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산성, 산을 용처럼 감아 올라간 석성
삼년산성, 산을 용처럼 감아 올라간 석성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7.27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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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백제 사이에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한번도 함락되지 않은 철옹성

 

충청북도 보은에 삼년산성이 있다. 그곳에 올라가 보면, 그 아래에 보은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이 정도의 성을 쌓으려면, 저 정도 넓은 벌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한여름에 삼년산성을 방문했는데, 들판에는 곡식이 익고 있었다. 농사를 짓기 적합했고, 적당한 인구도 있었을 것이다.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서 이곳을 반드시 지켜야 할 이유가 바로 저 들판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국사기>에 삼년산성을 쌓는 얘기가 비교적 자세히 실려 있다. 삼국사기는 대체로 축성에 관해 간단하게 언급했는데, 삼년산성에 관해서만은 동원 인원과 축성기간, 성 이름을 붙인 이유에 대해 기술했다. 그만큼 축성에 신경을 썼다는 얘기다.

자비 마립간 13(470),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쌓았다. 삼년은 공사를 시작한지 3년 만에 마쳤기에 붙인 이름이다.

소지 마립간 8(486) 봄 정월, 이찬 실죽(實竹)을 장군으로 삼았다. 일선군의 장정 3천 명을 징발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과 굴산성(屈山城) 두 성을 고쳐 쌓았다.

 

공중에서 본 삼년산성 /보은군청
공중에서 본 삼년산성 /보은군청

 

신라는 자비, 소지왕 때 충청북도 지역에 새 영토를 확보했고, 이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삼년에 걸쳐 성을 쌓은 것이다. 소지왕때에 성을 보수했는데, 현지인으로 모자라, 현재 경북 구미에 위치한 일선군 젊은이 3,000명을 동원했다. 굴산성은 옥천의 이성산성으로 비정된다. 신라가 충북지역 방어를 위해 소백산맥 동쪽의 경북 지역 인력을 대거 동원했음을 보여준다.

 

삼년산성 /문화재청
삼년산성 /문화재청

 

지도를 놓고 보면, 보은은 경북 상주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대전, 공주로 가는 일직선 상에 놓여 있다. 백제에게는 위협적인 위치였다.

백제는 이 성을 되찾으려 무던히도 애썼을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삼년산성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진흥왕 15(554)에 백제 성왕이 관산성(管山城)에 쳐들어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했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어우러져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서 크게 이겼다. 좌평(佐平) 네 명과 병사 296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돌아간 말이 한 마리도 없었다.

 

백제 성왕이 관산성을 공격해 신라가 수세에 몰렸지만, 삼년산성에 주둔하던 신라군이 백제군을 측면 공격해 백제왕과 대신, 3만명에 가까운 백제군을 무찔렀다는 내용이다. 삼년산성에 상당수의 신라군이 주둔했다는 증거다.

지정학적인 중요성 때문에 신라가 이 성의 축성, 개축에 무척 신경을 썼고, 그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것이다. 후에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킬 때에도 이 성의 주둔군이 주력으로 활동했을 것이다.

신라 태종 무열왕(김춘추)은 당나라 사신 왕문도를 삼년산성에서 맞이했고, 822(신라 헌덕왕 14) 신라 웅천주(공주)의 도독 김헌창이 삼년산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견훤과 대결을 벌일 때 삼년산성 을 공격하다가 실패했다.

 

삼년산성 /문화재청
삼년산성 /문화재청

 

삼년산성은 <세종실록> 지리지에 오항산성(烏項山城)으로, <동국여지승람><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년산성은 470(신라 자비왕 13)에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석성이다. 적이 226,866, 둘레가 1,680m이다. 자연적인 지세를 최대한 활했으며, 능선을 따라 마치 용이 산허리를 감아 꾸불꾸불 기어 올라가는 듯한 모습으로 쌓았다.

삼년산성은 오정산의 능선을 따라 문지(門址) 4개소, 옹성(甕城) 7개소, 우물터 5개소와 수구지(水口址)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성벽이 골짜기를 싸고 있는 전형적인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삼년산성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옛적에 힘이 센 남매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오누이는 서로 자기가 힘이 세다고 우겼다. 어머니가 남매에게 목숨을 건 시합을 시켰다. 오빠는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송아지를 몰고 서울에 다녀오고, 동생은 산의 능선을 따라 성을 쌓게 하다. 둘은 시합을 시작한다.

여동생이 성을 거의 완성해 가는데 오빠기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성문만 달면 여동생은 성을 완성해 승리할 시기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애가 타서 팥죽을 끓여 딸에게 팥죽을 먹고 문을 달으라 했다. 딸이 팥죽을 먹는 새에 오빠가 돌아왔다. 결국 시합에서 진 여동생은 오빠에게 목숨을 내주었다. 이 여동생이 쌓던 성이 삼년산성이라고 한다.“

 

삼년산성은 한번도 함락되지 않은 철옹성이었다고 한다. 사서에 삼년산성이 함락되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조선시대까지의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이 성이 오랫동안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년산성 /보은군
삼년산성 /보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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