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지방제도⑥…무주(武州), 일본 고대문화의 원류
신라의 지방제도⑥…무주(武州), 일본 고대문화의 원류
  • 아틀라스
  • 승인 2019.03.22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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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까지 백제에 병합되지 않고 마한으로 남아…마한 멸망후 일본으로 건너가

 

우리 고대사의 미스터리중 하나는 통일 신라 이전에 정사인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에 호남, 특히 전라남도 지역에 대한 기록이 극히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삼국의 전투가 백제 북쪽과 동쪽의 접경지대에서 주로 이뤄졌기 때문일까.

다만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통일신라 지방 9주 가운데 무주(武州)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지리지 설명은 무주가 원래 백제의 땅이라고 설명한다. 신문왕 6(686)에 무진주(武珍州)로 만들었고 경덕왕이 무주로 개칭했는데, 치소는 지금의 광주(光州). 지금의 전라남도와 광주시를 합한 행정구역과 일치한다.

무주는 소경(小京)을 두지 않았고, 15개 군 43개 현으로 구성되어 있고, 치소의 직할현은 3개 현이다. 군사상 배치를 위해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과 만보당(萬步幢)을 두었다고 한다.

 

그러면 전라남도 일대가 왜 삼국사기 본기에 조금이라도 등장하지 않았을까. 두가지 학설이 있다. 첫째는 마한의 잔존세력이 전남지역에서 6세기까지 버티다 백제에 복속되었다는 설이다. 또다른 학설은 한반도 왜의 근거지였다는 설이다.

 

그림=김인영
그림=김인영

 

 

마한설

전남대 임영진 교수(인류학)는 호남 문화의 원류를 마한으로보고, 마한이 6세기까지 백제에 병합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임 교수는 중국 정사의 하나인 양서(梁書) 백제전의 내용을 분석하며, 서기 551년까지 전라남도, 즉 신라의 무주 지역이 백제에 병합되지 않고, 마한으로 남았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의 해석을 인용해 본다.

양서 백제전에 백제는 전국에 22개 담로(擔魯)를 두고, 왕자나 왕족을 보내 다스리게 했다고 기록돼 있다. 담로는 백제의 지방 지배의 거점으로, 읍성(邑城)을 의미한다. 22개 담로는 백제 사신이 551년에 양나라에 전한 내용이다. 하지만 백제가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당시, 지방행정조직은 37군으로 확대된다.

그러면 100여년 사이에 변한 22개 담로와 37개 군의 차이는 무엇일까.

임영진 교수는 6세기 중엽에 마한이 백제에 병합되고, 마한 땅이 백제의 지방조직으로 편제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즉 병합 이전의 22개 담로를 그대로 군으로 편제하고, 새로 병합한 마한 땅에 15개 담로를 추가 설치했다는 해석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후 전국을 95소경으로 재편하고, 백제 지역엔 웅주, 전주, 무주 등 3개 지역을 설치했다.

웅주는 지금 충청도와 영역이 비슷하고, 전주는 전라북도, 무주는 전라남도와 대체로 겹쳐진다. 통일신라는 웅주에 13개군, 전주에 10개군, 무주에 15개군을 설치해 백제지역에 모두 36개의 군을 두는데, 백제 멸망시기의 38개 군과 1개군의 차이가 난다. 신라는 백제의 지방조직을 크게 바꾸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중 웅주와 전주의 군을 합치면 23개군으로, ‘양서의 백제 22담로와 대체로 비슷한 수치를 구성한다.

백제 사신이 중국 양나라에 건너간 551년까지 전라남도, 즉 신라의 무주 지역이 백제에 병합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 마한의 잔존세력이 적어도 551년까지 전라남도 지역에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고, 이 지역이 그 후 백제에 복속되어 신라에 멸망할 때까지의 기간은 고작해야 100년 정도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임영진 교수는 고고학적으로 볼 때 영산강 유역과 전북 서남부 지역이 동일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고, 전남 서남부에 1~2개 군이 있었다고 가정할 때 마한의 마지막 영역에서 13~14개 군이 있었다고 해석했다. 이는 통일신라시대에 무주 15개군과도 부합한다. 따라서 지금의 전남과 전북 서남부 지역은 백제 22개 담로에 편성되지 않고, 독자적인 마한 문화권을 형성했다는 얘기다.

