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국가부도⑦] 미국, DJ 경제철학 검증 후 OK
[1997 국가부도⑦] 미국, DJ 경제철학 검증 후 OK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23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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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빈 미 재무, 한국 지원 결정…뉴욕 Fed, 월가은행 팔 비틀어 만기연장

 

19971219일 백악관 벙커회의가 끝나자 미국 재무부는 데이비드 립튼(David Lipton) 차관을 서울에 보내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도록 했다. 대통령 당선자의 신분이라하더라도 국가 원수로 대우하는 게 국제관례다. 하지만 미국은 재무차관을 한국의 차기 대통령의 사상을 검증하러 보냈던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듬해 6월 미국을 방문해서 뉴욕 교민들에게 당시 정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통령에 당선되고 보니, 미국은 립튼 차관을 보내 저의 경제 철학을 검증하러 왔었습니다. 제가 국제 시장원리에 맞춰 경제를 개혁하고, 근로자들에게도 고통을 분담할 것이라고 밝히자 립튼이 만족해 돌아갔습니다.”

1222일 대통령 당선자를 만난 립튼은 한국 차기 정부의 개혁 의지가 확고함을 확인했다.

립튼의 보고가 워싱턴 재무부에 전달된 다음날인 24일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성탄절 휴일을 맞아 관청과 은행들이 일찍 문을 닫는 날이었음에도 불구, 워싱턴과 뉴욕을 연결하는 금융 채널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날 국제 금융시장에서 가장 주목했던 점은 한국에 대해 강경입장을 고수했던 로버트 루빈 재무 장관의 심기가 풀어졌다는 대목이었다. IMF와 서방 선진국들은 한국에 100억 달러의 조기 지원 방침을 결정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태도를 강한 톤으로 비난했던 루빈은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 경제는 강력하며, 그들이 다시 건강한 성장으로 되돌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우호적인 견해를 밝혔다. 그는 한국 지원 이유에 대해 미국의 국가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가 한국 지원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바꾸었음이 회견 대목에서 읽혀졌다.

로렌스 서머스 부장관도 김대중 당선자 측의 시장 지향적 개혁 공약이 광범위하고, 강력한데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거들었다.

루빈 장관은 결국 임창렬 장관이 며칠전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요구한 조기 지원을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의 입장을 번복했다. 한국이 570억 달러의 IMF 구제금융만으로 회복될 수 없으므로 2차 다국적 지원을 결정했다. 한국의 단기 외채 만기를 연장해줌으로써 한국 경제의 재기를 위한 시간을 마련해주기로 한 것이다.

 

데이비드 립튼과 윌리엄 맥도너 /출처: 트위터와 위키피디아
데이비드 립튼과 윌리엄 맥도너 /출처: 트위터와 위키피디아

 

미국 재무부의 입장이 바뀌자 워싱턴의 IMF와 뉴욕 금융가가 발빠르게 움직였다.

IMF는 이사회를 열어 한국과 미국의 합의를 추인, IMF13개 선진국들이 내년 1월초까지 100억 달러를 조기 지원할 것임을 의결했다. 다국적 지원군에는 선진 7개국(G7) 이외에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벨기에, 네덜란드, 스웨덴, 스위스등 6개국이 추가됐다.

워싱턴의 눈치를 보며 한국 지원을 꺼렸던 뉴욕 금융시장도 재무부의 입장에 호응했고, 윌리엄 맥도너(William McDonough) 뉴욕 연준(Fed) 총재가 주요 시중은행에 한국 지원을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루빈 장관은 앨런 그린스펀에게 협조를 요청했고, 뉴욕 FRB와 워싱턴의 재무부 사이에 긴밀한 연락이 오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날 뉴욕 연준이 팔을 비틀어(arm-twisting) 개최한 긴급회의에는 체이스 맨해튼, 시티, JP 모건, 뱅크아메리카, 뱅커스 트러스트, 뱅크 오브 뉴욕등 6개 은행 대표들이 참석했다.

