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두차례 소빙기로 내우외한
명나라, 두차례 소빙기로 내우외한
  • 이인호 기자
  • 승인 2019.08.01 19: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추운 날씨에 장기간 가뭄이 겹치며 민란발생, 여진족 남하 등으로 명나라 멸망

 

중국 명()나라 시대(1368~1644)에는 기후가 내내 춥고 건조했다.

이 중에도 중기 1458~1552년 사이, 말기 1600~1643년 사이 두 기간은 더 추웠다. 대만 기후역사학자 유소민(劉昭民)은 명대를 중국역사상 제4차 한랭기로 규정하면서도 1458~1552년을 제4차 소빙기, 1600~1643년를 제5차 소빙기로 구분했다.

이 구분에 따라 중국역사를 살펴보면, 4소빙기는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시대였고, 5소빙기는 이자성·장헌충의 난, 만주의 여진족()의 남진으로 명나라가 멸망하는 시기다.

명대의 한랭기는 유럽인들이 개척한 대항해시대에 해당하므로 유럽의 기후와도 비교된다. 유럽에서도 이 시기에 소빙기를 맞은 기록들이 많다. 이때 한랭한 기후는 유럽인들으로 하여금 대대적으로 아메리카로 이민을 떠나게 한 이유가 되었다. 이 소빙기는 북반구 전역에서 나타난 것으로 파악된다.

유소민에 따르면, 명조에 강우량이 진()~남북조 시대 이후 가장 적었고, 가뭄에 의한 한재(旱災)도 가장 많이 발생했다.

역사 기록으로도, 중국 회하(淮河)가 얼어붙었다는 기록이 많다. 오늘날 이 강은 겨울에 잘 얼지 않는다. “겨울에 동해(황해)가 얼었다거나, “눈이 많이 쌓여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은 자가 많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광동, 광서, 호남, 강서 등 중국 남부에 눈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 이 지역에는 겨울에도 눈을 구경하지 못한다. 양쯔강의 호수 동정호가 얼어붙어 말이 다녔다는데, 명나라 시기에 얼마나 추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명나라 말기 농민반란 /위키피디아
명나라 말기 농민반란 /위키피디아

 

명조의 기후변동을 시기별로 보자.

 

전기 (1368~1457)

한랭기후는 원()대에 시작되어 명대에 이어졌다. 중국 남부 국경지대인 운남성 곤명(昆明)에도 눈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높이가 7척이나 되었다고 한다. 겨울에도 내내 봄날씨인 이 곳에 2m 이상 눈이 내렸다면 당시 기후가 얼마나 추웠는지를 알게 해준다.

절강성, 강서성 등 남부 지역에도 눈이 내린 기록들이 많다. 그것도 6~7척이나 되었다고 한다.

 

중국 역대 평균기온 변화 /竺可禎文集1979 科學出版社
중국 역대 평균기온 변화 /竺可禎文集1979 科學出版社

 

중기 (1458~1552) - 4차 소빙기

양쯔강의 여러 호수들이 겨울에 꽁꽁 얼어 붙고, 여름에도 추웠다는 기사가 많다.

운남성 지방기록인 운남통지에 따르면, 1498년 여름(6)에 임안(臨安)에 바람이 심하게 불고, 몹시추었다. 동사한 사람이 많았고, 참새와 같은 작은 새들도 대부분 얼어죽었다고 했다.

과학자들은 명대 중기의 연평군 기온이 오늘날보다 1.5°C 낮았을 것으로 평가한다.

가뭄도 빈발했다. 1458년에 한양(漢陽)의 한천(漢川)에 큰 가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 먹었다고 했으며, 1465~1474년 사이 10년간 연속 가뭄이 들었다. 가뭄으로 흉작이 들어 사람들이 굶주려 죽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1485년에도 신현(莘顯) 등지에서 가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 먹었다고 한다.

흉년이 들어 먹을게 없는데다 춥기까지 하다면 인간의 생존은 한계에 이르게 된다. 이럴 때 인간사회는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의 계급갈등이 벌어진다. 소수의 가진자들은 지위를 이용해 착취로 생존하려 하고, 없는 자는 살려고 저항하게 된다. 세금을 낼 양곡이 없어 유민이 되거나 민란이 발생하게 된다. 14867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 쌀 한말이 1만전으로 뛰고, 죽은 자가 길에 깔렸다고 했다.

1488~1505년 사이에는 14년 동안 가물었고, 1506~1521년 사이에도 가뭄이 이어졌다. 햇수로 30년 이상 가뭄이 지속되면서 도적떼가 발생하고,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후기 전반기 (1557~1599)

여름엔 춥고, 겨울에 비교적 따듯한 시기가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세상이 잠시 안정되는 듯했다.

 

1638년 가뭄 피해지역 /近500年我國特大旱災的研究
1638년 가뭄 피해지역 /近500年我國特大旱災的研究

 

말기 (1600~1643) 4차 소빙기

이 시기는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도 소빙기가 찾아온 시기다.

운남성에 눈이 내렸고, 공동성에 대낮에 구슬같은 눈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사천성 기록에 1623년 여름(5) 눈이 많이 내려 1척 정도 쌓였으며, 나뭇가지와 벼 줄가기 모두 뿌러졌다고 했다.

이 시기의 평균 기언은 오늘날보다 1.5~2°C 낮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혹한에 가뭄가지 겹쳤다. 1601년 직예성(베이징 인근) 근처에 반년간 비가 오지 않았다고 한다. 1622~1629년 사이 8년간 내내 가물고 비가 오자않았다. 1633년에는 서안에 가뭄가 기근이 들어 굶어죽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었고, 사람들이 서로 잡아 먹었다고 한다.

1622년 백련교도의 난이 발생하고, 1627년 이자성과 장헌충의 봉기가 일어난 것도 날씨가 초래한 결과였다.

이자성의 농민군은 1644년 명조의 숨통을 끊었고, 이어 명나라 장수 오삼계(吳三桂)가 청나라군에 산해관(山海關)을 열어줌으로써 중국의 천하가 뒤바뀌게 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