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지방제도⑦…상주(尙州), 초기 정복지
신라의 지방제도⑦…상주(尙州), 초기 정복지
  • 아틀라스
  • 승인 2019.03.23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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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출발한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지역

 

충청북도 보은군에 삼년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신라 자비왕 13(470)에 쌓았고, 소지왕 8(486)에 고쳐 세운 돌성(石城)이다.

이 산성이 위치한 충북 보은군은 통일신라 9주 가운데 무슨 주일까. 상주(尙州).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가 백제와 치열하게 싸우기 위해 쌓은 성인데, 통일 후에도 신라의 영역인 상주에 포함시켰다.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 /문화재청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 /문화재청

 

 

상주는 사벌주(沙伐州)라고도 했는데, 치소는 지금의 경북 상주이고, 10개 군 31개 현으로 고성되어 있다. 직할현은 3개다. 영역은 지금의 상주시, 예천군, 안동시, 의성군, 구미시, 김천시등 경북 내륙지방과 충북 영동군, 옥천군, 보은군이 포함되어 있다.

주의 치소인 상주는 진한의 사벌국(沙伐國)이었는데 신라 첨해 이사금(재위 247~261)때 석우로가 이 소국을 정복하고 주를 설치, 현지 군사령관 격인 군주(軍主)를 파견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신라가 이 곳에 주를 설치하고 제도화한 것은 지증왕 때의 일로 본다.

557(진흥왕 18)에 사벌주는 폐지되고, 감문주(甘文州)가 설치되었으며, 다시 일선주(一善州)로 옮겨졌다. 685(신문왕 5)에 전국을 9주로 정비할 때 일선주였으나 687년에 사벌주로 바궜다. 757(경덕왕 16)에 전국의 행정구역 명칭을 중국식으로 고치면서 상주로 개칭했다.

 

그림=김인영
그림=김인영

 

 

경북 동쪽 경주분지에서 부족국가로 출발한 신라가 북으로 함경남도 함흥 일대, 동으로 울릉도, 서로는 한강유역, 남으로 경남 일대의 가야 연맹체를 복속시켜며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신라의 영토 확장은 3단계로 이뤄진다.

1단계는 신라가 건국초기에 경주 중심으로 동해안 일대를 확보하는 과정이고, 2단계는 2세기 후반부터 3세기에 걸쳐 경북 내륙을 복속시켰다. 3단계로 6세기 지증 법흥 진흥 3대 임금에 걸쳐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시켜 한강유역에 이르러, 고구려 백제와 국경을 맞대고 한판 승부를 겨루게 된다.

상주는 신라의 영토확장 2단계 과정에서 만들어진 주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신라가 영남 내륙지방으로 진출하는 기간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아달라 이사금 시기엔 계립령(156)과 죽령(158)을 열어 그 지역에 감물(甘勿)과 마산(馬山) 두 현을 설치했다. 신라는 소백산맥을 넘는 길을 연 후에 백제와의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이에 앞서 경주와 소백산맥 고개를 연결하는 전투로 주변에 있는 소국을 병탄한다.

벌휴 2(185) 소문국(召文國) 정벌.

조분 2(231) 감문국(甘文國) 토벌.

조분 7(236) 골벌국(骨伐國)의 왕 아음부(阿音夫)가 항복.

조분 13(242) 고타군(古陁郡)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첨해 16(245) 사벌국(沙伐國) 토벌.

유례 14(297) 이서고국(伊西古國)이 금성(金城)을 공격해왔는데,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군대가 도와 적을 패퇴시켰다. (이때 이서고국 합병 가능성)

 

그림=김인영
그림=김인영

 

 

소문국은 의성, 감문국은 김천, 골벌국은 영천, 고타군은 안동, 사량벌국은 상주, 이서()국은 청도로 모두 경상북도에 위치한다. 백제와의 본격적인 전쟁을 앞두고 소백산맥 이남의 부족국가를 차례차례 정벌하거나 배신 가능성에 싹을 자르는 과정이다.

사량벌국의 경우 오래전부터 신라의 속국이었지만, 배신해 백제의 편에 붙어 버렸기 때문에 석우로(昔于老) 장군을 파견해 정벌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사량벌국 이외의 나라를 정벌한 뚜렷한 이유가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적혀 있지 않다. 백제 전쟁을 앞두고 소백산맥 이남의 경북 지역을 내지화하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 반발한 이서고국이 수도 금성까지 쳐들어오는데, 미추왕을 지탱했던 김씨 세력들이 군을 이끌고 가서 석씨왕조를 도와 평정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사서에 기록돼 있다. 이서국도 신라의 제압으로 멸망했다.

물론 사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소문, 감문, 골벌, 사량벌국 이외에도 경북지역에서 독자적인 왕국을 형성했던 나라들이 거의 모두 신라에 합병되고, 4세기 이전에 신라영토가 소백산맥을 경계선으로 확대됐다.

 

충북 옥천, 보은, 영동이 상주에 포함된 것은 신라가 백제와 싸워 빼앗은 곳이다. 이 곳을 둘러싼 전투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진흥왕때 도설성 금현성 전투와 관산성 전투다.

