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유럽인과 조우하며 국가 형성
동남아시아, 유럽인과 조우하며 국가 형성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17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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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식 총포기술 전수받아 군사력 확대, 상업 활동으로 국가주의 발전시켜

 

16~17세기 유럽인들이 밀려왔을 때 동남아시아에는 오랜 역사의 뿌리를 내린 왕국들이 건재했다.

베트남은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서기 938년 베트남인에 의해 응오() 왕조가 수립되었으며, 이어 딘(), (), (), (), () 왕조로 이어졌고, 15세기 이후 후기 레() 왕조가 막() 왕조와 대치하고 있었다. 베트남은 중국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정권교체시마다 조공과 책봉을 요구하며 침공해왔다. 16세기 이후 베트남에 서양인들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변화의 물결에 흽쓸렸다.

인도네시아는 오랜 역사를 지닌 해상제국이었다. 7세기에 스리비자야(Srivijaya) 왕국이 인도네시아 열도와 말레이반도를 통치하며 중국과 인도를 연결하는 거대한 해상왕국을 건설해 14세기까지 이어나갔다. 이후 오스만 투르크의 지원을 받아 이슬람 세력들이 건너와 마타람(Mataram), 반템(Bantem), 아체(Aceh) 술탄국을 건설해 할거했다.

태국에는 중국 윈난(雲南)에 거주하던 태족(泰族)이 남하해 건설한 아유타야(Ayutthaya, 13511767) 왕국이 있었고, 캄보디아에서도 앙코르와트를 세운 크메르제국이 600년을 지배한 후 멸망했지만, 그 후손들이 베트남 지배하에 자치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동남아시아 이슬람과 기독교 전파 /Anthony Reid, A History of Southeast Asia
동남아시아 이슬람과 기독교 전파 /Anthony Reid, A History of Southeast Asia

 

서양인들의 눈에 아시아인들이 야만인으로 보였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향료 열도에서 주민들을 몰아내고 향료 나무를 심고, 현지인들을 노예처럼 부렸다. 베트남과 미얀마의 해안에 포격을 가해 항구를 만들려 했지만, 토착 왕국들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동시에 동남아의 왕국들은 서양인들의 총포의 위력을 알게 되었다. 일본에 전해진 서양인의 조총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군사력 강화에 도움을 주어 일본 열도를 통일하고 조선을 침공하는 원동력이 되었듯이, 동남아시아 왕국들도 서양의 선진 무기를 적극 받아들였다. 조선만이 서양화기 기술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했을 뿐이다.

 

동남아시아의 거점은 말라카(Malacca)였다. 말레이반도 서부 해안의 이 곳은 말라카 술탄국이 지배했는데, 1511년 포르투갈이 12백명의 병력과 7~8척의 전함을 동원해 점령했고, 이어 1606년에 네덜란드에 빼앗겼다. 이 전략적 요충지는 1824년 영국에 이양된다.

처음에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곧이어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뺏고 뺏기는 전투가 벌어지면서 현지 왕국들이 동원되고, 그러는 가운데 서양의 총포 기술이 아시아에 이전되었다. 동남아시아의 왕국들은 서양화기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말라카의 술탄궁 /위키피디아
말라카의 술탄궁 /위키피디아

 

베트남은 레 왕조(1428~1526) 때부터 서양식 총포와 화기를 생산했다. 이들은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 기술을 배웠고, 바다에 빠진 유럽의 배에서 총포를 건지고 유럽인 기술자를 고용해 총포의 제작을 연구해 냈다.

17세기에 후기 레()왕조가 분열해 북부에 찐() 세력과 남부의 응유옌() 세력으로 분단되었을 때, 응유엔에게는 청동체 대표 1200문을 보유했고, 찐 세력도 50~60문의 철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1)

1700년대말, 떠이 선(西山) 농민반란군에 쫓긴 응유옌조의 어린 왕 푹 아인(阮福映)은 무수한 왕족들이 살해당하는 와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남쪽 메콩강 삼각주로 도망쳤다.

파멸은 인간을 나약하게 한다. 아무것도 없는 존재, 생존 본능만 남은 존재. 그는 메콩 지역을 전전하며 피해 다녔고, 사이암(타이)에 두 번이나 망명했다. 그를 따르는 군대도 없고, 지원하는 나라도 없었다.

1777년 푹 아인이 타이 만에 있는 푸 쿠억(Phú Quốc) 섬에서 프랑스인 선교사 피뇨 드 브엔느(Pigneau de Behaine) 주교를 만났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도 잡는 법. 이 신부가 무슨 도움이 될지, 까마득한 일이지만, 폭 아인은 장남 푹 까인을 브엔느 주교에 딸려 프랑스에 보내고 프랑스의 지원을 요청했다. 브엔느 주교는 파리로 돌아가 루이 16세에게 베트남 지원을 요청했다. 재정 파탄으로 혁명 전야에 있던 프랑스는 지원을 거부했다.

그 사이에 푹 아인은 사이공을 점령했다. 그는 군벌 보 타인을 사위로 삼아 다시 쟈 딘을 장악했고, 금으로 만든 꽃을 사이암에 조공으로 지원을 얻어냈다.

