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국가부도③] 12월 3일 IMF 협약 서명
[1997 국가부도③] 12월 3일 IMF 협약 서명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19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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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명의 대통령 후보도 협정 이행준수에 동의…500억 달러 구제금융 합의

 

199711월 하순, 한국정부와 IMF는 구제금융 조건에 대해 본격적인 협상에 돌입했다. 국제 시장에선 한국과 IMF와 한국의 협상이 깨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시장이 크게 동요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은행 폐쇄였다. 한국 정부는 은행 폐쇄에 소극적이었다. 한번도 은행의 문을 닫게 한 경험이 없는데다, 수많은 예금자의 돈을 어떻게 지불하고, 은행원들을 해고해야 하는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국가 부도를 막기 위해 IMF에게서 수백억 달러의 자금을 지원받아야 할 형편이었다.

결국은 한국 정부가 역사상 처음으로 은행을 폐쇄할 것을 약속했고, 외국인 투자자들이 은행을 소유할 수 있도록 양보해야 했다.

한국 정부의 양보에 IMF도 한발 물러섰다. IMF는 외국인들이 한국 기업을 인수할 때 우호적(friendly) 인수인 경우에 한해 개방하고, 적대적(hostile) 인수는 허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일본의 지배를 받은 한국인들의 마음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한국 정부는 외자 유치를 위해 IMF 협약과는 별도로 적대적 인수마저 허용했다.)

 

1998년 1월 12일, 미셸 캉드시 IMF 총재가 김영삼 대통령을 접견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1998년 1월 12일, 미셸 캉드시 IMF 총재가 김영삼 대통령을 접견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타결이 늦어질 때 루빈 미 재무장관이 몇 차례나 임 부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타결을 종용했다.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연후였던 199711월말, 로버트 루빈(Robert Rubin) 미국 재무장관,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 연준(Fed) 의장은 쉬는 날이었음에도 불구, 한국 정부가 IMF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넣는데 여념이 없었다. 루빈 장관은 몇 차례나 임창렬 부총리에게 전화를 걸었고, 데이비드 립튼(David Lipton) 차관을 서울에 보내 IMF 조건을 받아들이라는 미국 재무부의 입장을 전달했다. 미국 재무부와 중앙은행의 수장들이 직접 나서서 IMF 조건 수락을 요구한 것은 IMF 조건이 미국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벌의 문제도 협상테이블에 올랐다. 미국과 유럽에서 온 IMF 사람들은 한국 재벌의 설비 과잉으로 국제 시장 가격을 하락시키고 있는 자동차, 반도체 산업에 대한 감산 문제까지 접근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IMF는 이 문제에 관한 한 합의문에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지만, 정부의 보조금 지원을 제한했다. 1)

일단 은행 폐쇄 방안에는 한국이 한발 물러났지만, 그 다음 과제는 몇 개를 폐쇄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한국 정부는 금융기관을 폐쇄해본 역사가 없다. IMF는 부실 은행을 모두 폐쇄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한국 재경원은 종금사 1개를 폐쇄하겠다고 밝혔지만, IMF 협상팀은 이것으로 안된다고 주장했다.

당시 IMF 협상팀에는 미국 은행 감독당국에서 일하다 은퇴한 윌리엄 알브레히트(William Albrecht)라는 요원이 있었다. 알브레히트씨는 서울 힐튼 호텔에서 한국 금융기관의 경영 내역을 검토한 결과 12개 이상의 종금사가 지급불능 상태에 있다고 진단했다. 재경원도 마침내 알브레히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한국 정부는 30개 종금사중 우선 9개를 영업정지시키고 얼마 안가 5개를 영업정지시켰다.

