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아시아 향료무역서 영국 따돌렸다
네덜란드, 아시아 향료무역서 영국 따돌렸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13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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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설립해 향료전쟁 돌입…암본 사건 계기로 네덜란드 승

 

인도네시아 몰루카 열도의 암본섬(Ambon Island)16세기 이래 향료산지의 중심이었다. 17세기초 그 섬에는 네덜란드와 영국의 두 동인도회사가 동시에 상관(商館)을 설치해 무역거래를 했다.

16232월 일본인 낭인(浪人) 한 사람이 네덜란드 상관을 기웃거리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용병이었는데, 네덜란드인들은 그에게 심한 고문을 가하며 사실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고문을 이기지 못한 이 낭인은 일본인들이 요새를 점거하고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고 자백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본인은 가브리엘 타워슨(Gabriel Towerson)이라는 영국인 선장이 연루되어 있다고 실토했다.

네덜란드인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암본섬과 일대를 이 잡듯이 뒤져 영국인, 일본인들을 붙잡았다. 붙잡힌 영국인들은 물고문을 당하며 네덜란드인들이 주장하는대로 불었다. 재판에서 자백이 인정되어, 영국인 10, 일본인 9, 포르투갈인 1명이 참수되었다. 타워슨의 머리는 모두가 볼수 있도록 기둥에 세워졌다.

영국이 경악했다. 암본 사건은 네덜란드가 영국과의 조약을 깬 중대한 사건이었다. 영국은 강력하게 항의하고 무력 공격을 시도했지만, 당시 네덜란드의 해군력이 영국보다 한수 위였다.

 

암본 사건에서 네덜란드인들이 영국인들을 고문하는 모습 (영국 주장) /위키피디아
암본 사건에서 네덜란드인들이 영국인들을 고문하는 모습 (영국 주장) /위키피디아

 

4년전인 1619년 네덜란드와 영국은 아시아에서의 향료 전쟁을 중단하기로 조약을 체결한 바 있다. 이 조약에 따라 두 나라는 상호 적대행위와 무역경쟁을 중지하고, 향료 거래의 안정을 위해 공동으로 매입하고 적정선에서 판매가격을 유지하자고 약속했다. 일종의 무역 카르텔이었다. 이 조약에 따라 네덜란드와 영국은 후추와 스파이스(정향유, 육두구)에 대해 21의 쿼터 비율로 구매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향료 생산지인 인도네시아 몰루카에서는 두나라 동인도회사의 경쟁이 오히려 달아올라 있었다. 유럽 본부의 생각과 현지 사업자 사이에 견해와 이해관계가 달랐던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총독은 얀 피텔스존 쿤(Jan Pieterszoon Coen)이었는데, 그는 본부의 협정 준수 요구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쿤은 아시아 무역에서 나오는 노다지 이익을 독점하기를 원했다. 영국과 이윤을 나누기도 싫었다. 그는 현지에 뿌리내린 중국상인, 일본상인, 자바 상인, 말레이 상인도 쫓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쿤 총독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병력을 이끌고 1621년 반다 열도를 점령했다. (Run) 섬에선 그곳을 점령하고 있던 영국인들을 쫓아내 버렸다.

반다 열도에 이어 암본 섬에서 영국인을 밀어내면서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의 향료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영국은 향료 제도에서 쫓겨나 자바섬 서쪽 반탐만을 간신히 지키고 있었으나, 쿤이 1627년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총독으로 다시 부임하면서 그나마 빼앗기고, 말레이반도 북부 파타나와 샴으로 물러났다. 네덜란드는 1641년 말라카를 점령해 동아시 무역을 완전하게 장악하게 되었다.

 

암본섬의 위치 /위키피디아
암본섬의 위치 /위키피디아

 

인간은 맛을 느끼는 동물이다. 식재료에 약간의 향료를 넣으면 음식이 새로운 맛을 내게 된다.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구가 전쟁을 불러 일으켰으니, 바로 향료전쟁이다.

대항해 시대 이전에 유럽인들은 인도 등 동방에서 향료를 수입해 썼다. 지중해 무역의 주거래품목 중 하나가 향료였다. 16세기에 포르투갈이 아시아 무역로를 열면서 아시아산 향료가 유럽인들의 입맛을 달궜다. 유럽인들은 아시아에서 온 향신료를 첨가하면서 맵고 신맛이 나는 요리법을 개발했고, 부유층들은 새로운 맛에 친숙해지기 시작했다.

향료는 아시아 항로가 열리면서 엄청난 부를 안겨다 주었다. 포르투갈이 먼저 카자 다 인디아(Casa da India)라는 무역관청을 만들어 향료 무역에 나섰다. 이 관청은 선대를 운영해 인도에서 후추 1킨탈을 12 두카트에 사서 4 두카트의 비용으로 운반해 유럽에서 32 두카트에 팔았다. 포르투갈 왕실은 향료 무역에서 두배나 많은 이문을 남겼다. 포르투갈은 인도와 인도네시아 향료 제도를 선점했다.

