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조선 도자기 탐내다
네덜란드, 조선 도자기 탐내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22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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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톤급 코레아호 파견 시도…조선 무역독점한 일본 반대로 무산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일행이 조선에서 13년간 억류돼 있다가 탈출해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한 것은 1666914일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1년 이상 체류했고, 하멜은 이 기간에 조선억류 일지를 정리했다. 이들은 16671128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본부가 있는 바타비아(자카르타)에 도착했다. 하멜은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남고 나머지 7명은 그해 1223일 고국으로 떠났는데, 그 일행에게 자신이 정리한 일지 복사본을 보냈다.

그 복사본이 네덜란드에서 출간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미지의 나라 조선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유럽인들에게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하멜의 조선체류 일지는 그후 50년 이상 신판을 거듭해 출판되었다. 동아시아에 탐험욕구가 있던 항해사와 무역상, 군인들이 하멜의 기록을 읽었고, 그의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막연했던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하멜 표류기를 보면 지금의 한국인들이 읽어도 놀라울 정도로 당시 조선의 상황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조선의 국왕 이야기에서 청나라와의 관계, 백성들의 삶, 군사 체계, 종교적 관념 등이 실려 있다. 몽골()의 사신 주달관(周達觀)1296년 캄보디아의 앙코르 제국을 다녀와 지은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처럼 유럽인들에겐 그 책에 서술한 조선이란 나라가 신기하기만 했을 것이다.

하멜에 앞서 네덜란드에 도착한 7명의 선원들은 동인도회사 관리들에게 불려가 조선의 현황, 무역할 품목 등에 관해 설명했다. 일행은 조선에 잘 팔릴 상품으로 후추, 녹비(鹿皮, 사슴가죽), 백단향, 유럽산 직물류 등을 적시했다. 이들은 조선에 무역관(商館)을 설치해 교역을 하면 큰 이득을 볼 것이라고 조언하고, 직교역을 위해 함대를 파견하면 자신들도 자원하겠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수입한 일본도자기. 중앙에 VOC가 표기되어 있다. /위키피디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수입한 일본도자기. 중앙에 VOC가 표기되어 있다. /위키피디아

 

네덜란드는 조선의 도자기에 눈독을 들였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조선밖에 없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중국산 도자기의 매력에 빠져 있었다. 대항해시기 이전에 중국 도자기는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들에 의해 유럽에 전해졌지만, 유럽인들이 동아시아 교역로를 열면서 도자기를 직수입해갔다.

중국 도자기는 1,300° 이상의 고윤에서 제작되었다. 유럽에서는 당시 그만한 온도까지 열을 올릴 기술이 없었다. 유럽에선 700~800° 사이에서 구워지는 토기와 800~1,000° 사이에서 구워지는 도기(pottery)를 생산했지만, 두드리면 둔탁한 소리가 나고 물에 젖았다. 이에 비해 1,300~1,500°에서 생산되는 중국산 자기(porcelain)는 고급점토에 유약을 발라 구웠기 때문에 표면이 곱고 두드리면 금속소리가 나고 물을 흡수하지 않았다.

중국산 도자기는 동양 무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먼저 수입했지만, 네덜란드가 1세기 후에 이 무역로에 참여하면서 유럽에 본 차이나(Bone China) 열풍을 일으켰다. 네덜란드는 1612년에 배 한척이 난징에서 38,641점의 자기를 암스테르담에 운반한 이후, 2년후에 그 양이 두배로 늘었으며, 1639년에 그 수입이 366,000점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1643년 청()나라가 남하하면서 해상을 장악하고 있던 정성공(鄭成功) 등 명()나라 잔당을 고립시키기 위해 해금(海禁) 정책을 시행했다. 네덜란드는 중국산 도자기 수입을 할수 없게 되었다.

그때 네덜란드가 눈을 돌린 곳은 조선이었다. 그들은 일본에 나가있는 데지마 상관의 보고와 하멜 표류기등을 종합해 조선에 고급 도자기가 생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의 해금령(海禁令)으로 도자기 금단현상이 벌어진 유럽인들에게 조선이 훌륭한 도자기 생산국으로 부상한 것이다.

