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월대 밑에서 왕이 머물던 흔적 나왔다
광화문 월대 밑에서 왕이 머물던 흔적 나왔다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3.05.30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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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가리는 차일 고정쇠 발견…조선전기에 광화문 앞 공간 활용 증거

 

서울 광화문 월대는 고종 때에 만들어졌지만, 경복궁은 그에 앞서 조선 개국 직후에 건축되었다. 따라서 월대의 지하를 파보면 고종 이전 조선전기의 유구가 발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가 광화문 월대 발굴조사에 고종년간에 축조된 월대 하부에서 그 이전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유구 흔적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번 조사에서 나온 유구는 지난달 이후에 추가로 실시된 발굴에서 확인된 사실이다.

 

경복궁 월대 하부 조선전기 석재(구멍이 뚫려 있다) /문화재청
경복궁 월대 하부 조선전기 석재(구멍이 뚫려 있다) /문화재청

 

이번에 발굴된 조선전기 문화층은 앞서 2007년 광화문 발굴조사에서도 확인된 층이다. 유구는 고종년간 월대의 어도지 서쪽 기초시설 하부 약 120지점에 위치한 조선전기 문화층의 최상단에서 확인되었다.

유구는 방형(사각형) 석재 1(76×56×25cm)를 중심으로 양쪽에 남북방향의 석렬(石列)이 각각 한 줄씩 배열된 양상이다. 방형 석재의 중앙에는 직경 6cm의 철제 고정쇠가 박혀 있었다. 이러한 형태는 궁중 행사에서 햇빛을 가리기 위해 사용되는 차일을 고정하기 위한 장치와 유사하며, 경복궁 근정전이나 종묘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양쪽 석렬의 잔존너비는 약 85cm, 길이 20~30cm의 크고 작은 석재가 일정한 너비를 이루며 남북방향으로 길게 이어지는 형태이다. 이러한 석렬유구가 동쪽 어도지 하층 탐색구덩이 조사에서도 일부 확인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월대 하층에 전체적으로 유사한 양상의 조선 전기 유구가 분포하는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 근정전의 쇠고리 /문화재청
경복궁 근정전의 쇠고리 /문화재청

 

발굴유구는 월대 조성 이전에 왕실에서 경복궁 앞에서 여러 가지 행사를 치렀음을 알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그 기록이 있다.

임금이 근정전에 나아가 친히 응시자(應試者)에게 책문(策問)을 과시(課試)하고, 광화문 밖 장전(帳殿, 임시로 꾸민 자리)에 납시어 친히 무과 시험을 보였다. (세종 24813)

광화문(光化門) 밖에 채붕(綵棚, 임시 장막)을 맺고 잡희(雜戲)를 베풀게 하였다. (세종 3211)

광화문(光化門) 밖에 이르러 산대(山臺) 놀이를 구경하고 한참 뒤에 들어왔다. (중종 34410)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경복궁 앞 행사에서 임금이 앉았던 자리가 이번 발굴조사에서 물적 증거를 확보한 것이다.

 

광화문 월대 하부 퇴적 양상 /문화재청
광화문 월대 하부 퇴적 양상 /문화재청

 

한편 이번 조사에서 광화문 밖 공간의 퇴적층이 자연층, 조선전기 문화층(14~16세기), 조선중·후기 문화층(17세기 이후), 월대 조성층(19세기), 근현대도로층(20세기)의 순으로 형성된 것을 확인했다.

조선 중기~후기 유구는 조선전기 문화층을 일부 파괴하고 조성된 층에서 확인되었는데, 교란과 파괴가 심하며, 민가의 흔적 등도 확인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방치되어 있었던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후 고종대에 이 층을 정리하고 다시 흙을 쌓아서 월대를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 영건일기에는 광화문 앞(육조거리)와 관련해 광화문 앞의 민가 중 어로(御路)에 불필요한 것은 모두 철거하였다”(1865년 윤518)라는 기록이 있다.

이번 발굴을 통해 볼 때 광화문 앞 공간에서 조선 전기부터 바닥에 돌을 깔아 축조하는 방식의 시설들을 갖추고 다양하게 활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의 기능이 상실되며 방치된 채 관리되지 못하다가 고종년간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월대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 월대유구 현황 /문화재청
경복궁 월대유구 현황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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