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쌍릉에서 미륵사지로 도보여행을 하는 도중에 익산토성을 만났다. 토성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지만 원광대 팀이 발굴조사를 해보니 돌로 만들어진 성(石城)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토성으로 축조했다가 석성으로 전환해 수비력을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행정구역으로는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다.
성이 올라앉은 산의 이름이 오금산(五金山)이다. 오금(五金)은 백제 30대 무왕이 “다섯 덩어리의 금을 얻었다”는 전설과 관련이 있다. 삼국유사 무왕조에 서동이 선화공주에게 “내가 어려서부터 마(薯)를 캐던 땅에 이런 금덩어리들이 흙더미처럼 쌓여 있소”라고 말했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그다지 가파르지 않다. 성 위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익산시 전체가 내려다 보인다. 오금산은 금마평야의 중심부에 위치해 아마추어의 눈에도 전략적 거점임을 알수 있다.
두가지 성의 이름이 내려온다. 오금산성(五金山城)과 보덕성(報德城)이다. 오금산성은 산의 이름을 딴 것으로, 무왕(600∼641) 때 축조되었다는 설이 나온다. 산성은 익산 왕궁리의 백제 궁성지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거나 지역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축조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산성에서 발굴된 기와조각에 “수부(首府)”, “북사(北舍)”와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이곳이 수도 또는 궁궐이 있었던 곳임을 의미한다.
보덕성은 고구려 부흥 운동을 하다 신라로 귀순한 안승(安勝)을 보덕왕에 봉해 익산지방을 떼 준데서 비롯되었다. 삼국사기에 안승은 고구려 마지막 보장욍의 외손자이며 연정토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그가 망명을 하자, 신라는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백제의 옛 땅을 봉토로 보덕국왕에 봉했다. 보덕국(報德國)은 나라(國)란 명칭을 붙여주었지만 지방정권의 개념이었고, 670년에 수립되어 684년까지 유지되었다. 익산토성이 보덕국의 치소(治所)였다는 견해가 있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다.
산성은 오금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작은 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포곡식이며, 둘레가 약 690m에 이른다. 1980년과 1984년 발굴조사에서 성벽 기초부분에 직사각형 석재를 사용해 벽을 쌓았고, 벽석 뒷면에는 깬돌 등 잡석으로 메웠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두께는 5.5m에 이르고 남문 터에 문루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덕성은 군 서쪽 1리에 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라고 한 사실에서 조선시대엔 성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남문이 있던 자리와 성문 밑으로 개울물이 흐르도록 했던 수구자리, 그리고 건물이 있었던 자리가 남아있다. 산세가 약해 물이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2차례의 발굴조사에서 흙으로 만든 그릇 조각과 기와 조각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백제와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것들로 구분되며, 주로 백제 말의 기와류와 토기류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발견된 유물들을 볼 때 이 성은 백제가 크게 성장하던 시기에 만들어져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63년 국가사적 92호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