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시대 지식인들, 주자학에서 자유로웠다
에도시대 지식인들, 주자학에서 자유로웠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8.04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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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 중국 학문 배우되 주체적 관점 강조…국학, 일본 고유의 감정 확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에도(江戶)에 새 막부를 열고 주자학을 장려했다. 에도시대에 주자학의 중심인물로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와 그의 제자 하야시 라잔(林羅山)이 꼽힌다.

세이카는 순수좌(蕣首座)라는 승명의 승려였는데, 이야야스가 그를 불러 <대학>을 강의하도록 명하자, 유학자로 변신했다. 그는 제자 라잔과 함께 에도시대에 주자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세이카는 정유재란 때 왜군에 피랍되어 일본에 건너간 조선유학자 강항(姜沆)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강항은 피랍되어 교토에 끌려갔을 때 세이카를 만났다. 강항은 세이카와의 만남을 귀국후 피랍 시절을 정리한 <간양록>에 기록해 두었다. 1)

나는 일본의 서울(교토)에 온 뒤로부터 왜국의 실정을 알기 위해 대때로 일본인 승려를 접했다. 또 묘수원(妙壽院)의 순수좌가 있었다. 그는 매우 총명하고 고문을 해독하여 통달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의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을 듣고 왜경에 집을 지어주고 해마다 쌀 2,000석을 주고자 했다. 순수좌는 그 집에 살지 않고 녹미(祿米)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강항 등 조선에서 잡아온 유학자들에게 사서오경의 정서(淨書)를 의뢰했고, 이에 강항은 <사서오경왜훈>(四書五經倭訓)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 책이 일본 주자학의 교과서였다고 한다.

 

일본 에도시대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 /위키피디아
일본 에도시대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 /위키피디아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은 이에야스 이래 도쿠가와 막부의 4대 쇼군에 이르기까지 쇼군의 스승인 시강(侍講)을 역임한 유학자였다. 라잔은 유교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일본의 신도(神道)와 접목시키려 했다. 그는 중국 성현의 도는 일본의 신()의 도이기도 하다면서 일본의 신화들을 주자학 본체론에 접목시켰다. 그는 또 "일본인 중에 중국인보다 뛰어난 사람들도 있다. 가르쳤다고 뛰어난 것도 아니고, 배웠다고 못한 것도 아니다. 뛰어넘는 그 사람이 얼마나 지혜와 관영과 용기를 보이느냐에 달렸다고도 했다. 2)

라잔은 중국의 주자학을 배우되, 얽매이지 말아야 하며, 일본에도 중국의 선현만큼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주체적 관점을 가지려 했다. 라잔의 이러한 관점은 후대로 내려가며 더 주체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 1618~1682)도 승려 출신의 주자학자로, 일본 고유의 신도와 주자학을 접합하는 수가신도(垂加神道)를 창설해 6천명의 문하생을 두었다고 한다. 안사이에 대한 다름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안사이는 제자들에게 지금 저 나라(중국)가 공자를 대장으로 삼고 맹자를 부장으로 삼아 수많의 기병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공격한다면, 공맹의 도를 배우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물었다. 제자들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안사이는 명쾌하게 답을 주었다. 불행하게도 만약 이러한 재액을 만나게 되면 우리들은 몸에 견고한 갑옷을 걸쳐 입고 손에 예리한 병기를 잡고, 그들과 일전을 수행하여 공맹을 잡아 국은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맹의 도다.”

 

일본 에도시대 유학자, 하야시 라잔 /위키피디아
일본 에도시대 유학자, 하야시 라잔 /위키피디아

 

감히 조선의 선비들이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조선에서는 회니시비(懷尼是非)라는 사건에 휘말려 있었다.

1669(현종 10) 윤선거(尹宣擧)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윤증(尹拯)이 스승 송시열(宋時烈)에게 묘비명을 부탁했다. 이때 송시열이 윤선거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적어 보내자 송시열과 윤증사이에 적대적인 관계로 바뀌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마침내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서인(西人)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서게 되는 한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송시열의 집이 충청도 회덕(懷德)에 있었고, 윤증의 집이 충청도 니성(尼城)에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회니시비라고 불렀다. 3)

두 사람이 서로 적대시하게 된 원인은 당시 최고 석학이었던 윤휴(尹鑴)에 대한 평가를 두고 윤선거와 송시열 사이에 의견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윤휴가 주자의 서()에 대한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을 하고 주를 달아 <독서기>(讀書記)를 저술하자,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며 격렬히 비판했다. 반면에 윤선거는 윤휴를 견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했다.

당시 송시열은 주자를 절대적 가치를 두었다. 그는 주자의 가르침은 하늘 한 가운데 있는 태양과 같은데, 감히 다른 의견을 부르짓는 자가 바로 사문난적이라며, 윤휴를 공격했다. 송시열의 논법은 주자를 벗어나면 아비도 없고 군왕도 없는짐승(禽獸)과 다름 없고, 천하를 망하게 하는 적이라는 것이다.

