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이 놀란 조선시대 결혼 풍속
외국인이 놀란 조선시대 결혼 풍속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5.3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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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보지 못하고 결혼한 후 일어난 사연들…구한말 외국인들이 소개

 

구한말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한국의 결혼 풍속에 많이 놀랐다. 연애결혼은 거의 없고 대부분 중매결혼이었다. 결혼은 부모들이 결정했고, 집안, 재산 등이 고려되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도 신랑·신부는 상대방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상대방을 보지 못한채 결혼했다가 낭패를 겪은 경우가 허다했던 것 같다.

프랑스의 교회사가인 샤를 달레(Claude Charles Dallet)1874년에 조선에서 몰래 선교 활동을 하던 성직자들이 전달한 정보를 기초로 한국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ée])를 저술했다. 이어 조선을 방문한 미국인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1882년에 은둔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을 남겼다. 두 외국인은 조선의 역사와 제도·언어·풍습 등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했다. 달레의 저술이 먼저 나왔기에 그리피스는 그의 소재를 많이 인용했다. 이 두 외국인이 전한 한국의 결혼풍속 가운데 흥미로운 두가지를 소개한다.

 

전통혼례 /한국의집 홈페이지
전통혼례 /한국의집 홈페이지

 

두 여인과 동시에 결혼한 이야기

어느 한 양반이 자신의 딸과 죽은 형의 딸을 키우고 있었다. 딸과 조카딸은 동갑나기였고, 키도 비슷했다. 둘다 결혼할 나이가 되었다.

어느날 돈 많고 가문이 좋은 집안에서 청혼이 들어왔다. 양반은 자신의 딸을 그 집안으로 시집보내기로 결심했다. 아버지는 장차 사위가 될 사람을 보지도 않고 혼약하고 택일했다. 결혼식을 3일 앞두고 점을 쳐보았더니, 점쟁이 왈, “사윗감이 바보이고 못생긴데다 무식하다고 했다. 조선시대엔 파혼이 불가능했다.

양반은 궁리 끝에 조카에게 원삼 족두리를 씌우고 자신의 딸을 대신해 결혼식장에 나가라고 했다. 조카딸은 작은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큰 마당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사촌형제는 키도 비슷했기 때문에 구별이 되지 않았다. 결혼식은 진행되었다.

그런데 정작 나타난 신랑은 점쟁이의 말과 달리 외모가 훤칠하고 건장하고 학식도 많고 덕망 높은 귀공자였다. 아버지는 땅을 치고 후회했다. 양반은 어쨌든 상황을 바꿔보려고 했다. 그는 결혼식을 마치고 신방에는 조카 딸 대신에 자신의 딸을 보냈다.

사위는 속아 넘어갔다. 하지만 이 양반은 사위에세 결혼식장과 신방에 자신의 딸과 조카딸을 바꿔치기 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사위는 잠시 당황했으나, 곧 냉정을 찾았다. 사위는 장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잘 되었군요. 장인께서 머리를 잘 쓰셨습니다. 그러나 두 여자 모두가 제 아내이니, 그리 아십시오. 조카는 대례를 치렀으니 제 정실부인이고, 따님은 장인이 손수 제 방으로 인도했으므로, 저의 측실이 될 것입니다.”

양반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조선 사대부의 결혼예절을 거역할수 없었다. 그의 잔꾀는 자승자박이 된 것이다.

 

조선시대엔 결혼 전에 신랑과 신부가 서로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중신애비가 양측을 오가며 중매를 하고 양측부모의 동의를 얻어 결혼이 성사된다. 얼굴과 심성을 모른채 결혼을 허락했다가 당사자는 물론 양가 부모가 사위 또는 며느리를 직접 보고 당황하기 일쑤다. 게다가 조선시대에 정식결혼은 대례를 기준으로 한다. 이번 예시의 경우 조카 딸이 정실부인이 된다. 자신의 딸은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잠자리를 했기 때문에 첩이 된다.

 

 

박색의 부인이 남편 성공후 취한 처신

서울에 사는 나이 지긋한 양반이 상처를 했다. 이 홀아비에게 재취의 중매가 들어왔다. 경상도 어느 곳이었다. 양반은 쾌히 승낙하고 경상도 처갓집으로 내려갔다.

대례를 치르려고 신부를 쳐다보았더니, 얼굴은 박색, 신체는 곱사등이었다. 양반은 절망했지만, 결혼을 물릴수 없었다. 신랑은 신방에서 부인과 잠자리를 피했다. 그는 서먹하게 2~3일을 보내다가 신부는 남겨두고 홀로 서울로 줄행랑을 쳤다.

2~3년 지나 서울의 양반은 2품 판서가 되었고,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 성혼을 시켰다. 지방에 있던 아내는 틈틈이 서울에 사람을 보내 남편 댁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남편이 환갑잔치를 벌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경상도 아내는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올라와 판서댁 정문에 이르러 안방주인이 왔다고 알렸다. 종들이 당황했으나 여자가 워낙 당당한지라, 안방으로 모셨다. 자식과 며느리들은 그녀를 못본척 했다. 그녀는 담배를 한 대 피워물고는 며느리와 자식들을 불렀다. 그들은 마지 못해 안방에 들어왔다.

마님은 호통을 쳤다. “무슨 가문이 이러냐. 나는 너희들의 어머니인데 아무도 나를 맞지 않았다. 그런 버릇은 어디서 배웠느냐, 너희들을 엄히 벌하는 것이 마땅하나, 이번만은 용서해줄 것이다.” 아들과 며느리는 잘못을 빌고 앞으로는 잘하겠다고 했다.

마님이 올라왔다는 소식을 남편이 들었다. 남편은 적이 놀랐지만 항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슬그머니 부인 방으로 들어와 인사를 했다.

이 양반은 임금에게도 결혼했다는 사실과 아내가 지방에서 올라와 집안에서 일어났던 일을 이실직고했다. 왕은 신하를 꾸짖었다.

그대는 아내에게 잘못을 저질렀오. 듣자하니 공의 아내는 의기가 있고 기발한 재주가 있는 것 같소. 부인의 행동은 칭찬받을 일이오. 공은 부인에게 저지른 과오를 고치기 바라오.”

판서는 왕명에 복종해 그의 부인에게 정경부인의 칭호를 내렸다고 한다.

 

조선시대가 아무리 남성 중심의 유교사회였지만 적법하게 결혼한 여인을 남편이 버릴수 없다. 중매로 상대방을 선택했기 때문에 결혼 전에 얼굴을 보지 못한채 결혼을 했다. 남편이 결혼후 얼굴이 못생겼다고 버려서는 안된다. 이 경우처럼 국법으로 정실부인 대우를 해야 한다. 재혼한 부인도 전처 소생의 아들과 며느리에게 어머니로서 깍듯한 대우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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