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사③…화교도시 쿠알라룸푸르
말레이시아사③…화교도시 쿠알라룸푸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4.01.17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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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광산엔 중국인, 고무농장엔 인도인 이주…다인종 사회는 식민지 유산

 

19세기 이전에 말레이족이란 개념이 없었다. 말레이반도의 사람들은 이슬람을 믿었기 때문에 북쪽의 타이나 버마의 불교도에 대해 종교적 차이를 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영국이 반도에 항구를 건설하고 여러 술탄국을 묶어 연방을 구성하면서 말레이인들은 민족의 개념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서양인에 대한 인종적 차별보다는 중국인, 인도인과의 구별을 통해 종족적 자아를 확인하게 되었다.

19세기 말레이반도에 주석광산이 발견되면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급격하게 증가했고, 20세기에 고무재배 농장이 늘어나면서 인도인 이주자가 팽창했다. 영국인들은 말레이인보다 중국인· 인도인을 썼다. 중국인·인도인이 말레이인보다 더 열심히 일을 했으며, 경제적 활용가치가 높다고 본 것이다.

 

1884년 쿠알라룸푸르 /위키피디아
1884년 쿠알라룸푸르 /위키피디아

 

중국인에 의해 개척된 도시가 쿠알라룸푸르다. 쿠알라룸푸르(Kuala Lumpur)는 곰박강과 클랑강의 흙탕물이 합쳐지는 곳이란 의미인데, 주석광산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셀랑고르 술탄국의 한적한 마을이었다. 1857년 암팡에 주석광이 발견되면서 술탄의 왕자 라자 압둘라가 중국인을 끌어들여 광산개척에 나섰다. 처음에 87명이 왔지만 전염병이 돌아 69명이 죽어 나갔다. 그럼에도 광산개발은 중단되지 않았다.

광산이 성공하자 왕족들 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또다른 왕족 라자 마흐디가 케다 술탄국 왕자의 지지를 얻아 지역 지배권을 놓고 전쟁을 도발했다. 7년간(18671874)의 지리한 클랑전쟁(Klang War) 끝에 쿠알라룸푸르 일대에 대한 술탄의 지배력이 공고화되었다.

애초 사람이 별로 살지 않던 계곡에 중국인 노동자가 몰려들면서 화교촌이 형성되었다. 화교들은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세우고 자치공동체를 운영했는데, 그 우두머리를 카피탄치나(Kapitan Cina)라 불렀다. 한적한 마을이 오늘날 말레이시아 수도가 된데는 3대 카피탄치나 얍아로이(葉亞來, 1837~1885)의 공이 크다.

얍아로이 /위키피디아
얍아로이 /위키피디아

 

얍아로이는 중국 남부 광둥성에서 가난한 하카(客家)족의 아들로 태어나 17살에 중국을 떠나 말레이반도로 이주했다. 그는 농장 인부와 상점 점원을 전전하다 19살이던 1856년에 루쿳의 주석광산에서 일했다. 그는 돈을 좀 모아 1862년에 쿠알라룸푸르로 갔는데, 그곳에 먼저 와 있던 동료 류렌광(劉壬光)2대 카피탄치나를 하고 있었다. 얍은 류의 신임을 얻어 화교촌에서 지도자로 부상했고, 1868년 류가 죽자 3대 카피탄치나에 올랐다.

얍은 도전을 받았다. 류의 친척들이 반발했다. 당시 쿠알라룸푸르에는 하카와 광둥 출신 중국인의 폭력조직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두 파가 갈라져 얍과 류의 편에 섰다. 반대파가 선제공격을 해 얍의 동료를 살해했다. 얍아로이는 자파를 이끌고 보복에 나서 상대편 20명을 살해했다. 중국인 간의 패싸움은 왕족 간의 클랑전쟁과 맞물려 얍아로이는 술탄 편에 섰고, 반대파는 반란자의 편에 섰다. 싸움은 얍아로이의 승리로 끝났다. 1873년 쿠알라룸푸르는 얍아로이의 손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얍아로이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그는 셀랑고르 쿠알라룸푸르의 통치지이자 술탄국의 재상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오랜 내전 끝에 쿠알라룸푸르는 파괴되었고, 주석 국제가격이 폭락하는 바람에 도시는 불황의 늪에 빠졌다.

