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온 최초 개신교 목사 귀츨라프
조선에 온 최초 개신교 목사 귀츨라프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3.06.01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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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 충남 해안에 25일간 체류…영국과 교역하자고 요청했지만 조선이 거부

 

1832년 충청감사 홍희근은 지금의 보령시 고대도(古代島)에 정박한 영국 배에 관해 상세하게 보고했다. (순조실록 3721일자)

“625일 어느나라 배인지 모르겠지만 3개의 돛을 단 죽선(竹船) 한척이 홍주 고대도 뒷바다에 정박했는데, 영국 배라고 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 문자로 문답했는데, 나라 이름은 잉글랜드(英吉利國) 또는 대영국(大英國)이라 부르고, 선원들은 런던(蘭墩) 또는 인도(忻都斯担, 힌두스탄)에 사는데, 잉글랜드, 아일랜드(愛蘭國), 스코틀랜드(斯客蘭國)가 합쳐져 한나라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국왕의 성씨는 윌리엄(威氏)이며 영토는 중국처럼 넓다고 합니다. 국경은 곤륜산맥(티벳 북부 산맥)에 가까운데 중국 윈난성(雲南省)에서 발원하는 한줄기 강물이 영국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조선까지는 수로로 7만리인데 프랑스(法蘭治러시아(我斯羅필리핀(呂宋)을 지나고 시리아(地理亞) 등의 나라를 넘어서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홍주목사 이민회와 수군 장수 김형수가 영국인 선원이 말한 내용을 상세하게 적어 충청도 도지사(감사)에게 보고했고, 그 보고서가 조정에 올라온 것이다. 보고는 영국과 인도를 다소 혼동한 대목이 있지만, 거의 정확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는 바로 그 배에 중국어를 잘 하는 독일인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바로 카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1803~1851)였다.

 

카를 귀츨라프 /위키피디아
카를 귀츨라프 /위키피디아

 

18세기말 이후 조선의 바다에 이양선이 자주 출몰했다. 가장 먼저 조선 땅에 발을 디딘 영국인은 17979월 프린스 윌리엄 헨리호를 타고 부산 용당포에 도착한 영국 해군의 윌리엄 로버트 브로튼(William Robert Broughton)이다.(정조실록 2196) 이어 1816년 영국 해군장교 바실 홀(Basil Hall)1816년 리라호를 이끌고 한반도 서해안을 탐사하며 옹진군 소청도, 충남 서천군 마량리, 전남 진도군 상조도에 상륙했다.

귀츨라프는 영국인은 아니었지만 윌리엄 브로튼, 바실 홀에 이어 영국 배를 타고 조선 땅을 밟은 것이다. 귀츨라프에 관한 기록은 그후 프랑스 교회사가인 샤를 달레의 한국교회사’(1874)와 미국인 윌리엄 그리피스의 은둔의 나라 한국’(1882)에도 남아 있다.

 

귀츨라프는 프로이센 출신으로 독일과 폴란드의 접경 지역인 포메라니아(Pomerania)의 피리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베를린의 야니케 선교학교와 네덜란드선교회에서 공부했다. 1826년 개신교 루터파 목사가 되어 아시아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한자를 배우고 중국어에도 능통했으며, 곽실렵(郭實獵)이라는 한자 이름도 갖고 있었다. 1828년부터 런던선교회의 지원을 받아 태국에서 선교 활동을 했으며, 1830년 신구약 성서를 타이어로 번역했다. 18316월 중국 톈진(天津)을 거쳐 포르투갈령 마카오로 갔다.

그는 1832년 선교여행으로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500톤급 무장 상선 로드 애머스트(Lord Amherst)호를 타고 우리나라 충청도 해안에 25일간(723~812) 머물렀다. 귀츨라프는 조선에 나타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기록된다. 이때의 기록이 순조실록에 실려 있는 것이다.

순조실록에는 로드 애머스트호의 모습이 상세히 실려 있다.