 

임영진 교수는 기원전 300년 경에 일본 규슈 북부에서 일어난 야요이 문화가 마한에서 전래됐다고 주장했다. 야요이 문화의 핵심 요소인 청동기, 벼농사, 주거지, 지석묘, 석기, 토기등이 모두 마한에서 건너갔다는 것이다. 영산강 유역에서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옹관 문화가 6세기초까지 발전했다는 사실도 이 지역이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했다는 증거다.

임교수는 고대 일본의 원류가 백제문화라는 지금까지의 견해와 달리, 백제에 앞서 마한이 일본 문화의 원류를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백제는 일본의 대화(大和)정권이 등장한 5세기 후반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그 이전엔 일본 문화가 마한과 관계했다는 것이다.

임교수는 경기·충청지역에서 출발한 백제가 남하하면서 마한은 남쪽으로 밀려났고, 백제에 쫓겨난 마한인들은 남쪽의 마한이나,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해석했다. 백제의 마한 병합이 3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임교수는 3세기 후반, 4세기 후반, 6세기 후반 세 차례에 걸쳐 양이부호, 조족문토기, 분주토기등 마한의 토기들이 일본에 파급된 것은 마한의 남하과정에서 이주민의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간 증거라고 설명했다.

영산강 유역의 전남지역은 마한의 마지막 영역이었다. 이 곳은 6세기초까지 백제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면서 중국문화를 수용하고, 고대 일본에 문화를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영산강 유역이 한중일 해상 교류의 삼각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정학적 이점에 힙입은바 크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기반으로 동북아 해상교육권을 차지한 것도 호남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것이다.

나주시 반남 고분군, 복임리 고분군, 영암군 시종 고분군, 함평군 예덕리 고분군등에서는 5세기 후반~6세기 초의 일본식 장고형 고분(전방후원분 고분)들이 발굴되고 있다. 이 지역이 백제와는 다른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동시에 일본 고대문화의 원류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는 게 임 교수의 지론이다.

 

그림=김인영
그림=김인영

 

 

한반도 왜 근거지설

중국 서진(西晉)시대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보면, 의문의 기사가 나온다. 몇구절을 보자.

1) ()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다. 동서는 바다로 경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경계를 접하니(南與倭接), 면적이 사방을 4천리쯤 된다. 세 종족이 있는데 그 첫째는 마한이고, 둘째는 진한이며, 셋째가 변한이다.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2) 지금 진한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편평하다. ()에 인접한 곳의 남녀들(男女近倭) 또한 문신을 한다.

3) 변진의 독로국(瀆盧國)은 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其瀆盧國與倭接界)

 

삼국지 동이전은 3세기 후반에 동이족 곳곳을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기행담을 모은 사서로, 12세기에 사료를 모아 쓴 삼국사기보다 사실에 근접해 서술했을 것이다. 당대의 기록이 1천년 후의 기록보다 정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삼국지 동이전에서 한()의 남쪽에 왜와 접()해 있고, 진한과 왜가 가까이() 있으며, 독로국은 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接界)고 하질 않는가. 그렇다면 3세기에 한반도에 왜()가 존재했다는 얘기가 된다.

삼국지 동이전 왜조에는 왜인들이 문신을 하는데, 나라마다 각기 다르다는 기사가 있다. 왜와 가까이 있는 진한의 남녀가 문신을 따라했다는 기사에 설득력이 있다.

상식적으로 왜는 일본 열도에 있어야 한다. 삼국지 동이전 왜조에서 왜인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고, 산과 섬을 의지해 국읍을 이루고 있다고 해, 일본 열도가 왜인의 본거지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동이전 한조에서 말하는 왜는 일본 열도의 왜와 별도로 존재했다는 뜻이다.

삼국지 동이전의 기사를 토대로 하면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왜의 위치가 그려진다.

마한은 서쪽에 있다(馬韓在西)고 했고,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辰韓在馬韓之東)고 했다. 마한은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일부 지역이고, 변한은 부산 경남 지역이며, 진한은 경상북도 지역과 대체로 겹친다.

