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곰의 남하…조선의 두차례 나선정벌
북극곰의 남하…조선의 두차례 나선정벌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24 17: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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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요청으로 파병…조선군, 러시아와 전투에서 우수한 전투력 과시

 

북극곰이 서서히 남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들은 따듯한 곳에 농경지를 찾았다.

몽골인 또는 여진인도 정착하기 어려운 동토의 땅을 누비며 토색질을 하던 러시아인과 그들의 앞잡이 코사크인들은 1639년 아무르강 하구까지 탐험해 오호츠크해를 발견했다. 그들은 농사를 지을 마땅한 지역을 찾지 못했고, 서서히 중국의 변경을 넘보기 시작했다. 그 무렵, 중국은 명청 교체의 시기였고, 조선은 병자호란의 치욕에 치를 떨고 있었다.

 

러시아 극동지역 개척의 선구자는 바실리 포야르코프(Vassili Poyarkov)와 예로페이 하바로프(Yerofei Khabarov).

포야르코프는 아무르강을 최초로 탐험한 러시아인이었다. 그는 1643133명의 대원과 함께 시베리아 극동의 요새 야쿠츠크에서 남하해 아무르강으로 내려왔다. 그는 현재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인 흥안령산맥(스타노보이 산맥)과 아무르강 사이에 농사를 지을만한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는 가축도 기르고 마을도 형성되어 있었다. 그 종족은 몽골계 다우르(Daur) 족이었다. 포야르코프는 다우르족이 중국에 조공을 하고 있고, 그들의 상전이 복다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복도이가 청나라 황제인줄 몰랐다.

포야르코프의 대원들은 아무르강 본류와 지류를 탐색하면서 겨울을 보냈다. 먹을 것이 없어서 현지인 마을을 약탈하고, 송진을 발라 먹고, 야생짐승을 잡아먹고, 심지어 원주민 포로들의 인육을 먹기도 했다고 한다. 탐험대는 40여명이 기아로 죽을 종도로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야쿠츠크로 돌아갔다.

포야르코프의 뒤를 이은 사람이 하바로프였다. 그의 이름을 딴 도시가 러시아 극동의 하바로프스크다.

하바로프는 1650년 야쿠츠크의 보예보다(vojevoda, 지방행정관) 프란츠베코프에게서 차르 알렉산드르 1세의 서신을 받고 출발했다. 서신은 다우르족과 복도이(Prince Bogdoi)에게 보내는 것이었는데, 그 안에는 러시아 차르에게 복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6천명의 강력한 군대를 보내 짓밟아 버리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들은 복다이를 시베리아의 부족장 쯤으로 알고 있었다.

청 황제(순치제)는 분노했다. 어디 감히 오랑캐가 나의 속국을 넘보느냐는 것이었다. 동이(東夷)가 새로운 북적(北狄)을 만난 것이다.

하바로프의 원정대는 그해 가을 산넘고 물건너 다우르 마을에 도착했는데, 다우르족은 이미 대항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그들은 군대를 동원해 하바로프 일행을 저지했다. 하바로프는 겨울을 보내기 위해 아무르강 북쪽 해안 알바진(Albazin)에 동계병영을 건설했다.

하바로프 일행은 이듬해 16516월 대원을 보충받아 현재의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겨울을 보낼 채비를 했다. 108일 다우르족과의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다우르족은 1천명의 병력을 투입해 하바로프 원정대를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다우르족은 병력수에서 우세했지만, 러시아의 총포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다우르족은 청 황제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해를 넘겨 1652년 청군은 닝안(寧安, 寧古塔)에서 다우르족, 두체르족으로 1,500, 여진족 600명등으로 대군을 편성하고 하이세海色)에게 지휘를 맡겼다. 청나라 군대가 러시아 요새들을 공격했지만, 또 패배했다. 하바로프는 철수했고, 러시아는 현재 중국 흑룡강성 후마(呼瑪) 현에 병영을 건설했다.

하바로프의 후임으로 오누프리 스테파노프(Onufriy Stepanov)라는 코사크인이 병력 400~500명을 지휘하며 아무르 유역에 남았다.

순치 10(1653) 청조는 사르후다(沙爾虎達)를 영고탑(寧古塔) 일대를 관할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무장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마침내 청조는 밍안다리(明安達禮)에게 북경수비대를 이끌고 가 러시아 군을 격퇴하도록 앙방장경(昻邦章京)이라는 지위를 부여했다. 청은 동시에 조선에 조총수 파병을 요구했다.