주석광산에서 대량의 해고자가 쏟아져 도시에는 중국인 실업자가 득실거렸다. 얍아로이는 뭔가 새로운 사업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해서 벽돌공장을 만들고 카사바 농장을 조성했지만 실패했다. 얍아로이는 부채에 허덕이고 파산 위기에 처했다. 그러던 참에 1879년 주석 가격이 오르면서 그는 기사회생으로 살아났다. 그가 어려울 때 동족을 살리기 위해 애쓴 것이 중국인들의 지지를 얻는데 힘이 되었다.

셀랑고르의 술탄 압둘 사마드는 1875년 영국의 주재관(총독)을 받아들였고, 1880년에는 수도를 클랑에서 쿠알라룸푸르로 옮겼다. 술탄이 온 이듬해 큰 홍수가 나서 집들이 떠내려갔다. 말레이시아의 주택은 나무와 잎으로 만들어져 화재에도 약했다. 영국 총독은 쿠알라룸푸르를 유럽식 벽돌로 재건할 것을 조언했다.

얍아로이는 이미 벽돌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벽돌공장을 풀가동하면서 쿠알라룸푸르 재건에 나섰다. 도시와 광산까지의 도로도 건설했다. 벽돌공장이 있던 곳엔 지금도 브릭스필즈(Brickfields)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얍은 돈이 되는 것은 무슨 짓이든 했다. 고리대금업, 윤락, 도박, 사기 등에서 돈을 버는 조직폭력배나 다름 없었다. 당시 그는 말레이반도에서 최고의 부자였다. 그렇게 번 돈을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했다. 중국인 이민자를 위해 학교를 지었고 길을 놓았으며, 치안유지를 위해 감옥을 만들었다. 그는 188547세의 나이에 기관지염으로 사망한 후에도 쿠알라룸푸르의 건설자로 이름을 남겼다. 중국인들은 쿠알라룸푸르를 吉隆坡라고 쓴다.

쿠알라룸푸르는 말레이반도의 대표적인 화교도시로 출발했다. 1891년 비공식 통계로 인구 43천의 80%가 중국인이었다고 한다. 1957년 쿠알라룸푸르는 영국령 말라야연방의 수도가 되었으며, 1963년 말레이시아 독립후 정식 수도가 되었다. 2022년 인구는 216만명이며, 시민의 47.7%가 말레이계, 41.6%가 중국계, 10%가 인도계다.

 

쿠알라룸푸르의 차이나타운 /위키피디아
쿠알라룸푸르의 차이나타운 /위키피디아

 

인도인들은 주로 고무농장의 인력으로 이주했다. 1877년 브라질의 고무나무가 소개되었다. 이 나무는 잘 자랐고, 이후 말레이반도의 플랜테이션 농업은 고무생산지로 탈바꿈했다. 고무나무 재배면적이 190827,000에이커에서 191380만 에이커로 늘어났다. 고무 수출량도 19107,300톤에서 1920203,000톤으로 급팽창했다. 말레이의 야산은 고무농장으로 개간되어, 1930년대에 전세계 고무농장 면적의 절반을 차지했다.

주석광산은 도시를 형성한데 비해 고무농장은 농촌에서 조성되었다. 영국인 자본가들은 고무농장에 인도인을 데려왔다. 셀랑고르와 페락에 인도인이 대량으로 이주했다. 1819년부터 1921년까지 매년 10만명의 인도인이 계약노동자로 이주해 왔다.

 

영국인들은 말레이인들에게 중국인과 인도인은 잠시 일하러 온 사람이며, 말레이인이 주인이라고 설득했다. 술탄과 귀족, 말레이인들은 농촌에서 살았고, 그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이 끝나면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외국인들은 돌아가지 않고 정착했다.

말레이시아가 다인종사회가 된 것은 영국식민지 시절의 유산이다. 오늘날 말레이시아에 부미푸트라(말레이인) 67.4%, 중국인 24.6%, 인도인 7.3%. 기타 0.7%의 인구비율을 구성한다. 원주민인 말레이인과 중국인·인도인과의 다름은 인종대결의 문제를 낳았고, 말레이인들의 민족의식을 자각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Kuala Lumpur 

Wikipedia, Yap Ah Loy 

Wikipedia, History of Malaysia 

Wikipedia, Klang War 

동남아시아사, 소병국, 2020, 책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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