뉴욕의 금융회사들은 뉴욕 Fed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한다. 한국이 관치금융을 한다고 하지만 미국 재무부와 중앙은행의 영향력도 막강했다. 뉴욕 Fed의 영향력이 막강한지는 미국 역사 속에서 면면히 나타나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준은 미국 전역에 12개 지방 연준을 두고 있다.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 클리블랜드, 리치먼드, 애틀란타, 시카고, 세인트 루이스, 미니애폴리스, 캔자스시티, 댈러스, 샌프란시스코가 그것이다. 뉴욕 Fed는 세계 최대 금융시장을 끼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11개 지방 Fed 총재의 지위를 능가하고, 워싱턴의 Fed 의장 다음으로 중앙은행의 2인자 역할을 한다. 워싱턴 Fed는 금리 결정과 통화 확대여부를 결정하는 총괄기구로서, 뉴욕 Fed는 집행 기구로서 서로의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

뉴욕 Fed는 때로 워싱턴의 Fed와 대립하는 등 미국 역사에서 악명이 높다. 1987년 이른바 블랙먼데이(Black Monday)로 뉴욕 주가가 폭락했을 때 당시 뉴욕 Fed 총재였던 제럴드 코리건(E. Gerald Corrigan)은 월가의 주요 은행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주가 하락으로 손해를 본 기관투자자들에 돈을 풀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은행들이 증권회사에 돈을 풀자 주가는 회복했고 블랙먼데이는 하루만에 종식됐다. 1991년에도 뉴욕 Fed 총재를 맡았던 코리건은 살로먼 브러더스의 채권 시장 조작사건을 가만 두지 않았다. 그는 당시 살로먼 브러더스의 존 굿프렌드(John Gutfreund)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임하라고 종용했다. 굿프렌드와 그의 부하들은 뉴욕 Fed의 지시로 사임했다.

이 악명 높은 코리건이 나중에 한국 외채협상에 등장한다. 한국 정부는 코리건을 외채협상을 고문으로 위촉했고, 그는 한국 정부와 선진국 은행을 오가며 부채 전환 협상을 중개하는 역할을 했다.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던 1997년엔 맥도너가 뉴욕 Fed 총재였다. 맥도너 총재가 워싱턴의 기류를 전해듣고 총대를 멨다.

월가 은행과 투자기관들은 1220일께면 대부분 두둑한 보너스를 타서 휴가를 간다. 6개 은행 회장들도 대부분 휴가중이었다. 그런데 뉴욕 Fed 총재가 전화를 해서 소집하는데 오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더글러스 워너(Douglas Warner) JP 모건 회장 등은 급히 옷을 챙겨 입고 월가에 위치한 연준 사무실로 모여들었다.

 

맥도너 총재가 말문을 열었다. 1)

"한국 상황이 긴급하다. 하루하루 악화되고 있다. 한국 외환보유액은 지난 여름에 이미 150억 달러가 줄어들었고, 지금은 80억 달러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하루에 10억 달러씩 퍼붓고 있는데 며칠이 가겠는가. 간단한 산수로 계산해보아도 상황은 심각하다."

6개 은행 회장들은 맥도너를 접견하고 돌아가 자신들만의 별도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뉴욕 FRB의 지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은행 회장들은 급히 성명을 내고 "한국에 대한 금융 지원은 한국이 단기 외채 문제를 해결하고 국제 자본시장에 조기 복귀하도록 하는 최선의 방안"이라며 금융 지원을 밝혔다.

 

미국이 한국에 대한 추가지원을 결정하는데는 상당한 부담이 있었다. 2년전 미국 국민들의 세금을 멕시코에 지원할 때는 멕시코의 방대한 유전을 담보로 했다. 나중에 돈을 못 받더라도 기름으로 상환하면 되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었다. 멕시코는 또 경제 위기가 악화되면 불법 이민자들이 국경을 대거 넘어올 우려가 있고, 미국인구의 10%나 되는 히스패닉(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미국인)을 고려해야 하는 국내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담보할게 없었다. 미군을 인질로 삼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미국은 한국 차기 정권의 구두 약속 하나만으로 멕시코보다 많은 지원을 결정했던 것이다.

루빈은 의회 증언에서 "투자자나 채권자를 위해 한푼도 (세금을) 사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미국을 비롯, 선진국 채권은행의 부실 여신을 해결해 주었다. 채무국 입장에서는 모라토리엄의 위기를 넘긴 것이지만...

루빈 재무장관의 한국 지원은 그가 늘 강조하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에 배치된 것이었다. 미국 행정부는 한국 지원을 단행하면서 도덕적 해이에 대한 대가로 한국에 추가적인 경제 개혁(플러스 알파)을 요구했다.

 

한국은 그 대가로 많은 것을 내놓았다. 그때 한국이 국제 투자자들을 상대로 새로 제시한 정책은 다음과 같다.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를 위한 정리해고제 입법화 외국인 주식 소유제한 완전철폐 @일본에 대한 수입제한품목 해제 채권시장 완전 개방 부실 은행인 제일은행과 서울은행 해외 매각 금융 감독 강화 및 회계의 투명성 확보 파산법 개정 외국인에 대한 인수 및 합병 허용 기업의 해외 금융차입 완전개방.

 


1) WSJ 9819US bankers brought plenty of savvy to Korea cr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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