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단 사건, 기상재해로 발생한 농민 운동
의화단 사건, 기상재해로 발생한 농민 운동
  • 이인호 기자
  • 승인 2019.08.02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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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해, 가뭄, 충해, 전염병 등이 겹치면서 농민들, 서양인에 불만 표출

 

20세기로 넘어가기 직전, 중국에서는 의화단(義和團) 사건이 발생한다. 1898년에서 1900년 사이에 걸쳐 산동(山東), 직예(直隷), 하남(河南), 산서(山西)성 등에서 일어난 농민운동으로, 시위대는 19006~8월 사이에 베이징의 각국 공사관 구역을 포위 공격해 국제적인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의화단은 백련교(白蓮敎) 계통의 무술수련집단으로 농민들의 자위조직 중 하나였는데, 이들은 청나라를 지지하며 서양을 몰아내야 한다는 부청멸양’(扶淸滅洋)을 부르짖었다.

 

이 운동은 천재(天災)와 관련이 있다. 황하(黃河), 회하(淮河)의 범람으로 인해 많은 유민들이 산동, 직예로 들어오게 되었고 이들이 의화단 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의화단 운동이 발생하기 수년전부터 화북지방에는 매년 수해와 가뭄의 자연재해가 발생했다. 1994년에 발생한 수해로 직예에서는 11개 주현, 14,229곳의 촌락이 피해를 입었고, 천진-당산 일대에는 수해로 인해 기민이 발생해 구걸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겨울에는 아사와 동사로 희생되는 백성들이 많았다.

1897년 봄에는 강소성과 산동성 일대에는 큰 가뭄이 들어 밀과 보리가 말라 죽었고, 여름에는 장기간 비가 와서 벼 농사도 망쳤다.

그해 말에 수많은 중국인들이 회하를 지나 산동동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지방관리들이 제지하자, 유민들은 폭도로 변해 관아를 습격했다.

1998년 봄에는 유민이 급격히 늘어 수십만명이 먹을 것을 찾아 여러 지방을 배회했고, 여름에는 회하가 범람해 안휘성 동부와 강소성 북부에서도 유민이 발생했다. 당시 500만 이상의 농민이 떠났다고 한다. 황하도 범람해 산동 평야가 잠겼고, 메뚜기 피해가 겹친데 이어 다음해인 1899년 여름에는 가뭄이 닥쳐왔다.

의화단 사건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00년에는 봄에 비가 오지 않고, 전염병이 유행하면서 재앙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서양인을 쓸어버리면 자연히 바기 오고 재앙은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의화단 농민반란이 배외운동으로 변한 것이 이런 배경에서다. 가뭄과 홍수에 질린 헐벗은 중국인들이 서양인에게 적대감을 표현하면서 베이징의 외국공관을 공격하게 된 것이다.

 

의화단 사건(그림) /위키피디아
의화단 사건(그림) /위키피디아

 

중국 역사에서 마지막 소빙기는 1840~1880년간에 닥쳐온다. 천지가 얼음과 눈으로 뒤덮히는 이상 한랭현상이 몰려왔고, 베이징의 겨울평균 기온이 영하 이하였으며, 최저기온은 영하 15~20°까지 내려갔다. 상해의 월평균 평균 기온도 로 오늘날보다 2~3° 낮았다. 양쯔강의 호수들은 겨초가을에 일찍 얼었고, 여름에도 이상 한파가 몰아쳐 사람들이 모두 속옷을 껴 입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만 기상학자 유소민(劉昭民)은 이 시기를 중국 역사의 제6차 소빙기로 규정했다.

청나라 말기에는 서양의 기상학 기술이 전해지면서 기상관측을 완벽하게 기록했는데, 이때 기상관측기록과 오늘날의 기상관측기록을 비교해보면, 당시의 연평균 기온이 오늘날에 비해 1~1.1° 낮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의화단 사건은 유소민이 분류한 제6차 소빙기보다 20년 늦게 나타나지만, 그때에도 소빙기의 여파고 인해 이상기후현상이 자주 나타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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