 

조선의 유림들이 주자학의 문구에 매달려 감정적으로 격하게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일본의 유학자들은 중국의 선진 학문을 배우되, 얽매이지 않는다는 관점을 유지한 것이다. 후에 서양 세력의 도전이 거세지고 서양 문물이 들어왔을 때에 조선의 지배층은 완강하게 척사(斥邪) 운동을 벌였는데, 그들이 배척하는 사악함의 기준은 주자학의 원리원칙이었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도 외세가 밀려올 때 초기에 강한 배척운동을 벌였지만, 곧이어 받아들이게 된 것은 주자학에 대한 완고함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외국문물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지혜를 에도시대에 터득했기 때문이라 할수 있다.

에도시대의 유학자들은 승려나 사무라이 출신으로, 조선이나 중국에 비해 낮은 사회적 지위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고유의 사상을 정립하고 전파시키면서 지식 르네상스를 이루었다. 그들은 주자학을 받아들이면서 중국도, 주자학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주자학을 일본 고유의 사상과 접목시켜 발전시켰다.

 

후쿠오카 금룡사(金龍寺)에 있는 가이바라 에키켄 좌상 /위키피디아
후쿠오카 금룡사(金龍寺)에 있는 가이바라 에키켄 좌상 /위키피디아

 

가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 1630~1714)이라는 유학자는 주자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실천하면서 윤리도덕은 물론 의학과 식물학 연구에도 몰두했다. 그는 일본 약초와 식물을 연구한 저술을 간행하고, 일본에서 최초로 서양 의학을 가르쳤다. 독일 의사 폰 지볼트(Philipp Franz Balthasar von Siebold)는 에키켄을 일본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는 처음에는 중화주의였으나, 후에 주자학에 반기를 든다. 그는 주자학이 유교 경전이 나온후 천년이 지난 후대의 해석에 불과하고, 유교경전의 원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자학이 아닌,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일본 에도시대 국학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 /위키피디아
일본 에도시대 국학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 /위키피디아

 

18세기에 일본에선 국학(國學)에 대한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지식인들은 고대 일본문학, 특히 시()가 담고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감정의 묘사에 주먹하며, 주자학의 윤리와 도덕이 부질없는 억지라고 주장한다. 중국문화에 대한 지적 반발이 고유의 것을 찾게 된 것이다.

가다노 아즈마마로(荷田春滿, 1689~1736)는 신도의 신주(神主) 출신으로, 고대 일본 가사집인 만요슈(萬葉集)를 연구해 고대 일본의 사유체계와 글이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아가 중국 문명이 일본에 끼친 영향을 벗겨내는 작업에 일생을 마쳤다.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는 평생 일본의 시와 고대 문학을 탐구했으며, 일본고대사서인 고사기(古史記) 연구에 30년을 보냈다. 그는 모노노아와레()라는 일본 고유 미()의 개념을 정립했다. 그는 11세기의 소설 겐지이야기(源氏物語)를 언급하며 일상과 유리된 사물과 사상을 접했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적막하고 쓸쓸한 슬픔 감정이 일본인의 정서라고 평가했다. 그는 성리학적 합리주의로 이와레를 억누르는 것은 위선이라고 주장했다. 4)

지식인 또는 승려들이 달이나 꽃을 보고는 아름답구나라고 감탄하면서도 예쁜 여자를 보고는 본 척도 안하고 지나쳐 버린다면 그것은 본심이라 할수 있을가. 달이나 꽃에는 정취를 느까면서 여색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은 인간적인 마음이 없는 위선에 찬 인간이다.”

노라나가는 일본의 시가 일본 미학의 절정이고, 이를 여성이 남성보다 더 잘 대변하는데, 일본 정신의 핵심인 천황도 여성성르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노리나가도 다른 국학자들처럼 일본 문명이 중국을 능가한다고 생각했다. 중국 책도 여가에는 충분히 읽을만하다. 중국책을 읽지 않는다면 그 나라의 단점도 알수 없을 것이며, 도한 일본의 고서가 한문으로 쓰여 있으므로, 중국문학을 몰라서는 학문도 진전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국이 만사에 그릇되어 잇음을 잘 이해하고 또 일본 혼만 뚜렷하게 흔들리지 않는다면 밤낮으로 중국책을 읽는다고 마음이 동요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노리나가는 고상기에 등장하는 모든 신화들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신도(神道) 사상과 함께 일본 민중들 사이에 뿌리내린다.

 

중국 중심의 주자학을 부정하는 유학, 일본 고유의 문화를 찾는 국학은 19세기에 메이지유신의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의 밑거름이 된다. 나아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산업혁명을 일으키는 사상적 토대를 형성하게 된다.

 


1) 강재언,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 (2004, 한길사), 323~324

2) 함재봉, 한국 사람 만들기 II (2017, 아산서원), 41~42

3) 강재언,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 (2004, 한길사), 360~361

4) 함재봉, 한국 사람 만들기 II (2017, 아산서원), 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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