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마의태자 전설 서려 있는 한계산성
비운의 마의태자 전설 서려 있는 한계산성
  • 이인호 기자
  • 승인 2019.07.23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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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신라부흥운동 흔적 남아…문화재청, 대몽항쟁만 강조하며 사적 지정예고

 

신라 56대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의 태자는 개골산(금강산)으로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 경순왕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왕자가 말하였다.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합하여 스스로 굳건히 힘을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 년의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 왕자는 통곡하면서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그 길로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으로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경순왕의 이름은 김부(金傅). <삼국유사>도 김부대왕조에 <삼국사기>와 똑같이 서술했다.

경순왕 태자의 이름은 김일(金鎰)인데, 삼베옷(麻衣)을 입고 경주를 떠났다고 해서 후세인들은 마의태자라고 부르고 있다.

 

인제 한계산성 남문지 일대 /문화재청
인제 한계산성 남문지 일대 /문화재청

 

설악산 서쪽 사면에 있는 강원도 인제군에 마의태자에 관한 전설이 많이 남아 있다. 마의 태자가 금강산으로 가지 않고, 설악산에서 신라의 부흥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인제군청 홈페이지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신라김씨대종원의 기록을 보면 마의태자 일행이 서울을 떠난 것은 단기3268(935) 10월 하순이고 지금의 한계리에 도착한 때는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와 눈보라가 심한 한겨울이었다고 했는데 이들 일행이 몹시 추웠던 것을 되새겨 한계(寒溪)란 이름을 붙이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관내에는 마의태자와 관련한 많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인제군 북면 한계리 설악산 천연보호구역과 국립공원 내에에는 해발고도 1,430.4m의 한계산을 중심으로 동남쪽과 서남쪽으로 흘러내린 자연적인 암벽지대를 활용해 성벽을 구축했는데, 한계산성이다.

한계산성은 경순왕이 축조한 산성으로, 고려와 후백제군이 이 산성에서 대치하여 혈전을 벌였다고 한다. 한계산성 높은 곳 언덕에 대궐터가 있는데, 경순왕이 산성을 쌓고 대궐을 짓고 이곳에 머물렀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다른 전설로는 경순왕의 첫째아들인 마의태자 김일이 축성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전설에 귀를 기울인다.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갔으나, 무리들이 웅거할 터가 마땅치 않아 설악산으로 돌아와 한계산성을 쌓고 신라 부흥운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인제군 삼남면에는 경순왕의 이름을 딴 김부리(金富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마의 태자가 이곳에 머물면서 신라 재건을 이룩하고자 김부대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모집하고 훈련시켰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인제 한계산성 상성(上城) 천제단 /문화재청
인제 한계산성 상성(上城) 천제단 /문화재청

 

문화재청은 강원도 인제군에 있는 한계산성(寒溪山城)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 예고했다.

문화재청은 보도자료에서 마의태자에 관한 기록을 싣지 않았다. 기록이나 출토유물이 없으면 논리를 전개하지 못하는 문화재 전문가들의 사고 한계를 보여준다.

문화재청은 기록과 발굴 조사를 토대로 볼 때, 한계산성이 13세기경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의 둘레가 6,278(1902m), 높이 4(1.3m)으로 기록되어 있어, 상당히 큰 규모의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에는 고종 46(1259)에 몽고군과 조휘가 이끄는 반란군이 이 성을 공격했으나, 산성방호별감 안홍민이 야별초를 거느리고 출격하여 무찔렀다는 기록이 있다.

 

산성은 입지와 양상을 볼 때 시대변화에 따른 성곽 확장과 성벽이 연장된 구조가 잘 나타난다. 성벽과 별도로 축조된 돈후(墩堠, 파수를 보는 망대) 시설물을 갖추고 있어 몽골 침략에 맞서 사용한 입보산성(入保山城, 들어가서 지키는 산성)임을 알 수 있으며, 평면구조와 축성방식, 부속시설물의 변화양상을 살필 수 있는 대표적인 중세시기 산성이다.

지금 성벽이 남은 곳은 높이 5~6m나 되나, 천연의 절벽은 성벽을 쌓지 않고 암벽을 이용했다. 성벽은 아래쪽은 큰 돌을 사용하고, 위로 오르며 작은 돌을 사용했으며, 아래에서 2m쯤까지는 벽면이 거의 수직을 이루다가 위로 오르면서 85°정도의 기울기가 된다.

성문은 문구(門口) 너비가 157166이고 측벽의 높이가 230인 사각문형식이다. 성벽의 기초는 쐐기돌로 수평을 맞추듯 작은 돌조각을 사용한 수법을 채택했다. 성벽의 윗부분은 여러 차례 수축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산성의 둘레는 약 7에 달하며, 상성(上城)과 하성(下城)으로 구분된다. 상성은 약 1.7~1.9이며, 하성은 5~6에 이른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상성과 하성의 존재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상성은 몽골 침입에 대비해 사용하던 곳이며, 하성은 후대에 반원(反元) 정책을 추진하면서 대대적으로 개축한 것으로 보고 있다.

상성은 현재 남한 내에서도 매우 험준한 곳에 축조된 산성으로 알려져 13세기 험준한 곳에 주로 형성했던 산성들의 전형적인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문화재청은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상성과 하성을 시굴조사를 실시해 고려~조선 시대의 다양한 유구와 유물을 확인했다.

상성에서는 총 15개소의 구들 건물지, 부분적으로 남아 있던 성벽 기저부(基底部)를 확인했고, 청자와 도기 조각 등이 나왔다. 하성에서는 총 18개소의 건물지와 至正十八年(지정십팔년)’(1358, 공민왕 7) 기와 조각, 백자조각 등이 나와 한계산성이 13세기 축조된 이래 고려 말에 다시 대대적으로 보수 또는 증축(혹은 개축)되어 조선 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은 한계산성을 사적으로 지정예고하면서, 그 이유로 30년간 여몽(麗蒙) 전쟁의 최후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몽골 영향 아래 있던 쌍성총관부의 세력 확장을 저지한 국난극복의 역사적인 현장이라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인제군은 여몽항쟁보다는 마의태자에 중심을 두고 역사콘텐츠 사업을 벌이고 있다.

문화재청은 앞으로 30일간의 예고를 통해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사적지정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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