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르친스크 조약…중국, 연해주는 지켰지만…
네르친스크 조약…중국, 연해주는 지켰지만…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25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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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초의 국경조약으로,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명나라때 영흥사비 잊혀져

 

흑룡강(아무르강) 하류와 암군강(Amgun River)이 만나는 지점에 명()나라 때 세운 영령사(永寧寺) 절터가 있다. 그 절터에는 칙수노아간영령사비기(勅修奴兒干永寧寺碑記)와 선덕중건영령사기(宣德重建永寧寺記)라는 두 개의 비석이 있다.

두 비석은 명조 영락제(永樂帝)와 선덕제(宣德帝) 시대에 이시하(亦失哈)라는 환관이 원정대를 이끌고 이 지방에 와서 누르칸도사(奴兒干都司)라는 통합기관을 만들고 흑룡강 하류와 사할린을 지배하에 두었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했다.

비석의 건립시기는 비문(碑文)을 통해 1413년과 1433년으로 확인되었다. 이 기록은 명나라 시대부터 연해주가 중국의 영토였음을 보여준다.

 

영흥사의 두 개 비석 /위키피디아
영흥사의 두 개 비석 /위키피디아

 

이 비석은 청나라 시대에 잊혀졌다가 청나라 말기인 1809년 마미야 린조(間宮林蔵)라는 일본인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고, 1885년에 중국인 지리학자 조정걸(曹廷杰)에 의해 그 존재가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만약 이 비의 존재가 건립된 이후 중국인들의 머리 속에 기억되었더라면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시 중국은 유리한 고지를 점할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비석은 명나라로선 황제의 권위가 연해주까지 미쳤다는 자랑스런 증거가 될수 있었지만, 만주 출신인 청나라에겐 자신들의 발원지가 한족의 영향권 내에 있었다는 부끄러운 자료가 되었다. 따라서 청이 중국을 차지한 이후 두 개의 비석은 잊혀져 있었다.

 

15세기 만주와 연해주 /자료: 池田 勝宣, 아무르 下流域 奴兒干都司와 永寧寺碑와 住民族들, 2017년
15세기 만주와 연해주 /자료: 池田 勝宣, 아무르 下流域 奴兒干都司와 永寧寺碑와 住民族들, 2017년

 

러시아가 밀려 내려오면서 청나라의 북변은 영토 분쟁에 휩쓸렸다.

1654, 1658년 조선군의 두차례 나선정벌로 힘을 얻은 청나라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거점도시 네르친스크 이남의 땅을 모두 확보하고, 그 일대에 얼쩡거리던 러시아인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청나라는 흑룡강(아무르강) 하류 오흐츠크해에서도 러시아인들을 몰아냈다.

그곳에는 러시아의 범죄자, 러시아에 배신한 코사크인들이 몰려들었다. 그 중에 니키포르 체르니고프스키(Nikifor Chernigovsky)라는 폴란드 귀족이 있었다. 그는 폴란드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한후 가족과 함께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림스크라는 시베리아 도시에 유배되었을 때 그곳의 보예보다(voyevoda, 지방관)가 그의 딸을 겁탈하자, 그는 러시아의 지방관을 죽이고, 84명의 코사크 반란자를 규합해 아무르강으로 도망쳐 왔다.

그는 다우르족의 영토에서 작사(Jaxa)라는 소왕국을 세웠다. 알바진에서 500km 떨어진 제야강 하구에 세워진 작사국은 처음에 러시아와 대항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러시아의 작위를 부여하고 그 일대를 통치했다. 러시아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대신에 청나라가 자국 영토를 불법 점거했다는 원정대를 보냈고, 이 폴란드인과 코사크 반란자들은 청나라와 대치했다.

러시아는 이 배신자에 대해 처음에는 사형을 언도했으나, 곧바로 사면령을 내리고, 알바진 지방관으로 임명해 청나라와 대치하게 했다. 그를 이용하려 한 것이다.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파괴된 알바진 요새 그림 /위키피디아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파괴된 알바진 요새 그림 /위키피디아

 

그 무렵 청나라는 내부문제에 치중했다. 오삼계(吳三桂) 등이 일으킨 삼번의 난’(1673~1681)이 터지면서 청나라는 다시 북방 경계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

삼번의 난을 진압한 이후 강희제는 눈을 북으로 돌렸다. 강희제는 알바진과 네르친스크 지역의 부족장 간티무르를 송환하라고 러시아에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거부했다.

