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 한복판에서 발견된 백제 왕실의 무덤
마한 한복판에서 발견된 백제 왕실의 무덤
  • 이인호 기자
  • 승인 2019.07.25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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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송제리 고분, 백제 지배층의 무덤으로 확인…성왕대에 백제 영토로 병합 가능성

 

문헌 해석상 고대 마한(馬韓) 연맹체는 6세기 중엽까지 전라남도 지방에 존재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중국 정사인 <양서>(梁書) 백제전에 백제는 전국에 22개 담로를 두고, 왕자나 왕족을 보내 다스리게 했다고 기록돼 있다. 담로는 백제의 지방 지배의 거점으로, 읍성(邑城)을 의미한다. 22개 담로는 백제 사신이 551년에 양나라에 전한 내용이다.

백제가 660년 멸망할 당시, 지방행정조직은 37군으로 확대된다. 그러면 551년과 660년 사이 100여년의 기간에 지방행정조직이 22개 담로에서 37개 군으로 변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전남대 임영진 교수는 6세기 중엽에 마한이 백제에 병합되고, 마한 땅이 백제의 지방조직으로 편제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즉 병합 이전의 22개 담로를 그대로 군으로 편제하고, 새로 병합한 마한 땅에 15개 담로를 추가 설치했다는 해석이다.

임영진 교수는 고고학적으로 볼 때 영산강 유역과 전북 서남부 지역이 동일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고, 마한의 마지막 영역에서 13~14개 군이 있었다고 해석했다. 이는 통일신라시대에 무주 13개군과도 부합한다. 따라서 지금의 전남과 전북 서남부 지역은 백제 22개 담로에 편성되지 않고, 독자적인 마한 문화권을 형성했다는 얘기다.

임영진 교수에 따르면, 백제 사신이 중국 양나라에 건너간 551년까지 전라남도, 즉 신라의 무주 지역이 백제에 병합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성왕기인 551년 이후에 무주지역(전남)이 백제에 병합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나주 송제리 고분 전경 /문화재청
나주 송제리 고분 전경 /문화재청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전라남도 기념물 제156호인 나주 송제리 고분 발굴조사에서 백제 성왕대의 은제 관식과 허리띠 장식, 청동 잔, 말갖춤, 호박 옥 등이 확인되었다고 발표했다.

성왕은 523~554년 사이에 30년간 재위했으며, 앞서 양서에 기록된 바,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을 중국에 파견한 임금이다. 성황은 무녕왕의 아들로 538년 부여로 천도를 단행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 중국 양나라와 교류, 일본에 불교 전파, 중앙 관제와 지방 통치 조직을 정비하는 등 왕권 중심의 국가 운영체제를 확립했다.

그런데, 나주 송제리 고분에서 성왕이 전라남도로 밀려난 마한 잔류세력을 병합하고 지방행정조직으로 편입했다는 가설을 입증할 유물들이 쏟아졌다.

 

나주 송제리 고분 발굴현장 /문화재청
나주 송제리 고분 발굴현장 /문화재청

 

나주 송제리 고분은 1987년에 도굴된 상태로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이후 2000년에 돌방(石室)에 대한 간단한 실측조사가 한차례 이루어졌는다. 당시 조사에서 돌방의 평면은 사각형에 가깝고, 천장은 활이나 무지개처럼 높고 길게 굽은 궁륭형(穹隆形)’이며, 벽면은 석회가 칠해진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조사에서도 마한 무덤의 특색인 옹관묘의 분포지역에서 특이한 형태의 무덤이 나타나 고고학계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돌방 평면과 유물 출토 상세 현황 /문화재청
돌방 평면과 유물 출토 상세 현황 /문화재청

 

나주문화재연구소는 송제리 고분의 구조와 축조방법을 밝히고, 보존활용 방안 마련을 위해 지난해 11월부터 오는 9월까지 정밀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연구소는 조사 중에 송제리 고분이 고분 규모와 구조, 축조 양식이 새롭고 은제 관식 등 백제 성왕대 왕실 지배층의 복식과 말갖춤 등 영산강유역 고대 정치조직의 실체와 변화상을 규명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돌방 출토 유물들(발걸이, 말 다래 고정구, 관못, 관고리) /문화재청
돌방 출토 유물들(발걸이, 말 다래 고정구, 관못, 관고리) /문화재청