 

미셸 캉드시 IMF 총재의 의 마지막 요구는 차기 대통령 후보들에게 IMF와의 협정을 이행하도록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이에 반대했다. 자신의 재임기간에 발생한 일을 다음 대통령에 짐을 지울 수 없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캉드시는 “IMF 패키지가 선거일 이후에도 지속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라며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나라가 빚더미에 몰려 파산직전에 있는데 누군들 버티겠는가. 15대 대통령이 그해 1218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한나라당에서 이회창,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국민신당의 이인제씨등이 후보로 나섰다. 캉드시의 요구에 세 후보 모두가 앞으로 체결될 IMF 협정을 준수할 것임을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3IMF와 한국 정부는 협약에 서명했다. 총 지원금은 550억 달러. 이중 IMF210억 달러를 지원하고, 세계 은행 100억 달러, 아시아개발은행(ADB) 40억 달러, 기타 미국, 일본 등 제2선 지원금 200억 달러였다. 2선 지원금이란 IMF, 세계은행등 공공 자금 지원이 끝나고 나서도 위기가 심화될 때 지원하는 금액을 말한다. 350억 달러로 일단 한국 위기가 진정되면 미국은 한국에 돈을 빌려주지 않아도 된다. 그나마 제2선 지원금중 일본이 100억 달러로 가장 많이 배당받았고, 미국은 이의 절반인 50억 달러, 다른 나라들이 50억 달러였다. 미국은 IMF의 배후에서 사사건건 간섭하면서 돈 내는 문제에서는 아주 인색했다.

미국 재무부는 의회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 50억 달러를 외국환 안정화 기금(ESF:Exchange Stabilization Fund)에서 조달할 생각이었다. 이 기금은 지난 1930년에 창설된 것으로, 재무부가 달러가치 안정을 위해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고 행정부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다. 미 재무부는 인도네시아에도 이미 이 기금에서 30억 달러를 지원키로 한바 있다.

IMF의 한국 지원금은 사상 최대 규모였다. 태국 170억 달러, 인도네시아 180억 달러를 합친 규모보다 크고, 95년 멕시코에 대한 530억 달러보다 많다. 한국에 대한 IMF의 자금 지원은 국제적인 논란을 낳았고, 미국 내에서는 의회가 IMF 지원법안을 보류하는 결정적 동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IMF 패키지는 한국에 돈만 빌려주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다. 외국인이 한국 금융기관을 인수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정리해고를 인정하며, 관치금융은 금지됐다. 정부가 부실 금융기관을 합병 또는 폐쇄하도록 조치해야 하며, 경제 성장률과 긴축 예산이 강요됐다.

IMF 처방은 어물쩍 넘어갈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로버트 루빈 미 재무장관은 IMF 합의가 이뤄지자 마자, “중요한 것은 약속 이행이라고 못밖았다. 만일 중도에 약속을 파기해버리면 IMF는 즉각 자금 지원을 중단해 버리게다는 의미였다. 1998년에 인도네시아와 러시아가 IMF 조건 이행에 반기를 든 일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했다.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 대통령이 물러났고, 러시아에서도 외국 자금이 대거 이탈, 금융공황에 빠졌다.

한국 정부는 꼼짝할 수 없이 IMF라는 채권자의 감독 하에 거시정책을 꾸려나갈 수밖에 없게 됐다. 군사 작전권은 한미 연합사에 위임한 상태에서 경제정책마저 IMF에 넘겨주었으니, 한국은 과연 진정한 독립국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국 정부와 국민은 IMF의 시련을 이겨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IMF 이행 조건은 전통적으로 금융정책과 재정정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금융정책으로 고금리를, 재정정책으로 긴축예산, 즉 재정흑자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아시아 위기에서는 여기에 혹이 하나가 더 붙었다. 즉 미국식 시장경제의 원리를 도입하라는 것이다. 이 추가 요구는 로렌스 서머스(Lawrence Summers) 미국 재무부 부장관에 의해 강력히 주장됐다. 2)

 


1) WSJ, 98124. South Korea agree to IMF's bailout terms

2) WSJ, 1997128New economic model fail while American inc. keeps rolling : W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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