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7년 군산 앞바다 프랑스군함 좌초사건
1847년 군산 앞바다 프랑스군함 좌초사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3.06.02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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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신부 처형에 항의하러 가다 전함 2척 난파…조선 정부 따듯하게 대접

 

고군산군도는 군산 서남쪽 50km 해상에 있는 군도로 선유도를 비롯해 63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경관이 뛰어나지만 사구가 발달되어 있어 뱃사람들은 조심해서 운항해야 하는 곳이다. 예로부터 조운선 항로가 이 곳을 지나갔고, 중국으로 향하는 국제 무역항로의 기항지였다. 폭풍우가 칠 때엔 선박들이 바람을 피하거나 기다리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1847년에 고군산군도에서 프랑스의 주력군함 두척이 난파하는 사건이 있었다. 선유도 근처인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 해군의 프리깃함 글로와르(Gloire)와 빅토리우스(Victorieuse)는 조선 왕에게 프랑스 신부 3명을 살해한 것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기 위해 그해 712일 포르투갈의 식민지 마카오를 출항했다. 글로와르호는 54, 빅토리우스는 24문의 대포를 장착했다. 글로와르호의 선장은 라피에르(Augustine de Lapierre)였다. 두 배에는 승무원, 군인을 합쳐 600명이 승선했다.

두척의 배는 3개월 전인 415일에 베트남 정부에 구속된 프랑스 신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다낭을 무차별 포격해 230명의 사상자를 내고 베트남 군선 5척을 파손한 바 있다. 베트남에서 본때를 보여준 프랑스 전함들은 이제 조선에 힘을 과시하러 북상한 것이다.

 

고군산군도 /문화재청
고군산군도 /문화재청

 

때는 조선 24대 헌종 13년이었다. 7살에 즉위했으므로, 이제 스무살이었다. 헌종은 재위 초기에 안동김씨인 순원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을 받았고, 그 시기이던 1839년에 앙베르, 샤스탕, 모방의 3명 프랑스 신부가 처형되었다.(기해사옥) 헌종은 1841년에 수렴청정을 걷고 친정을 했지만 여전히 안동김씨와 관료들에 둘러 싸여 있었다.

천주교 탄압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늘어났다. 프랑스 신부들은 조선의 신도들에게 신부수업을 시켰고, 김대건, 최양업이 마카오에서 수업을 마치고 한국인 성직자가 되었다. 감대건은 국내에 들어와 안성, 이천, 용인을 두루 다니며 서목에 전념했다. 최양업은 몇차례 국내에 들어오려 했으나 실패해 다시 입국을 시도하고 있었다.

김대건은 조선교구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황해도로 가 페레올이 프랑스 세실 선장에게 보낸 서신을 중국으로 가는 배에 전달하고 프랑스 신부들이 밀입국할 해안을 탐사했다. 그런데 그의 행동이 밀정에게 포착되었다. 김대건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헌종은 사대부들의 이런 분위기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프랑스 선원들이 모두 돌아간 후, 1846919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효수되었다.

 

2척의 프랑스 군함의 이동은 국내에 은신해 있던 페레올 주교의 요청을 받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프랑스 주교는 어떻게든 중국에 있는 프랑스 함대에 연락해 조선왕실을 협박하도록 했지만 프랑스 함대는 그 서신을 받지 못한채 조선으로 이동한 것이다. 라피에르 선장은 서해안을 따라 북상해 한강으로 진입할 계획이었다. 그는 영국인이 만든 해도를 손에 쥐고 있었다.

810일 정오가 조금 지난 무렵, 군함은 고군산군도를 지나고 있었다. 영국 지도에는 수심이 12~14 패덤이라고 적혀 있었다. 1패덤(fathum)1.83m이므로, 지도상으로 수심이 20m 남짓 되어 배가 충분히 지나갈 것으로 생각되었다.

갑자기 두 척의 배가 동시에 움직이지 않았다. 모래톱에 걸린 것이다. 동시에 썰물이 시작되었다. 도피할 여유도 없이 두 배는 좌초되었다. 좌초된 지점은 북위 35° 45‘, 동경 125° 8’이었다.