 

그림=김인영
그림=김인영

 

 

< 도살성, 금현성 전투 >

 

백제는 온조왕이 한강 유역에 나라를 세운 뒤 고구려와 각축전을 벌였지만, 475년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전사했다. 한강유역을 뺏긴 백제 동성왕은 신라 이찬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임으로써, 고구려에 대항하는 백제-신라(羅濟) 동맹이 맺어진다. 이른바 나제(羅濟)동맹이다.

이 동맹은 그 이후에도 이어져, 성왕이 독산성 전투(548)에서 신라군을 끌어들여 승리함으로써 한강유역을 다시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나제동맹은 여기서 끝났다. 혹자는 나제동맹을 깬 나라는 신라이고, 그 주인공이 병부령에 올라 군권을 장악한 이사부 장군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 성왕은 신라의 금관국 합병 이후 대가야와 잔여 소국을 사비성을 불러모아 가야 재건을 외치며 신라와의 대항을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산라의 팽창에 백제가 두려움을 갖게 되면서 나제동맹이 금이 가기 시작했고, 도살성·금현성 전투에 이어 관산성 전투를 거치면서 나제동맹은 깨지게 된다.

 

적과의 동침은 깨져가고, 나제동맹에 균열이 생겼다. 독산성 전투 2년후(550) 도살성과 금현성 전투에서 백제와 고구려가 혼전을 펼치며 두 나라의 군사들의 기력이 쇠해있는 틈을 타서 신라 이사부 장군이 두 성을 빼앗았다.

도살성·금현성 전투는 삼국사기에서 신라본기, 백제본기, 고구려본기, 열전 이사부조 등 4곳에서 나온다. 신라, 백제, 고구려의 삼국의 균형이 깨지는 중요한 대목이 도살성, 금현성 전투이고, 이 전투의 승자는 이사부 장군이었다.

진흥왕 11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두 나라의 병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해 병사를 내어 공격하게 했다.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병사 1천명을 두어 지키게 했다. 신라본기

양원왕 6년 정월, 백제가 침입해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공격했다. 신라가 이 기회를 틈타 두 성을 빼앗았다. 고구려 본기

성왕 28년 정월, 임금이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게 해 빼앗았다. 3, 고구려 병사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했다. 백제본기

진흥왕 재위 11년인 태보(太寶) 원년에 백제는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서 이사부에게 군사를 출동시킬 것을 명했다. 이사부는 그들을 쳐서 두 성을 빼앗고는 성을 증축하고 군사들을 남겨 수비하게 했다. 이때 고구려가 병력을 보내 금현성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자 이사부가 이들을 추격해 크게 승리했다. 열전이사부조

 

사료를 해석하면 백제가 충청북도 한강 중류를 장악하기 위해 우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 사비성과 도살성 중간에 있는 금현성을 공격해 도살성을 고립시키고, 한강 중류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백제의 대혈투가 벌어진다. 이사부는 어부지리(漁父之利)의 전법을 썼다. 두 나라가 한치의 양보없이 싸우다 지칠 무렵 군대를 동원해 두 성을 차지하고, 한강 중류를 차지했다. 신라가 드디어 죽령을 넘어 한강 유역에 발을 걸쳐 놓은 것이다.

 

도살성과 금현성이 어디인지에 대해, 역사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학계에서는 도살성의 위치에 대해서 충북 음성의 백마령 충남 천안설 충북 증평 이성산성과 진천 두타산성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로 나눠져 있다. 후대 선덕여왕 때 김유신이 도살성 아래 진을 치고 물리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금현성은 충북 진천군 서쪽이라는 설 충남 연기군 진동면과 전의면 경계라는 설 등이 있다.

도살성과 금현성의 위치에 대해 삼국사기를 쓴 고려 중엽에도 정확하게 비정하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신라의 입장에서는 두 성이 모두 소백산 너머에 있고, 도살성이 금현성보다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남한강 수운을 지키는 길목이라는 사실이다.

이사부가 도살성, 금현성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신라는 소백산맥을 넘어, 충청북도의 남한강 중류를 장악하게 됐다. 남한강 수운은 육로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대량의 물자를 수송하는 교통로 역할을 했다. 태백산맥 서쪽과 소백산맥 북쪽에서 생산된 농산물, 목재등 임산물이 물길을 따라 이동했고, 이 강을 끼고 있는 평창, 단양, 충주, 여주, 양평등지엔 오래전부터 대규모 장이 열렸다. 신라로선 한강유역을 공략할 교두보를 확보한 셈이다.

 

그림=김인영
그림=김인영

 

 

< 관산성 전투 >

 

서기 554년에 벌어진 관산성 전투는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깨는 결정적 계기가 된 전투였다. 백제와 왜, 대가야의 연합군과 신라 사이에 벌어진 혈투에서 백제는 임금(성왕)과 대신(좌평) 네명은 물론 3만명에 가까운 병사가 몰살당하는 패배를 당했다. 대가야도 출전해 힘을 소진해 8년후 이사부에 의해 망국의 운명을 겪게 된다. 신라는 이 전투를 통해 백제를 이길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고, 훗날 통일의 길을 준비하게 된다.

