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국가부도②] 한국, IMF에 손 내밀다
[1997 국가부도②] 한국, IMF에 손 내밀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18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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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렬 부총리 취임, 캉드시와 신경전… 이틀후 고집 꺾고 구제금융 신청

 

한국의 금융위기는 곧바로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경제가 흔들렸다.

199712월 한국이 IMF 구제금융을 받아들일 무렵 일본 경제는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일본 내 4위인 야마이치 증권이 파산신청을 하면서 일본 금융계에 부도의 망령에 휘말렸다. 일본 엔화는 1달러당 125엔을 넘어 하락일변도로 치닫고 있었다. 한국도 다급했지만, IMF와 미국도 다급했다. 미국으로선 한국 경제 위기의 불똥이 일본으로 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국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정부가 제출한 금융개혁법안 처리가 국회에서 무산된 사건이었다. 국제 시장에서는 한국 정부가 강력한 금융개혁을 추진하더라도 원화 평가절하는 불가피한 마당에 개혁 의지가 없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원화는 매도주문만 있고 매수주문은 거의 없었다. 미국의 메릴린치 증권은 원화 하락이 엔화 하락을 부추겨 연말에는 엔화가 1달러당 140, 원화는 1,200원까지 갈 것으로 예측했다. 한보 사태 때까지만 해도 대출 금리만 올랐을 뿐 외화 차입물량엔 지장이 없었지만, 이젠, 미국 은행들이 한국에 신규대출을 중단해 버려 어디서 달러를 구할 구멍이 없었다. 뉴욕 월가에서는 한국 정부에 대한 리스크도 못 믿겠다고 나왔고, 국책은행인 산업은행 채권의 가산 금리는 정크본드 수준인 3.0~4.0% 포인트까지 치솟았다.

 

19971119일 강경식 부총리는 금융개혁법안 유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임창렬 부총리가 들어섰다. 임창렬씨는 1980년대에 IMF에 파견된 경험이 있지만, 외신들은 그를 고집스런 민족주의자로 묘사했다.

그의 취임 일성은 IMF로 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대신에 일본과 미국에서 직접 돈을 빌려 외환 위기를 극복하겠다고 주장했다. 임창렬 신임 경제부총리는 한국 위기가 확산되면 미국, 일본도 위태롭다며 미국과 일본을 압박했다. 그리고 재경원은 한국은행이 IMF가 요구하는 자료를 주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1)

그러나 미국은 한국 정부의 주장에 코웃음쳤다. 미국 재무부는 IMF를 통하지 않으면 지원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 무렵 루빈 미 재무 장관은 시카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문제(한국 지원)에 접근하는 올바른 방법은 IMF를 통하는 길이다. 혹자는 IMF를 통한 지원은 미국이 리더십을 양보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지만, 미국은 IMF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클린턴 행정부는 의회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직접 개입을 피하고 IMF를 통한 방식을 선택했다. 미국은 일본이 단독으로 한국을 지원하는 것에 대해서도 음으로 양으로 저지했다. 한국은 IMF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제 금융계에서는 한국이 IMF 사상 최대의 금액을 지원 받을 것이며, 그 액수가 500~1,0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정부는 2.25%이던 환율 밴드를 10%로 확대하고, 국책은행 또는 정부의 채권을 해외시장에 발행해 외화를 조달하겠다는 내용의 금융안정화 대책을 발표했지만, 국제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이렇게 썼다. 2)

한국은 투자자들과 예금자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IMF 구제금융을 통해 은행을 조속히 안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이 (구제금융 요청을) 너무 지체하거나 경제가 침몰할 경우 그 영향이 다른 나라에까지 파급될 것이다. 최근 태국, 홍콩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금융혼란은 외부 지역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으나, 세계 경제 11위권인 한국의 위기는 이미 일본과 다른 나라에까지 그 영향이 파급되고 있다. 멕시코와는 달리 아시아 위기는 무모한 통화정책이라기보다는 민간부문의 문제가 있음을 반영하고 있으며, 따라서 재정지출 감소나 긴축통화 정책만으로 효과를 거둘 수 없다.”

