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핀 소현세자의 꿈…문 닫는 조선
못다 핀 소현세자의 꿈…문 닫는 조선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19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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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질 시절에 베이징에서 아담 샬 만나 서양 과학기술 접해…귀국후 독살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가 조선 제17대 국왕이 되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일본이 쇄국정책을 취하고 있는 동안에 조선은 서양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에 나섰을 것이고, 천주교들이 박해를 받지 않고 일찍부터 포교활동을 하지 않았을까.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경험이 있는 나라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먼저 배운 일본이 뒤늦게 이를 수용한 조선에 비해 앞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런 가정이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설사 소현세자가 임금이 되어 개방정책을 펼쳤다고 하더라도 서인파 수구세력의 반발이 컸을 것이고, 그 후대 임금들이 그 정책을 이어나갔을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역사를 가정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지만, 과거를 그 자체로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다만 비판 정신을 가지고 냉철하게 볼 필요가 있다.

 

소현세자만큼 불운한 왕자도 없을 것이다. 인조의 맏아들로 태어나 13살이던 1525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25살 되던 16371월 부인 강빈(姜嬪), 동생 봉림대군(鳳林大君)과 함께 청나라 수도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다.

선양의 숙소 심관(瀋館)은 조선의 대사관 격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청()나라와 조선이 맺은 정축약조(丁丑約條) 13개항을 수발하느라 힘든 나날을 보냈다. 청은 툭하면 명()과의 전쟁에 군대를 보내라, 군량미를 보내라, 약속한 여자는 왜 바치지 않느냐, 인질로 잡혀온 조선인들의 몸값을 바치지 않느냐, 등등의 질책을 세자에게 퍼부었다. 조선인들이 국경을 넘어 산삼을 캐다가 적발되면 청은 세자를 불러다 닦달했다.

그렇다고 조선이 청의 요구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홍타이지에게 수모를 당한 인조는 청과 대립각을 세우고 청의 요구를 마지못해 응했다. 특히 어려웠던 것은 청이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군대를 보내라는 요구였다. 조선이 차일피일했는데, 그때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관리들에게 조선의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다가 핀잔일 받기 일쑤였다. 조선군이 늦게 도착하자, 세자는 홍타이지에게 석고대죄하기도 했다.

그는 청에 끌려온 조선 백성들을 사랑하여 노예시장에서 몸값을 주고 조선인을 사서 조선에 되돌려 보내는 일을 했다. 조선에서 오는 물자와 비용이 모자라 300명의 식솔들을 먹을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농사를 지었고, 조선 상인들을 상대로 무역도 해 심관 앞은 시장을 이루었다고 한다.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돌아오면서 여지구(輿地球)라는 지구의(地球儀)를 가져왔다. 사진은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조선시대 최한기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돌아오면서 여지구(輿地球)라는 지구의(地球儀)를 가져왔다. 사진은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조선시대 최한기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그는 8년간 청나라에 머물렀다. 그중 역사가들이 가장 관심을 두는 대목이 1644년 순치제(順治帝)의 섭정 도르곤을 따라 베이징에 머물던 두달여의 활동이다.

이 기간의 활동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가 쓴 심양일기(瀋陽日記)에도 누락되어 있다. 다만 그의 베이징 활동 내용은 그가 만났던 서양인들의 기록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베이징에서 소현세자는 독일인 아담 샬(Adam Schall, 15911666)을 만난다.

아담 샬은 독일 태생 예수회 선교사로 뛰어난 과학자였다. 그는 1622년에 명나라에 와서 서광계(徐光啓)와 함께 천문학서인 숭정역서(崇禎曆書)를 편찬했다.

아담 샬은 청의 입장에서는 전범에 해당한다. 그는 명나라에 홍이포(紅夷砲) 기술을 전수한 장본인이었다. 명나라가 만주의 후금이 도발해올 때 만리장성 곳곳에 홍이포를 배치해 격퇴시켰다. 후금의 누르하치도 홍이포의 파편에 맞아 숨졌다. 청은 후에 망명한 명나라 장군에게서 홍이포 기술을 전수받아 대량생산하는데, 이 서양의 대포를 하늘이 돕는 포라며 천우포(天佑包)라 불렀다. 그토록 청에게 고전을 안겨준 홍이포 기술의 전달자였던 아담 샬을 살려두고 자국의 기술고문을 받아들여 그의 과학지식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도르곤의 그릇과 도량을 엿보게 한다.