 

일본 나가사키 만에 설치된 데지마 인공섬 /위키피디아
일본 나가사키 만에 설치된 데지마 인공섬 /위키피디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하멜의 표류기에 자극을 받아 즉시 조선과의 교역을 추진했다. 하멜이 조선 땅을 떠난지 2년후가 되는 1668822일 네덜란드 정부는 바타비아의 동인도회사와 일본 데지마(出島)에 있는 상관에게 조선과의 직교역을 하는 방안을 마련하라는 내용의 훈령을 내렸다. 1)

코레아는 육로로 베이징과 통상하고 있다. 우리가 코레아에 갖고 갈 상품을 운송해주면 운송리를 우리가 부담해야 한다. 코레아가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중국의 방해가 우려된다. 따라서 코레아에 직접 사절단을 파견하는 것이 긴요하다.”

이듬해인 1669, 동인도 회사는 이미 건조된 1,000톤급의 상선에 코레아’(Corea)라는 이름을 명명했다. 코레아호는 조선과의 직교역을 트기 위해 167061일 바타비아에 도착했다.

하지만 코레아호는 바타비야(자카르타)에서 조선으로 향하지 못했다. 일본이 방해했기 때문이다.

바타비아의 동인도회사 본부는 일본 데지마 상관장에 서신을 보내 출항일정을 잡으려 했다. 그런데 데지마 상관장이 보내온 회신은 비관적이었다.

데지마 상관장의 회신에는 대마도주가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는데, 일본은 화란의 개입을 원하지 않고 있고 있으며, 네덜란드가 일본의 요구를 어기고 조선과 직접 교역에 나선다면 일본은 데지마 상관을 폐지할 것이라고 내용이 들어 있었다. 데지마 상관장은 게다가 조선과의 직교역을 중국이 반대할 경우도 고려해야 하며, 조선의 외국인 배척도 문제이고, 조선에 적당한 무역항이 없다는 점도 들었다.

동인도 회사의 입장에서 조선과의 불투명한 무역로를 개척하기보다는 오랫동안 상거래를 유지해온 데지마 상관을 유지하는 것이 이익이었다. 결국 바타비아의 동인도회사 본부는 데지마 상관의 보고를 따르기로 했다. 이에 따라 코레아호는 조선으로 항해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코레아호의 무산은 결과적으로 일본 도자기의 해외수출의 길을 트게 했다.

일본은 임진왜란 기간 동안에 이삼평(李參平) 등 수많은 조선 도공을 납치해 갔다. 이삼평은 규슈 사가(佐賀)현 아리타(有田)에서 청화자기 생산에 성공했다. 이후 일본의 도자기 기술과 생산량은 조선 도공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2)

중국 도자기의 수입 길이 막히고 조선과는 무역로 개설이 실패했으니, 유럽인들은 일본 도자기를 사가기 시작했다. 일본 도자기의 유럽 진출이 시작된 것이다.

후에 1710년 독일 마이센(Meißen)에서는 작센 후작의 원조로 동양 자기를 모방해 독자적인 자기를 개발하게 되었는데, 그 청화양파문양이 조선의 청화백자와 꼭 빼닮았다. 일본에 건너간 도공의 도자기가 유럽에 수출되어, 그곳에서 이를 모방한 것이었다. 조선은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하지 못했지만, 일본에 끌려간 조선의 후예가 유럽 자기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코레아호의 원정 포기가 조선에게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는 알수 없다. 만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코레이호가 조선의 개항을 요구했다면 조선 조정이 받아들였을까.

어쨌든 네덜란드에 의해 추진되었던 조선과의 무역로 개설이 무산되었다. 조선은 200년후인 1876,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에 의해 개항하게 된다.

 

하멜의 표류 및 귀국 경로 /그래픽=김현민
하멜의 표류 및 귀국 경로 /그래픽=김현민

 

 


1) 김준식, 다시 읽는 하멜표류기, 1995 ()웅진닷컴. 198~199

2) 홍익희, 유대인이야기, 2013() 행성비, 40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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