康王)의 능을 발굴하였다고 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제작된 조선초기만 해도 쌍릉의 주인은 마한왕인지 백제왕인지를 구분하지 못했다. 피장자는 1천년전에 죽었고 그 사이 망각의 세월이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를 잊게 했다.

 

공중에서 촬영한 익산 쌍릉 /익산시청
공중에서 촬영한 익산 쌍릉 /익산시청

 

익산의 옛이름은 금마군(金馬郡)이었다. 고려사에 금마군은 본디 마한의 땅인데,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이 위만의 반란을 피해 바다를 건너 남쪽에 이르러 마한을 세운 것이라고 했다. (金馬郡本馬韓國【後朝鮮王箕準, 避衛滿之亂, 浮海而南, 至韓地開國)

그렇다면 저 무덤이 세워질 때 익산이 마한의 땅이었는지, 백제의 땅이었는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즉 무덤 주인이 마한의 무강왕일수도, 백제의 무왕일수도 있다. 아니면 무강왕과 무왕이 동일인물일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이니 법왕(法王)의 아들이다. 풍채가 빼어나고, 뜻과 기개가 호걸스러웠다. 법왕이 왕위에 오르고 이듬해에 돌아가시자,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다.“고 했다. 삼국사기엔 무왕이 온조왕에서 대를 이어온 정통계승자로 쓰여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이다.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수도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그 연못의 용과 정을 통하고 아들을 낳았다. 어려서의 이름은 서동(薯童)이다.“고 했다.

삼국유사엔 무왕이 백제 왕가의 혈통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마한왕 무강왕이 벡제의 왕위를 찬탈해 승계한 후 무왕이라고 한 것일까.

 

익산 쌍릉의 대왕릉 /박차영
익산 쌍릉의 대왕릉 /박차영

 

무왕 재위기(600~641)에 대한 서술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판이하게 다르다. 삼국사기엔 무왕은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과 교전상태를 유지했다. 무왕 3(602)부터 37(636)까지 내내 백제와 신라는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善花)와 서동의 러브스토리를 다뤘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은 서동과 선화공주의 스토리를 채록한 후에 삼국사기에 이 분을 법왕의 아들이라고 하였지만, 여기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전하였으니,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역사가들은 삼국사기를 정사로 보고, 삼국유사는 정사에서 빠진 야사를 담은 것으로 본다.

 

익산 쌍릉의 소왕릉 /박차영
익산 쌍릉의 소왕릉 /박차영

 

여러 가지 설과 견해가 교차하고 있는 가운데 정작 익산 사람들은 서동과 선화공주의 야사를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익산시는 금마면에 서동공원을 크게 꾸며놓고 삼국유사의 스토리를 팔고 있다. 익산에 있는 원광대 역사학자들도 서동의 스토리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나 하는 느낌을 준다.

2017년 원광대 팀이 대왕릉에 대한 학술조사를 벌였는데, 대왕릉이 무덤방의 모양이나 크기, 인골 분석을 통해 백제 무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했다. 발굴조사를 주도한 최완규 원광대 교수의 제의로 무왕의 뼈 앞에 학자들이 모두 고개를 숙여서 예의를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 무덤이 무왕릉이라고 단정하지는 못했다.

소왕릉도 마찬가지다. 2019년 발굴조사에서 두 종류의 묘표석이 발굴되었다. 하지만 두 묘표석은 문자가 새겨지지 않은 무자비(無字碑) 형태로 발견되었다. 결국 선화공주의 무덤이란 증거를 찾지 못했다.

 

쌍릉이 비밀은 고려시대(삼국사기, 삼국유사), 조선시대(고려사, 고려사절요)에도 밝혀지지 않았다. 현대과학으로 무장한 고고학자들이 덤벼들었지만,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스토리에 고정시키기보다 오히려 두 개의 스토리를 공존시키는 것이 낳지 않을까. 마한왕 무강왕이 백제를 접수하고 신라와 투쟁했다는 설도 재미있질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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