관산성 전투로 신라와 백제의 동맹, 즉 나제(羅濟)동맹은 완전하게 붕괴된다. 아울러 이 전투를 계기로 신라, 백제, 고구려는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혼전의 상태에 돌입한다.

관산성(충북 옥천) 전투에 대해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세곳에서 기록함으로써 이 전투의 중요성을 각인시켰다. 일본서기에도 관산성 전투가 나온다.

진흥왕 157, 백제 왕 명농(明穠, 성왕)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에 쳐들어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했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어우러져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해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서 크게 이겼다. 좌평(佐平) 네 명과 병사 296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돌아간 말이 한 마리도 없었다. 신라본기

성왕 32, 가을 7, 임금이 신라를 습격하고자 몸소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혼전 중에 임금이 병사들에게 살해됐다. 시호를 성()이라 했다. 백제본기

할아버지인 무력(武力)은 신주도(新州道) 행군총관이었는데, 일찍이 병사를 거느리고 나가 백제왕과 그 장수 4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목을 벤 일이 있었다. 열전김유신편

 

 

전투에 앞서 백제와 대가야는 왜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관산성 전투 한해 전인 흠명(欽命) 14년 정월 백제는 수차례에 걸쳐 왜에 사신을 보내 신라와 박국(狛國, 고구려)이 공모해, 깊이 위험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왜에 군대파병을 요구했다.

553년 겨울에 백제 태자 부여창(夫餘昌)은 나라 안의 군사 전부를 일으켜 고구려의 백합야(百合野)를 공격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백합야(百合野)는 황해도 황주로 고구려 수도인 평양에 근접한 지역이다. 부여창은 백제의 총군사력을 동원해 고구려에 빼앗긴 한수 이북의 실지를 회복한다.

다음 목표는 신라였다. 5541월 왜는 구원군 1,000 , 100, 40척을 보낸다고 약속했다. 왜의 지원군은 그해 5월에 백제를 향해 떠났다. 대가야와 아직 신라에 복속하지 않은 가야 소국들도 백제에 지원군을 보내기로 했다.

태자 부여창은 왜의 지원군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성급하게 신라를 공격하러 갔다. 부여창의 휘하에는 한해 전에 고구려를 공격하던 군대가 그대로 집결해 있었다. 즉 백제에서 동원할수 있는 거의 모든 병력을 부여창이 지휘했던 것이다. 죽은 수가 3만명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이를 입증한다.

 

관산성 전투는 3단계로 전개된다. 부여창의 선제 공격으로 백제의 승리 신라 신주(新州)군주인 김무력과 삼년산성 병력 투입 성왕 전사와 백제 연합군의 괴멸의 순서다.

관산성은 신라로선 백제를 압박하는 교두보이지만, 역으로 백제에겐 급소에 해당하는 곳이다. 충북 옥천은 지금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곳으로, 추풍령을 넘으면, 김천, 구미, 대구를 거쳐 경주로 공격할수 있는 지름길이다. 옥천은 또 금강수계인 대청호 상류에 있어 신라로선 백제 중심지인 공주와 부여를 공격하기 유리한 지점이다. 고대 전쟁에서 강의 상류를 점령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류에서 상류로 군대나 물자를 옮기기는 힘들지만, 상류에서 하류로는 이동이 수월하다. 장강(長江)의 상류에 있던 진()나라가 초()를 몰락시킨 것도 수운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백제로선 관산성을 장악해야 신라의 공격을 막고,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에 압박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부여창이 황해도에 있던 대군을 이끌고 남쪽의 관산성으로 향한 것은 옥천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거리상으로 가까운 대가야(경북 고령)의 지원군이 도달하기 가까운 곳이다. 왜군도 약속대로 금강을 따라 북상하면 관산성에 이르게 된다.

 

초전은 백제의 승리. 부여창은 기습 공격으로, 관산성의 신라군을 깨뜨렸다.

일격을 당한 진흥왕은 사벌주(김천)에 있는 신라군을 동원해 관산성을 지원하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소백산 너머에 있는 신라의 주력군이 관산성을 지원하기에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대신에 새로 확장한 신주(新州)의 군대와 소백산맥의 거점인 삼년산성(충북 보은)의 병력을 동원했다. 이 병력 운용에 관한 아이디어는 경주에 머물고 있는 이사부의 머리에서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은 이사부등 대신들의 뜻에 따라 신주 군주인 김무력과 삼년산성의 장수 도도(都刀)에게 병력 이동을 명령한다.

이때 백제 성왕이 태자를 마중하러 나가다가 변을 당했다. 일본서기에 성왕 전사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나온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경주 김씨인 김부식은 관산성 전투에서 패자인 백제의 기록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하지만 백제와 연대관계를 맺고 있는 왜의 사서는 백제왕 전사에 관한 기록을 슬프고도 장황하게 서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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