선재(船材)는 대추나무(桋木)를 썼고 배의 형체는 외()를 쪼개 놓은 것 같이 생겼으며, 머리와 꼬리 부분은 뾰족한데 길이는 30()이고 넓이는 6파이며 삼()나무 폭을 붙인 대목은 쇠못으로 박았고, 상층과 중층은 큰 것이 10(])고 작은 것이 20칸이었으며

 

고대도 /보령시 홈페이지
고대도 /보령시 홈페이지

 

로드 암허스트호는 18322월 중국 광둥(廣東)을 출발해 그해 718일 황해도 몽금포 앞바다에 나타나 그 곳 아전들과 필담을 진행한 뒤, 남하하여 723일에 충청도 홍주 고대도에 나타났다.

귀츨라프는 고대도에 정박한후 방문한 조선관리들에게 조선 국왕에게 서한을 보내고 여러 필의 인도산 면직물(calico)가 천리경, 유리그릇, 금단추, 서적 등을 선물로 주면서 무역 협정의 체결을 요청했다. 게다가 옷감, 유리그릇, 달력 등을 조선의 금, , 동 및 대황(大黃) 등의 약재와 교역할 것과 자신들을 서울로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영국과 거리가 멀어 교역이 어렵고, 번국(藩國)의 처지에서 중국 황제의 허락없이 사사로이 교역할 수 없는데 청()나라의 문헌증빙(文憑)이 없이 지금까지 없었던 교역을 강제로 요청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며 이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들 중 일부는 87일 서산 간월도(看月島) 앞바다에 나타나 주민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순조실록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저들이 주문(奏文) 1봉과 예물 3봉을 전상(轉上)하기를 간청하였으나 굳이 물리치고 받지 아니하니, 저들이 마침내 물가에 던져버리고 또 작은 책자 3권과 예물의 물명도록(物名都錄) 2건을 주었다고 합니다. …… 문서와 예물을 저들이 끝내 되돌려 받지 않으려 하여 여러 날을 서로 실랑이를 하다가 17일 유시(酉時)에 이르러 조수(潮水)가 물러가기 시작하자 저들이 일제히 떠들면서 우리 배와 매 놓은 밧줄을 잘라 버린 뒤에 닻을 올리고 돛을 달고 서남쪽을 향하여 곧장 가버려 황급히 쫓아갔으나 저들 배는 빠르고 우리 배는 느리어 추급(追及)하지 못하고 문서와 예물은 결국 돌려줄 수 없었습니다.”

귀츨라프 일행은 조선 관리들에게 선물을 주며 교역품목을 제시했지만, 조선관리들은 거절했다. 그리피스에 따르면, 귀츨라프가 조선사람들에게 준 책은 성경책 1, 개신교에 관한 소책자였다고 한다.

귀츨라프는 한달 가까이 협상을 진행하려 했지만 조선인들은 선물마저 거절했다. 순조시절 기독교 금지령이 내려지고 이양선에 대한 경계심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조선관리들이 영국의 요구를 받아들일리 없었을 것이다. 귀츨라프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채 조선을 떠나고 말았다.

 

그후 귀츨라프는 마카오에 정착해 영국 상사를 위한 통역일을 했으며, 아시아인 선교를 위한 기사를 작성하고 책을 저술했다. 1837년에는 마카오에 표류한 일본인에게서 일본어를 배워 요한복음을 일본어로 번역했다. 1840년 제1차 아편전쟁이 터지자 영국 정부의 통역관으로 활동했고, 난징조약 체결 이후에는 1851년 죽을 때까지 영국의 홍콩 총독부에 근무했다.

 

카를 귀츨라프 /위키피디아
카를 귀츨라프 /위키피디아

 


<참고한 자료>

Wikipedia, Karl Gützlaff

순조실록 32721일자

은자의 나라 한국, W.E. 그리피스, 집문당, 2019년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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