 

1997년 11월 19일 김영삼 대통령이 임창렬 경제부총리에 대해 임명장을 수여하고 악수를 나누고 있다. /국가기록원
1997년 11월 19일 김영삼 대통령이 임창렬 경제부총리에 대해 임명장을 수여하고 악수를 나누고 있다. /국가기록원

 

임창렬 부총리는 취임 이틀후인 1121일 마침내 IMF에 손을 내밀었다. 임 부총리는 200억 달러 정도의 자금을 IMF에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국제 사회에서는 이를 믿지 않았다. 적어도 한국 정부가 요청한 금액의 3배인 600억 달러는 필요하다는 것이 국제금융시장의 시각이었다.

사실 IMF도 한국의 위기를 예상하지 못했다. IMF는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경제가 극심하게 흔들리자 그해 107명의 조사단을 한국에 보냈다. 당시 한국 외환보유의 수위는 가라앉고 있었지만, IMF 조사단은 외환보유액 하락의 문제를 지적하지 못했다. 그들은 한국이 스스로의 문제를 즉각(promptly)해결해야 한다고 권고했을 뿐 긴급하게(urgently)수습하라고 경고하지 못했다. 나이스 단장도 나중에 그 팀이 한국 경제의 허약함을 지적하지 못했고, 긴급행동을 요구하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한국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자, 미국의 언론들은 한국 관련 뉴스를 퍼부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 성장으로 주목을 받던 한국이 자존심을 희생하며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한국이 IMF의 지원이 필요했는데도 체면 때문에 이를 거부했었다.”

미국 언론들은 한국인들이 자존심, 체면을 꺾고 IMF로 갔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그 자존심은 무엇이었던가. 외국 딜러들이 한국의 외환보유액을 의심할 때 정부 당국자나 한국은행 관계자 누구 하나 국제금융시장에 국가 IR을 거의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개념조차 몰랐다. 월가의 전문가들은 멕시코와 태국의 위기에서 정부가 경제 상황을 정확하게 제시했더라면 패닉을 피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IMF와 한국 정부간 협상이 시작됐다. 미국 언론들이 임창렬 장관을 터프 가이라고 표현했지만, IMF 당사자들로선 다루기 힘든 존재였다. 그는 캉드시 총재의 이름을 발음기호대로 캄드수스(Camdessus)라고 부르며 샅바 싸움을 시작했다. 아무리 나라가 부도가 나 도움을 요청하기로서니 주권국가의 체면을 유지해야 했다.

IMF측 실무협상은 오스트리아 출신인 나이스 국장이 맡았다. 실무진의 협상이 마무리돼 가고 있던 12월초 캉드시 총재가 서울공항에 내렸다.

당시 상황을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렇게 정리했다. 3)

캉드시는 공항에 내리자마자 재경원 차관보(당시 정덕구)로부터 자신의 일정을 넘겨받았다.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45분간의 최종 협상을 마무리한 다음, 청와대를 방문, 서명식을 하도록 일정이 짜여져 있었다. 그는 일정이 너무 빡빡하다는 이유로 몇 가지 일정을 취소했다. 그랬더니 협상이 실패한 줄 알고 한국 금융시장이 흔들렸다. 그는 (실무진이 합의한 것보다) 더 많은 개방을 한국이 양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캉드시는 자신이 메모로 넘겨준 요구사항이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구제금융은 없다며 강하게 나왔다.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를 역임한 그는 국제 시장의 논리를 잘 이해했지만, 따듯한 가슴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일정을 하루 전에 보내주어야지 공항에서 일정을 주고, 이리저리 몰고 다니는 것이 무척 불쾌했던 것이다.

이에 임 부총리는 캉드시의 방한은 의례적인 방문으로 알고 있었으며, 일정은 하루 전에 팩스로 보내주었다고 밝혔다. 상황이 어쨌든 캉드시의 분노는 시장을 뒤흔들었다.

 


1) WSJ, 9832, Bitter Medicine

2) NYT, 981120, Asian Virus

3) WSJ, 9832, Bitter Medi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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