 

소현세자는 아담 샬에게서 수학서적과 천문학 서적, 하느님 성상 등을 선물로 받았다. 그는 감사의 표시로 아담샬에게 두차례의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의 내용이 아담 샬이 저술한 책에 기록되어 있다. 1)

일전에 귀하로부터 천주상, 천구의, 천문서, 그밖의 서양서적을 받았습니다. 어찌 감사를 표해야 할지, 어찌 그 빚을 갚아야 할지 참으로 모르겠습니다. 이 가운데 몇 권의 책들을 훑어 보았습니다. 책들이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하고 덕을 닦는데 가장 적합한 가르침을 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상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벽에 걸어 놓고 보노라면 보는 이의 마음을 지극히 평온하게 해줍니다. 나의 왕국에도 이런 책들을 적지 아니 찾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책들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들이 수백년을 걸쳐 진실과는 아주 크게 동떨어져 있는 서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이런 책들로 내가 큰 부자가 되었는데, 어찌 기뻐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왕국에 돌아갈 때 나는 이 책들을 왕실로 가져갈 뿐 아니라, 이를 인쇄하고 책으로 찍어 학자들과 의견을 나눌 것입니다. 그들은 이 책들을 읽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책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황무지와 같은 곳에서 학문의 궁전으로 옮겨지게 된 운명의 변화에 대해 놀랄 것입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1645년 돌아오면서 그 일행이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해시계의 일종인 신법 지평일구 (新法 地平日晷). 보물 839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청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1645년 돌아오면서 그 일행이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해시계의 일종인 신법 지평일구 (新法 地平日晷). 보물 839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청

 

소현세자는 천주상만큼은 아담 샬에게 돌려 주었다. 아마 그것을 본국에 가져갔을 경우 사교(邪敎)로 몰릴 것을 두려워 했을 것이다.

그는 아담 샬에게서 받은 서양 서적들을 국내에 가져가 인쇄하고 학자들에게 반포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마 그가 왕이 되었다면 그는 청나라에서 서양학문을 수입하거나 서양 학자들을 초청해 조선의 근대화에 압장서는 군주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기록에는 세자가 베이징에서 서양인을 만난 사실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는 후대의 기록자들이 죽은 왕위계승자의 이단적 활동을 폄하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르곤은 베이징을 점령한 이후 8년간 인질로 잡아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돌려보내기로 했다. 1645118일 소현세자는 한양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는 귀국한지 3개월만인 426일 급사한다. 인조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2)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하였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이 사실은 세자의 염습(斂襲)에 참여했던 이세완이란 여인이 이상한 것을 보고 나와 사람들에게 전한 내용이다.

이 기록을 남긴 사관의 용기도 대단하다. 이 기록을 보면, 소현세자의 사망원인은 명백히 독살이다. 왕위계승자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 그의 아버지 인조였음이 분명하다. 신하들은 의관을 심문하자고 했지만, 인조는 이를 고집스럽게 허락지 않았다. 게다가 장례의식도 약식으로 서둘러 마무리했다.

세자가 죽었으니, 조선의 예법으로 차기 국왕 내정자는 당연히 소현세자의 맏아들 석철(石鐵)이 되었어야 한다. 석철은 당시 12살이었으므로, 충분히 세손이 될 충분힌 나이였다. 하지만 인조는 왕위계승자로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을 지명했다. 그는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로 갔지만, 형과 달리 청에 대한 적대감을 품고 귀국했다. 인조는 자신의 한을 둘째 아들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청에 대한 인조의 증오는 소현세자의 독살에 그치지 않았다. 인조는 1년후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에게 사약을 내렸고, 그 조치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신하들에게도 벌을 주었다. 세 아들은 모두 제주도에 유배되어 첫째와 둘째는 그곳에서 죽었고 셋째 석린(石麟)만이 삼촌인 효종의 보호를 받았다. 천벌이 두려웠을 것이다.

소현세자의 모진 세월과 짧은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소현세자가 세상을 뜰 무렵에 남쪽에서는 네덜란드가 조선의 코앞까지 진출했고, 북쪽에선 러시아가 몽골지역으로 남하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바타비야)에 본부를 만든데 이어 1624년에 대만에 젤란디아 요새, 1641년 일본 나가사키에 데지마(出島)에 상관을 개설했다. 북쪽에서는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 동쪽 끝까지 탐험하고 이르쿠츠크, 바이칼호로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인조가 죽고 봉림대군은 1649년 제17대 국왕 효종으로 등극해 돈키호테와 같은 북벌 정책을 밀어붙인다.

 

소현세자가 묻힌 고양 서삼릉 /문화재청
소현세자가 묻힌 고양 서삼릉 /문화재청

 


1) 함재봉, 한국사람 만들기I (2017년 아산서원), 188

2) 인조실록 1445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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