 

먼저, 고분 규모는 지름 20m 내외, 높이 4.5m로 원형의 평면 형태이며, 외곽에 원형의 도랑을 갖추고 있는데 이 내부에서 200여 점의 토기 조각이 출토되었다. 돌방은 기초를 1m 가량 다진 후에 분구(墳丘, 봉분)와 함께 쌓아 만들었다. 돌방은 길이 3m, 너비 2.7m, 높이 2.5m인 사각의 평면인 널방(현실, 玄室)의 가운데에 길이 4.2m인 널길(연도, 羨道)이 달린 구조를 하고 있다. 아울러 인접 지점에서는 기존에는 보고된 적 없는 새로운 고분 1기가 매장시설이 모두 훼손된 상태로 확인되었다.

 

돌방 출토 유물(은제 관식, 은제 허리띠 장식, 은피 관못, 청동 잔) /문화재청
돌방 출토 유물(은제 관식, 은제 허리띠 장식, 은피 관못, 청동 잔) /문화재청

 

돌방 내부에서는 관모장식인 은제 관식이 나왔는데, 장식 모양이 기존에 발견되었던 은화관식(銀花冠飾)’과는 다른 형태이다. ‘관식은 관모에 부착하는 장식으로 백제 지배층 고분에서 주로 나오는 유물이다. 기존 은화관식은 꽃봉오리 모양이 주를 이뤘던 반면, 이번에 나온 관식은 풀잎 모양으로 차이가 있다. 재질(은제품)과 제작기법(좌우 대칭, 은판을 오린 다음 접어 만들기)은 은화관식과 동일하지만, 함께 출토된 유물들을 볼 때 은화관식으로 정형화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웅진기 말에서 사비기 초의 공백을 메워주는 첫 사례로 평가된다.

 

나주 송제리 고분에서 출토된 은제 관식 /문화재청
나주 송제리 고분에서 출토된 은제 관식 /문화재청

 

은제 허리띠 장식은 허리띠 끝장식, 교구(鉸具, 버클), 과판(銙板)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교구는 버섯 모양으로 교침(鉸針)이 없는 형태인데, 백제 웅진~사비기의 과도기적인 모습이다. 과판은 심장 모양으로 연결고리가 일체형으로 만들어졌다. 이 밖에 청동 잔, 호박 옥, 장식칼 부속품은 공주 무령왕릉 출토품과 동일하며, 관못은 못 머리가 둥글고 은으로 감싼 원두정(圓頭釘)으로 주로 백제 고위층의 무덤에서 확인된다.

 

은제 허리띠 장식(교구, 허리띠 끝장식) /문화재청
은제 허리띠 장식(교구, 허리띠 끝장식) /문화재청

 

말갖춤은 발걸이(등자, 鐙子)와 말 다래 고정금구가 출토되었다. 발걸이는 바닥은 평면이고 윗면은 둥근 모양으로 발을 딛는 부분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으며, 그 윗면에는 미끄럼을 방지하는 요철들이 있다. 형태적으로 가장 유사한 유물은 의령 경산리와 진주 옥봉 출토품이 있다. 말 다래 고정금구는 원형 철판 중앙에 교구(鉸具)가 부착되어 있다. 서울 홍련봉 2보루를 비롯하여 합천 옥전과 경주 미추왕릉에서 출토된 바 있다.

 

은제 허리띠 장식(심장모양 과판 세부 모양) /문화재청
은제 허리띠 장식(심장모양 과판 세부 모양) /문화재청

 

발굴팀은 나주 송제리 고분의 유물이 이 무덤의 주인공이 가장 높은 위계의 인물이고 주로 활동한 시점이 백제 성왕 대였다고 추정했다. 이 무덤은 영산강유역 마한의 중심지라 추정되는 나주 복암리나 반남지역과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호박제 관옥 /문화재청
호박제 관옥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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