1685, 강희제는 군대를 보내 알바진 요새를 함락시켰다. 강희제는 항복한 러시아인들이 네르친스크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했으나, 그들은 얼마 후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알바진을 탈환했다. 재개된 전투는 10개월을 끌었다. 알바진 요새의 러시아군은 병력이 소진될 때까지 버텼다. 청군은 일단 후퇴했다.

이때 청과 러시아 예기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청에 복속한 몽골에 내분이 벌어졌고, 유럽에서는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가 폴란드, 베네치아와 손잡고 러시아 남부 크림 반도를 둘러싸고 투르크와 전쟁 상태로 들어갔다. 청과 러시아는 먼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타협을 벌이는 게 낫다는 이해관계가 일치하게 되었다.

중국은 오랑캐와의 협상이므로 베이징에서 하자고 했지만, 러시아는 접경지대인 네르친스크에서 하자고 했다. 협상장소 선정에는 청이 밀렸다.

 

라틴어로 된 네르친스크 조약문 /위키피디아
라틴어로 된 네르친스크 조약문 /위키피디아

 

16898, 러시아가 건설한 동시베리아 요새도시 네르친스크(Nerchinsk)에 중국 청()나라 대표와 러시아 대표가 마주 않아 국경협상을 벌였다. 통역은 라틴어로 이뤄졌다. 협상은 보름간 진행되었다.

827일 양측 대표는 동시베리아와 북만주의 국경에 관한 역사적인 조약을 맺었다. 네르친스크 조약(Treaty of Nerchinsk)이다. 중국어로는 尼布楚條約이라 한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와 러시아의 동부지역 국경은 헤이룽(黑龍, 아무르)강의 지류인 아르군강과 케르비치강, 외싱안링(外興安嶺, 스타노보이) 산맥으로 정해졌다.

이 조약은 북만주와 시베리아를 놓고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맺어진 최초의 국경조약이다. 또 중국과 러시아가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한 조약이다. 중국은 조선이나, 베트남, 몽골을 번국(藩國)이라며 종속국으로 취급했지만, 러시아에 대해서는 동등한 나라로 대우한 것이다.

국경선을 긋는 협상에서 양측은 팽팽히 대립했다. 청은 황제가 몽골 칸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징기스칸의 영토가 모두 자기네 것이라 주장했고, 러시아는 그동안 개척한 요새를 내어 줄수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러시아는 전투때보다 더 많은 15,000여명의 병력을 회담장에 투입했다. 청나라도 뒤질세라 회담장 주변을 겹겹이 에워싸고 무력시위를 벌였다. 결국 러시아측이 한발 양보하면서 타협이 이뤄졌다.

만약 이때에 청나라가 명조에 건립된 영흥사비(永寧寺碑)의 기록 내용을 들이밀었다면 협상이 쉬었을 것이다.

 

청과 러시아의 국경 변동. 네르친스크 조약(1689년), 아이훈 조약(1858년), 북경조약(1860년). /위키피디아
청과 러시아의 국경 변동. 네르친스크 조약(1689년), 아이훈 조약(1858년), 북경조약(1860년). /위키피디아

 

조약 내용 중 재미있는 조항은 서로 뺏고 뺏기던 알바진 요새를 폭파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때가지만 해도 청나라는 한참 기운이 올라갈 때였기에, 유럽 열강의 하나인 러시아와 대등한 협상을 할수 있었다.

이 협상에서 청나라는 연해주와 흑룡강 유역을 지켜냈다. 러시아는 이때까지만 해도 수백명 단위의 원정대로 공격해 왔고, 중국은 수천명을 동원해 인해전술로 버틸수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할수 있었다.

하지만 그후 청나라의 기력이 쇠하면서 170년 후인 1858년 아이훈 조약으로 흑룡강 이북을 빼앗기고, 2년후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마저 빼앗겨 버렸다. 오늘날 중국과 러시아 국경선은 이때 그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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