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왕에게 선화공주 말고 또다른 왕후가?
백제 무왕에게 선화공주 말고 또다른 왕후가?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5.05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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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엔 선화공주가 미륵사 건립자…서탑 출토 유물에서 사택왕후 등장

 

전라북도 익산을 떠올리는 유적지가 미륵사지다. 백제 30대 무왕이 부인 선화공주의 청을 받아들여 지은 절로 알려져 있다.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딸이다. 앙숙 관계에 있던 백제와 신라가 두 사람의 결혼으로 동맹을 형성했고, 그 유물이 미륵사지라는 게 그간의 전설이다.

미륵사 축조시기는 639(무왕 40)으로, 1,400년 가까이 되었다.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초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며, 조선 중기 어느 시점부터 폐허가 되었다. 원래는 세 개의 탑이 있었으나, 해방 이후 서탑과 당간지주만 남았고, 서탑도 반파된 상태였다. 그후 발굴과 해체, 복원 과정을 거쳐 오늘날 우리들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미륵사지를 둘러보고는 정이 들지 않았다. 동탑은 복원했는데 너무 인위적인 냄새가 나고, 서탑은 반파된 것을 해체했다가 다시 조립했는데 어쩐지 문화재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부서졌으면 부서진대로, 깨어졌으면 깨진대로 그냥 놔두는 게 옳지 않을까. 포로 로마나의 돌덩이처럼. 익산의 돌탑은 덕지덕지 성형수술을 한 바비인형처럼 변해 버렸다.

 

미륵사지 서탑.(멀리 동탑이 보인다) /박차영
미륵사지 서탑.(멀리 동탑이 보인다) /박차영

 

오히려 무너진 서탑을 분해하면서 얻어진 새로운 스토리가 더 재미있다. 선화공주의 전설을 무너뜨리고, 무왕의 새로운 여인이 등장했으니, 말이다.

그동안 미륵사는 선화공주가 무왕에게 요청해 지었다는 것을 정설로 받아들였다. 스토리는 삼국유사 무왕조에 나온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행차하던 중, 용화산(미륵산) 아래 큰 연못가에 이르렀다. 그때 미륵삼존이 연못 속에서 나타나자 왕은 수레를 멈추게 하고 경의를 표하였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였다. “이곳에 큰 절을 짓는 것이 진실로 제 소원입니다.”

그래서 왕이 이를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연못을 메우는 일에 대해 묻자, 법사가 신통력으로 하룻밤만에 산을 무너뜨려 연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그래서 미륵삼존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고 전각과 탑과 회랑을 각각 세 곳에 만들고는 미륵사(彌勒寺)라고 하였다. 진평왕은 수많은 장인들을 보내어 절을 짓는 일을 돕게 하였는데, 지금도 그 절이 남아 있다.“

바로 앞 대목에 서동과 선화공주 러브스토리가 나오고, 이 장면에서도 선화공주의 아버지 신평왕이 나오므로, 당연히 왕의 부인은 선화공주가 된다.

 

미륵사지 서탑에서 출토된 금제사리봉양기 /문화재청
미륵사지 서탑에서 출토된 금제사리봉양기 /문화재청

 

그런데 서탑을 복원하기 위해 해체했더니, 탑안에 심주석(心柱石)과 그 안에 봉안된 사리병과 금제사리봉영기, 구슬 등 사리장엄구 9,900여 점이 우수수 나왔다. 중요한 건 금제사리봉양기인데 거기엔 앞뒷면으로 193자의 글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1,400년전에 쓴 편지가 타이머신을 타고 2009년에 발견된 것이다.

그 내용 중에 중요한 대목은 我百濟王后佐平沙乇 /積德女種善因於曠劫 /受勝報於今生撫育 /民棟梁三寶故能謹捨 /淨財造立伽藍以己亥年 /正月卄九日奉迎舍利이다. 해석하자면,

 

우리 백제왕후(百濟王后)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乇積德)의 딸로서 오랜 세월(曠劫) 동안 선인(善因)을 심으시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으셨다.

(왕후께서는) 만민(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다. 때문에 삼가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번역문: 김상현, "금제사리봉영기")

 

여기서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는 내용은 미륵사 창건이 무왕 재위 시기의 기해년(己亥年), 639년임을 확인해 주었다. 이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뒷받침해준다.

그런데, 느닷없이 우리 백제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서 만민을 어루만져 삼보의 동량이 되셨다고 했다. 절을 지은 사람이 백제왕후인 것은 맞는데, 왕후의 신분이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적시되었다. 후대 사람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던 선화공주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택(沙乇 또는 沙宅)은 백제의 귀족성씨다. 단일성으로 표기할 때는 사씨(沙氏). 수서(隋書) 백제전에는 백제의 유력한 여덟 가문(大姓八族)을 열거하고, 사씨를 가장 먼저 언급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황극기(皇極紀) 원년(642)조에 의자왕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백제에 정변이 발생했다고 했다. 의자왕은 무왕의 아들인데, 어머니 사택왕후가 죽고 정치 변동이 있었음을 시사한 것이다.

그러면 13세기 사람인 일연스님(120689)이 잘못 채록한 것일까. 이에 대해 선화공주가 죽고 사택왕후가 후비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하지만 이런 견해도 상상력의 결과일 뿐이다.

 

미륵사 조감도 /박차영
미륵사 조감도 /박차영

 

미륵사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알려져 있다. 백제 가람은 11금당의 배치 방식인데, 미륵사는 33금당의 독특한 방식이다. ·서로 석탑이 있고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탑 뒤에는 부처를 모시는 금당이 각각 자리했다.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옆면 4칸이고 바닥에는 빈 공간이 있는데, 이것은 바닥마루의 습기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조선시대 건물터에서 온돌시설이 발견되었다.

 

미륵사지 서탑(2000년) /문화재청
미륵사지 서탑(2000년) /문화재청

 

석탑 가운데 서탑만 무너진채 남아 있었다. 미륵사지 서탑은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된 것이다. 원래는 9층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반파된 상태로 6층 일부까지만 남아 있었다. 창건당시의 정확한 원형은 알 수 없으며, 17~18세기 이전 1층 둘레에 석축이 보강되고 1915년 일본인들이 무너진 부분에 콘크리트를 덧씌운 상태로 전해졌다. 석탑은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에 따라 이듬해 해체수리가 결정되었고 2001년 해체조사에 착수하여 2017년 조립공정이 완료되었다.

 

미륵사지 당간지주 /박차영
미륵사지 당간지주 /박차영

 

당간은 사찰 입구에 세워 당이라는 깃발을 걸어두는 장대를 말하는데, 당간지주는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이다. 미륵사터의 남쪽에는 2기의 지주가 약 90여 미터의 간격을 두고 서 있는데, 크기와 양식, 조성수법이 같아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지주를 받치는 기단부(基壇部)는 완전히 파괴되어 대부분이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이며, 약간만이 드러나서 그 원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지주는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마주보는 면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다. 바깥쪽 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띠를 돌린 후, 그 중앙에 한 줄의 띠를 새겨두었다. 당간을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키기 위해 지주의 안쪽 면에 3개의 구멍을 각각 뚫어놓았는데, 맨 위의 것만 직사각형 모양이고 나머지는 둥글다.

 

미륵사지 서탑과 동탑 /박차영
미륵사지 서탑과 동탑 /박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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