 

아무르강(흑룡강) 유역 /위키피디아
아무르강(흑룡강) 유역 /위키피디아

 

청나라 사신 한거원(韓巨源)16542월초 한양에 들어와 효종을 알현하고, 거의 명령조로 말했다. <효종실록>은 이렇게 기록한다. 1)

한거원이 조선에서 조창(鳥槍)을 잘 쏘는 사람 1백명을 선발하여, 회령부(會寧府)를 경유하여 앙방장(昂邦章)의 통솔을 받아 가서 나선(羅禪)을 정벌하되, 3월초 10일에 영고탑(寧古塔)에 도착하시오." 하였다. 상이 차를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나선은 어떤 나라이오?‘ 하니, 거원이 아뢰기를, "영고탑 옆에 별종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선입니다."고 대답했다.”

 

당시 청나라에선 북쪽 변경을 괴롭히는 오랑캐를 나선이라고 불렀다. 머나먼 모스크바에서 온 서양인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몽골·여진족과 다른 별종의 오랑캐쯤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조선도 청이 아는 것 이외에 나선에 대해 지식이 없었다. 그냥 시키는대로 할 뿐이었다.

청 사신의 파병 요구에 효종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 자리에서 파병을 결정한다.

효종 5년이었다. 효종은 5년전 즉위하면서(1649) 송시열(宋時烈)이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를 받아들여 청을 정벌하는 북벌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부왕 인조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는 삼배구고두(三跪九叩頭)의 수모를 되갚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임금은 오랑캐가 또다른 오랭캐를 무찌르는데 파병하라는 요구에 갑론을박의 논쟁 한번도 없이 승락한 것이다. 이게 조선의 실상이었다. 명분은 권력을 유지하고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이었을 뿐, 보다 강한 자 앞에선 고분고분, 꼬리를 내리는 게 당시 집권세력이었다.

효종은 어쩌면 현실적이었다고 평가할수 있다.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에 끌려가 8년간 인질생활을 하면서 여진족의 강성함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거역할 때 내려오는 가혹한 처벌을 몸소 체험했다. 게다가 효종은 광해군이 파병대장 강홍립에게 적절한 순간에 항복하라고 한 것과 같은 비겁한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조선은 청이 요구한지 한달만에 병력을 파병한다. 역사에서 이를 제1차 나선정벌이라고 한다. 조선은 변급(邊岌)을 우두머리로 해서 함경도 주둔병력 가운데 100명의 조총수와 초관(哨官)과 기고수(旗鼓手)등 모두 150여명의 파병군을 구성했다. 파병군은 326일 두만강을 건넜다.

조선군은 승리했다. 조선-청나라 연합군은 428일 아무르강(흑룡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러시아 군과 교전했고, 조선의 조총수들은 러시아 함선에 집중사격을 가했다. 러시아군은 많은 부상자를 내고 55일 흑룡강을 거슬러 도주했다.

두 번째 파병은 4년 뒤인 1658년에 이루어졌다. 청의 요청으로 조선은 신류(申瀏)를 파병대장으로 삼고, 조총수 200, 기고수와 초관 등 총 260여명을 파병했다. 조선군은 그해 52일 두만강을 건넜다. 610일 송화강과 흑룡강의 합류 지점에 도착해 스테파노프가 이끄는 러시아 함대와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도 조선 조총수의 혁혁한 전공으로 승리로 끝났다.

스테파노프의 부하 페트릴로프스키는 훗날 당시 전투상황을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전투에서 대장 스테파노프와 코사크 병사 270명이 전사했다. 차르에게 바칠 국고 소유의 담비가죽 3,080, 대포 6, 화약, , 군기, 식량 등을 실은 배가 모두 침몰했다. 성상(聖像)을 실은 배 1척에 95명이 올라타 간신히 탈출했다.”

 

당시 조선군이 우세했던 것은 북벌정책을 추진하면서 병기를 개선하고 군대를 잘 훈련시켰기 때문으로 볼수 있다. 결과적으로, 효종의 북벌정책은 청나라와는 한번도 싸우지 못하고, 청을 위해 러시아와 싸우는데 이용되었던 것이다.

두차례 나선정벌에 대해 정벌이라는 용어 선택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당시 국제외교 관계에서 상국인 청의 요청으로 파병해 승리한 만큼 정벌이라는 용어는 무난하다고 본다.

문제는 조선이 두차례나 북방에 군대를 보내놓고서도, 그후에 서양 세력의 동진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다. 중국이 북방에 버퍼존(buffer zone)을 형성했기 때문일수도 있다. 하지만 200년후 조선말기에 러시아는 연해주를 얻고, 조선정세에 적극 개입하게 된다.

 

하바로프스크의 예로페이 하바로프 상 /위키피디아
하바로프스크의 예로페이 하바로프 상 /위키피디아

 


1) 효종실록, 165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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