왕복 6년여(1783-1789)이 긴 여행 끝에 브엔느 주교는 카톨릭 세례를 받은 어린 왕세자와 함께 돌아왔지만, 푹 아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빈 손으로 돌아온 베엔느 주교는 사재를 털었다.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교는 그 돈으로 최신식 프리깃함 2척과 용병 300명을 끌어모아 푹 아인을 도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교가 데리고 온 인물들이었다. 요새 건축술과 보병 훈련을 감독한 올리비에 드 퓨이마넬, 서양식 범선 운영기술자 장 밥티스트 쉐뇨와 필리프 바니에르, 지도측량 전문가 장-마리 디요 등이 합세했다. 이들은 푹 아인의 군대와 전술을 서양식으로 개조했다.

용병 중에는 무기 제조, 성곽 건축, 선박 제조 등이 가능한 기술자들도 섞여 있어서 쟈 딘 정권의 군사력 강화에 매우 큰 기여를 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푹 아인의 세력은 몰라카, 페낭, 바타비야 등 당시 영국 또는 네덜란드 인들이 지배하던 도시로 가 선진 무기를 구입할수 있었다. 쟈 딘의 푹 아인 정권이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떠이 썬을 이겨 낼수 있었다. 메콩 유역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능력도 큰 몫을 했다.

푹 아인은 프랑스의 군사기술을 배워 북진에 나서 베트남을 통일했으니, 이 왕조가 베트남의 마지막 응유옌() 왕조다.

 

응유옌 왕조 시기의 베트남 무기 /위키피디아
응유옌 왕조 시기의 베트남 무기 /위키피디아

 

서양의 군사기술은 아시아 토착 왕국이 절대 왕권을 구축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미얀마 페구(Peguk, 현재는 Bago)에는 인도인들이 화약 제조공장을 설립했다.

16세기초 포르투갈이 페구성을 세 번이나 공략했지만, 페구를 지키는 현지군은 도리어 포르투갈 화기로 무장해 방어하며 버텨 냈다. 17세기초 미얀마 군대는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던 시리암(Syriam)을 탈환하고 그곳에 있던 포르투갈인을 아바(Ava)로 이주시켰다. 미얀마는 포르투갈인들의 무기를 근간으로 화기부대를 조직했다. 여기에다 코끼리부대까지 편성해 화승총에 포병을 합쳐 막강한 군대를 만들어 인도차이나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미얀마의 통구왕조(Toungoo dynasty)1564년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을 공격했는데, 서양제 화포가 주류를 이루었다.

 

통구왕조 시기의 미얀마 영토 /위키피디아
통구왕조 시기의 미얀마 영토 /위키피디아

 

미얀마에 대항하기 위해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도 서양식으로 무장했다. 1538년 파랍시 국왕은 120명의 포르투갈인으로 근위부대를 설럽하고 태국 병사들에게 화기 사용법을 가르쳤다. 16세기말에는 성능이 우수한 화약과 총포를 자체 제작했다. 하지만 아유타야는 버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줄곳 당하기만 했다.

태국이 버마를 제압한 것은 18세기 탁신 대왕(Taksin the Great, 재위 1767~1782)이었다.

17674월 버마왕국이 침공해 사이암의 수도 아유타야(Ayutthaya)를 점령했다. 400년의 아유타야 왕조는 버마의 침략으로 종말을 고했다. 사이암 각지에서 태국인들의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그중 한사람이 탁신이었다. 탁신은 각지의 저항세력을 통합해 버마군을 격퇴했다. 미천한 신분 출신의 탁신이 어느날 갑자기 세력을 확대하는데는 당시 중국인(화교)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태국산 총은 일본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 무기를 달라고 했다고 한다.

 

태국 찬타부리에 있는 탁신 대왕 상 /위키피디아
태국 찬타부리에 있는 탁신 대왕 상 /위키피디아

 

수마트라의 아체 술탄국은 오스만 투르크의 지원을 받았다. 아체는 포르투갈이 점령하고 있는 말라카를 공격했는데, 오스만 투르크가 대포와 탄약을 지원했다. 아체 술탄국은 투르크에게서 지원받은 대포로 말라카를 공격했는데, 포르투갈이 또다른 현지 술탄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말라카를 방어했다.

 

동남아 왕국 또는 술탄국들은 일찍이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와 접촉했기 때문에 서양화기 도입도 빨랐다. 이들 나라는 일찍부터 민족국가를 형성했다. 호주의 동남아시아 역사학자 앤서니 리드(Anthony Reid)1570~1630년대를 걸쳐 동남아시아 교역 발전이 절정을 맞았고, 이를 상업의 시대라고 불렀다. 리드는 동남아의 지배자들이 상품 유통의 요충지를 장악해서 국제 교육붐을 타고 커다란 이익을 취하고, 군사기술을 도입해 주변국을 통합하면서 강력한 왕권 하에 절대주의적인 국가를 형성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 시기를 동아시아에 국가형성의 시대라고도 했다. 2)

 


1) 리보중(李伯重), 조총과 장부 (글항아리, 2017), 171~172

2) 기시토모 미오, 미야지마 히로시,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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