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 속 인물들④…풍월주(風月主)
화랑세기 속 인물들④…풍월주(風月主)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21 15: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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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이후 역사서에 나오는 명칭…초대 위화랑에서 32대 신공까지

 

위작 논란이 가시지 않는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화랑의 기원, 역대 화랑의 지도자인 풍월주(風月主)의 계보 및 행적 등이 향가(鄕歌)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풍월주는 <화랑세기> 필사본 이외에도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동국여지승람에서도 나온다. 그 뒤 이익의 성호사설,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도 나온다.

조선시대 서거정이 쓴 <삼국사절요>에는 진흥왕 원년(540)신라왕이 용모가 단정한 동남(童男)을 선발하여 풍월주(風月主)라 칭호하였고, 선사(善士)를 구하여 그 도중(徒衆)으로 삼아 효제(孝悌) 충신(忠信)을 연마하게 하였다라고 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풍월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신라가 남녀(男女) 아이를 뽑아 풍월주(風月主)라 불렀다. 신라의 군신(君臣)이 인재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답답하므로, 무리를 모아 떼지어 놀게 하여 그 의()로운 일을 행하는 것을 본 연후에 등용하려고, 소년 중에서 용모가 단정한 자를 뽑아서 풍월주(風月主)라고 부르고 착한 선비를 구하여 도중(徒衆)을 삼아서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권장하였다.”

“(진흥왕) 37년 봄 신라가 화랑(花郞)을 두었다. 때에 신라에 풍월주(風月主), 원화(源花)의 법이 폐하여진 지 이미 여러 해였다. 왕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다시금 영()을 내려 귀인(貴人)과 양가(良家)의 자제 중에서 얼굴이 아름답고 덕행이 있는 자를 선발해서 분장을 시켜 화랑(花郞) 또는 국선(國仙)이라 이름하였다.”

대체로 15세기 이후 사서에서 풍월주란 표현이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풍월주라는 표현을 찾을수 없다. 다만 풍월(風月)이란 표현이 나온다.

<삼국유사>는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 조에서 신라 진흥왕이 천성이 고상하고 멋스럽고 신선을 크게 숭상하여 나라를 일으키려면 모름지기 풍월도(風月道)를 앞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여라고 했다.

<삼국사기> 열전 검군 조에 풍월의 집안(風月之庭)에서 수행하였다는 표현이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을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15세기 이후에 나온 풍월주란 용어를 썼다는 점을 들고 있다.

 

KBS 드라마 '화랑' 포스터 /KBS
KBS 드라마 '화랑' 포스터 /KBS

 

<화랑세기> 필사본은 풍월주의 역사를 쓰고 있다. 이 책에는 풍월주의 이름이 1대부터 32대까지 나온다.

초대 풍월주는 위화랑(魏花郞)이다. 친부(親父)는 섬신공(剡臣公)으로, 친모인 벽아부인(碧我夫人)이 임신중에 비처왕(毗處王)과 관계를 맺어 마복자(摩腹子)로 태어난다.

위화랑에 이어 2세 미진부(未珍夫), 3세 모랑(毛郞), 4세 이화랑(二花郞), 5세 사다함(斯多含), 6세 세종(世宗), 7세 설원랑(薛原郞), 8세 문노(文弩), 9세 비보랑(秘寶郞), 10세 미생(美生), 11세 하종(夏宗), 12세 보리(菩利), 13세 용춘(龍春), 14세 호림(虎林), 15세 유신(庾信)으로 이어진다.

이어 16세 보종(寶宗), 17세 염장(廉長), 18세 춘추(春秋), 19세 흠순(欽純), 20세 예원(禮元), 21세 선품(善品), 22세 양도(良圖), 23세 군관(軍官), 24세 천광(天光), 25세 춘장(春長)., 26세 진공(眞功), 27세 흠돌(欽突), 28세 오기(吳起), 29세 원보(元寶), 30세 천관(天官), 31세 흠언(欽言), 32세 신공(信功)으로 이어진다.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오는 초기 풍월주는 이사부의 가계에서 많이 나온다.

4세 풍월주 이화랑이 딸 숙명의 남편, 즉 사위이고, 6세 세종은 아들, 11세 하종은 손주, 12세 보리공은 외손주로 4명의 풍월주가 등장한다.

이사부의 며느리인 미실을 중심으로 보면 2대 미진부는 아버지, 6세 세종은 남편, 4세 사다함과 7세 설원랑은 정을 통한 남정네, 10세 미생랑은 동생, 11세 하종은 아들, 12세 보리는 조카다. 1대 위화랑도 미실에게는 외가로 증조부 격이다.

미실이라는 요부가 여러 풍월주들을 흔들어 놓았다. 아울러 진흥왕 시절에 이사부와 부인 지소, 그리고 며느리 미실은 막강한 권력 구조를 형성하고, 서라벌 왕궁은 물론 화랑제도를 좌지우지했다고 <화랑세기>는 전한다.

 

<화랑세기)는 김대문(金大問)이 경덕왕 시절(702~737)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 열전에 김대문은 전기(傳記) 몇권을 지었는데, 이중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郎世記),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는 아직 남아있다고 했다. 김부식이 1145년 국왕의 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할 무렵에는 <화랑세기>를 볼수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김부식은 <화랑세기>가 전하는 내용을 <삼국사기>에 옮겨적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알수 없지만, 유학자의 입장에서 지금 필사본으로 전하는 비윤리적인 내용을 차마 사서에 기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안타깝게도 그후 8백여년간 <화랑세기>는 사라졌다. 그러다가 1989년 부산의 한 가정집에서 필사본 <화랑세기>가 발견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필사본의 내용이 워낙 파격적이어서 진위 논쟁이 벌어졌다. 1995년엔 두 번째 <화랑세기> 필사본도 부산의 같은 집에서 공개됐다. <화랑세기> 위작논쟁이 한층 가열됐다.

<삼국사기><삼국유사>는 고려인이 쓴 신라 이야기인데 비해 <화랑세기>는 신라인이 쓴 신라의 얘기다. 필사본 <화랑세기>를 진짜로 믿는 학자들은 신라의 역사를 450년 이상 앞당길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주장했다.

학자들 사이에서 두 필사본은 한사람이 작성한 것이며, 1995년 공개분이 모본(母本)이고, 1989년의 것은 발췌본(拔萃本)이라는 사실에는 이의가 없다.

두 종류의 <화랑세기> 필사본을 쓴 사람은 남명 박창화(朴昌和)는 인물로 밝혀졌다. 그는 일제 강점기인 1939~1944년 사이에 일본 궁내성 도서관에서 촉탁으로 근무하다가 우연히 <화랑세기>를 발견하고 그대로 필사했다고 한다. 그가 사망하고 필사본이 세상에 나왔고, 죽기 전에 이에 관한 아무런 정보도 남겨놓지 않았다고 한다.

필사본 <화랑세기> 진위 논쟁은 자료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시작돼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필사본을 믿는 쪽은 박창화가 원본을 충실히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반대의 입장에서는 박창화의 개인 작품, 곧 위작이라고 반박한다.

진위 논쟁을 풀 열쇠는 일본 궁내성에서 박창화씨가 베겼다는 <화랑세기> 원작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까지 그 원본을 찾는 작업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또다시 사라진 것인지, 일본이 한국 문화유산을 빼앗다는 것을 감추고 싶어 내주지 않는 것인지, 알길이 없다. 하지만 원본이 나오지 않는 한 위작 논쟁은 그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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