 

야곱 판 넥이 이끄는 네덜란드 상선대가 1599년 귀환하고 있는 모습 /위키피디아
야곱 판 넥이 이끄는 네덜란드 상선대가 1599년 귀환하고 있는 모습 /위키피디아

 

향료무역이 돈이 된다는 사실이 새롭게 해양국가로 부상하는 영국과 네덜란드를 자극했다. 때마침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 아시아 무역권을 쥐고 있던 포르투갈이 1580년부터 1640년까지 스페인에 통합되어(Iberian Union) 나라가 없어졌다. 아시아는 무주공산이 되었다.

포르투갈이 비운 공백을 네덜란드가 잠식해 들어갔다. 네덜란드가 합스부르크가로부터 독립전쟁을 벌이는 가운데에도 안트워프(Antwerp)의 상인들은 해외에 진출했다. 스페인에 합병된 포르투갈 영토는 네덜란드 상인에게는 공격 대상이 되었다.

1595년 프레데릭 하우트만(Frederick de Houtman)이라는 탐험가는 4척의 함대를 이끌고 자바섬에 도착해 포르투갈인들을 쫓아내고 후추 등 화물을 싣고 돌아왔다. 1598년에는 야곱 판 넥(Jacob van Neck)이라는 네덜란드인이 인도네시아에서 대량의 후추를 갖고 귀국했다. 판넥은 후추 무역에서 400%의 이익을 내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네덜란드는 이후에도 인도네시아를 안방처럼 드나들며 향료 무역으로 대박을 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인들이 급조해서 만든 것이 동인도회사다. 영국 상인들은 자금을 출자해서 동인도회사를 급조했다.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함대 격파(1588)에 이어 포르투갈 함대도 침몰시키며 세계의 바다를 제패해 나갔지만, 상업자본은 아직 취약했다.

15999월 런던의 상인들이 동인도 무역을 위해 자금을 모으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때 모은 자금이 3만 파운드였다. 그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특허장을 신청했다. 그해 마지막날인 1231일 영국 동인도회사 특허장이 나왔다. 칙허가 나온후 상인들은 자본을 68,373 파운드로 늘렸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선박 4척은 이듬해 2월 런던을 출발해 160210월에 수마트라섬에 도착했다. 무려 20개월이 걸린 긴 항해였다. 이 선단은 103만 파운드의 후추를 싣고 16039월에 돌아왔다. 당시 영국에서 소비하는 후추량은 25만 파운드였는데, 그들이 싣고 온 후추는 남아돌아가 다른 나라에 수출해야 했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초기 자금조달 방식은 일회성이었다. 선단이 한번 출항할 때마다 자금을 모집해 싣고온 물건을 팔아 대금을 출자비율로 투자자들에게 나눠주는 방식이었다. 만일 배가 출항해 무사히 귀환하지 못할 경우 배당금은 한푼도 돌아가지 못했다. 1613년까지 선단이 모두 12번 출항했다.

개별 항해 때마다 자금을 조달하고 배당하는 방식으로는 회사를 영속시킬수 없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이에 영국 동인도회사는 1613년부터 몇 년 단위로 사업을 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1613~1623년의 1, 1617~1632년의 2, 1631~1642년의 3차 합본 투자방식이 있었다. 1)

 

암스테르담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본부 /위키피디아
암스테르담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본부 /위키피디아

 

영국이 동인도회사를 세운뒤 네덜란드도 16023월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하우트만과 판넥의 향료 무역 성공에 힘입어 1595년부터 1602년 사이에 네덜란드에서는 무려 14개의 회사가 아시아 무역에 뛰어들었다. 이들 업체의 과당경쟁을 막고 영국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해 정치인 존 반 올덴바네벨트(Johan van Oldenbarnevelt)의 중재로 여러 무역회사가 통합동인도회사(United East Indies Company) 하나로 통합되었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운영하자 프랑스도 1615년 몰루카 회사에 이어 1643년 동방회사를 만들었지만 활발하게 운영되지 못했다. 덴마크도 1616년에 동인도회사를 만들었고, 스코틀랜드는 695년에 다리엔 회사를 설립해 아시아 무역에 뛰어들었다. 1731년에 독일이 오스텐드 동인도회사를, 1731년에는 스웨덴이 동인도회사를 각각 만들었지만,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아시아에서의 무역거래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두 동인도회사의 경쟁으로 요약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영국 동인도회사보다 자본금도 10배 이상 많았고, 세계 최초로 주식회사로 운영되는등 선진화되었다. 영국 회사의 영업이 단발성이었다면 네덜란드 회사는 영속적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아시아 현지에 상관을 개설하고 현지 직원을 상주시키고 값이 쌀 때 향료를 사들여 창고에 저장해두었다가 배가 오면 유럽에 실어보내는 등 영국에 비해 선진적으로 회사를 운영했다. 17세기초 아시아 무역은 네덜란드가 앞서나갔다.

 

몰루카 열도 /위키피디아
몰루카 열도 /위키피디아

 

 


1) 아사다 미노루, ‘동인도회사’ (2004, 도서출판 파피에),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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