그렇다면 한(, 즉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과 남쪽으로 접하고, 변한의 한 국가인 독로국과 접하며, 진한과 가까운 곳은 바로 전라남도 지역이다. 삼국지 동이전은 전라남도 일대에 왜가 존재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삼국지 동이전과는 별도로 국내 사학계에서도 영산강 유역에 일본식 무덤이 대량으로 발굴되고 있다는 조사보고서가 나와 파문을 일으켰다.

1972년 고려대박물관 주임으로 근무하던 윤세영이 충남 부여 규암면 합송리의 구릉 네곳을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한국에도 일본식 무덤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있다는 내용의 기고문을 실었다.

전방후원분은 4~6세기 일본에서 성행했던 무덤양식으로, 평면도 상으로 보면 원형(圓形)과 방형(方形)의 분구가 붙어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열쇠구멍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영어로는 ‘keyhole-shaped tomb’이라고 번역하며, 국내에서는 장고 같이 생겼다고 해서 장고형 고분이라고 한다.

윤세영의 주장으로 국내 고고학계는 벌집 쑤신 듯 시끄러웠고, 당시 박정희 정부는 전문가들을 불러 문화재위원회를 개최했다. 위원회의 반응은 냉랭했다고 한다. (‘고고학자 조유전의 한국사 미스터리참조)

또다시 일본식 무덤 논쟁의 불을 지핀 사람은 1983년 강인구 영남대 교수였다. 강인구 교수는 경남 고성과 함안, 경북 고령, 전남의 나주, 영암, 무안, 함평의 고분들이 장고분이라고 주장했다. 한국고고학계는 외형만 전방후원분일뿐, 실상은 자연구릉이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일본 학계에서 뜨거운 관심을 일으켰다고 한다.

논쟁의 대상이 됐던 고분 중에서 부여와 고성의 고분은 나중에 장고형 고분이 아니라는 학계의 결론이 났다.

1980년대 후반엔 전남 함평 일대, 영암 일대, 광주 일대등 영산강 유역에서 장고형 고분이 연이어 발견됐다. 한국고고학계에서도 더 이상 장고형고분, 즉 일본식 정방후원분이 한국에 다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영산강 유역에서 10여기 이상의 장고형 고분이 발견됐다. 이제 더 이상 일본식 무덤이니, 단순한 자연구릉이니 하는 논쟁도 사라지고, 그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가로 초점이 넘어갔다.

 

전라도 일대 전방후원분에 대한 조사는 일제때부터 시작됐다.

전라남도 나주군 반남면 자미산 일대에 30여기의 고분군이 산재해 있다. 반남고분군이다. 그곳의 고분이 겉모양에서 일본식과 비슷하다고 해서 일본인들이 관심을 갖고 조사에 착수했다.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는 1917~1918년 고고학자들을 동원해 반남고분군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1차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이렇게 서술한다.

반남면 자미산 주위 신촌리, 덕산리, 대안리 대지 위에 수십기의 고분이 산재하고 있다. 겉모양은 원형 또는 방대형(方臺形)이며, 한 봉토 내에 1개 또는 여러개의 도제옹관을 간직하고 있다. (중략) 이들 고분은 그 장법(葬法)과 유물 등으로 미루어 아마 왜인(倭人)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일본 조사단은 1차 조사후 오랜 기간 동인 정밀 조사를 미루었는데, 그 사이에 도굴이 발생해 나중에 2차 조사를 할 때 부장품을 거의 찾지 못했다고 한다. 국사학자 이덕일은 이희근과 함께 쓴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에서 일본이 아마 왜인일 가능성만 제기하고 정밀 조사를 미루어 도굴을 조장했는데, 그 이유는 임나본부설을 뒤집는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사학자 이덕일은 자신의 저술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 안정복의 동사강목, 당서 등의 지리지를 종합해 왜와 나주고분의 상관관계를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등 5도호부와 대방주(對方州)를 설치했는데, 대방주가 과거 왜의 세력이 설치한 주()였다. 대방주의 중심현은 나주 회진현이며, 반나현이 지금의 반남현이다. 따라서 반남고분군의 주인공이 바로 한반도 왜의 지배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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