지도의 표기와 달리 실제 수심은 4패덤에 불과했다. 5~6m의 수심에 갑자기 생긴 모래톱으로 바닷속 지형이 바뀌었던 것이다. 밀물이 다가와도 배는 움직이지 못했다. 라피에르 선장은 글로와르호에서 가장 큰 구명정 2척을 내려 24명의 선원을 나눠 타게 하고 상하이로 보냈다. 그리고 배에 실린 모든 화물을 인양해 가까운 뭍으로 실어 날랐다.

선장은 자기 잘못은 뉘우치지 않고 영국 지도가 엉터리였다며 남의 탓을 했다. 이동과 하역 과정에서 빅토리우스의 선원 2명이 익사했지만, 배에 탔던 600여명 대부분이 무사했다.

 

이양선에 대해 골머리를 않고 있던 조선의 조정은 난파한 프랑스인들에게는 따듯하게 해 주었다. 헌종은 전라감사에게 명을 내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충분히 지원하라고 했다. 쌀과 채소, 소고기, 돼지고기가 배달되어 600명의 외국인이 먹고 지내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이 배에는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에서 공부한 조선인 최양업이 타고 있었다. 그는 마카오에서 프랑스 군함으로 보고 통역관의 자격으로 배에 승선했다. 배가 좌초한 후 조선의 관리들이 찾아 왔을 때, 최양업은 자신의 신분을 밝힐수 없었다. 조선에서 범죄시하는 천주교도얐기 때문이었다. 그는 프랑스인과 조선 관리들 사이에 통역했다. 다만 조선어를 사용하지 않고 벙어리마냥 한문 필담으로 양측의 의사를 소통했다.

 

6백명의 외국인들은 고군산군도에 야영을 했다. 조선의 관리들이 친절하게 대했고 필요한 물자는 충분히 공급되었기 때문에 프랑스 선원들은 어려움 없이 지냈다. 조선의 관병들은 외국인 주변을 감시하며 조선인과 그들 사이의 대화를 엄하게 감시했다. 조선에 천주교를 퍼트린 사람들이 프랑스인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양업은 멀찌기서 신자를 보기는 했지만 본토에 상륙하지는 못했다.

두 대의 구명정은 825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프랑스 선원들은 조선 해안에서 좌초한 배를 구할 프랑스 선박을 찾지 못했다. 영국 해군이 구조에 나서 고군산군도에 도착했다. 영국 배는 600명의 선원과 가벼운 물건을 싣고 떠났다. 하지만 대포와 무거운 쇠붙이는 남겨두었다.

 

라 글로와르호 /위키피디아
라 글로와르호 /위키피디아

 

헌종실록에 프랑스군함 좌초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성근묵이 상소하였다. “어찌하여 이번에 고군산에 양선(洋船)이 온 일이 있게 되었습니까? 이것이 과연 표류하여 온 배이겠습니까? 해적이겠습니까? 표류하여 온 배로 대우하여 마치 먼데서 온 자처럼 회유한 것이 ” (헌종 1389)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지금 전라감사 홍희석의 장계를 보니, 고군산에 왔던 이양선은 이미 떠났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서봉(書封)이라는 것은 사의(辭意)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들은 이미 떠났고 미처 물리치지 못하였고 보면,“(헌종 13811)

함경감사 박영원이 말하기를, "지난해 고군산에 와서 정박하였을 때에는 장청(狀請)하여 양식을 주었기 때문에 여러 날 동안 지체되는 폐단이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헌종 14819)

 

헌종실록의 내용을 보면, 좌초한 프랑스 선원들에게 잘 대해준데 대해 사대부와 관리들이 불만을 드러냈다. 조선을 해치러 온 자들인데 왜 잘 대해줬냐는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프랑스 군함이 남겨둔 대포를 가져가 대포 제조에 사용했다. 그들의 쇠붙이를 녹여 만든 포가 강화도에 배치되었다.

최양업은 이때 입국하지 못하고, 마카오로 돌아갔다가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 사제품을 받고 1949년 두만강을 거쳐 입국했다.

프랑스 신부들은 좌초 5년후인 1852년에 현장에 돌아가 남은 물건을 챙기려 했으나, 조선인들이 모두 가져 가버린 후였다. 그후 조선의 천주교 탄압은 지속되었고, 프랑스 함대는 그후 1866년에 다시 조선 땅을 찾아 한바탕 전투를 치렀으니, 병인양요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French frigate Gloire (1837)

Korea Times, A tale of two ships at Gunsan in 1847: Gloire and Victorieuse

은자의 나라 한국, 윌리엄 그리피스, 집문당, 2019년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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