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왜군의 발악, 울산왜성 전투
마지막 왜군의 발악, 울산왜성 전투
  • 아틀라스
  • 승인 2019.08.04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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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만 더 포위했더라면 섬멸했을 텐데…왜군, 말 잡아 먹고 오줌 마시고 버텨

 

울산에 왜성(倭城)이 있다. 울산은 태화강을 경계로 남쪽은 신도시, 북쪽은 구도시로 나눠진다. 울산왜성은 구도시 쪽, 즉 태화강 북쪽에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이다.

학성교를 지나 학성공원에 이르면 야트마한 언덕이 있는데, 그 언덕 자체가 바로 울산왜성이다. 언덕의 이름은 학성산(鶴城山). 해발 50m에 불과하다. 왜성의 면적은 59,678.

공원 길을 따라 가다보면 여기 저기 성터의 흔적이 남아있다. 복원하지는 않았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의 성을 국비나 지방비를 들여 복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흔적만을 남겨두더라도 우리의 어두운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남해안 일대에 쌓은 왜성이 20여 곳이나 된다.

 

울산왜성 /문화재청
울산왜성 /문화재청

 

산 정상부에는 흙을 깎아 평지를 조성한 후 산허리를 3단의 성곽을 만들어 전투를 할수 있도록 설계했다. 꼭대기에 본환(本丸), 그 아래에 이환(二丸), 그 밑에 삼환(三丸)의 형식으로 축조된 전형적인 왜성이다. 정상부는 높이 49m, 이환은 35m, 삼환은 25m의 높이로 쌓았다. 각 성은 40~50×100m 내외의 직사각형 형태로 이뤄져 있다.

멀리서 보면 시루를 엎어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시루성, 종성(甑城)이라고 한다.

 

학동 공원앞에 전시된 울산왜성 전투도 /사진=김현민
학동 공원앞에 전시된 울산왜성 전투도 /사진=김현민

 

1592년 조선을 침공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다가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면서 후퇴해 경상도 일원에 진지를 강화하며 장기전을 펼쳤다. 그때 왜군은 남해안 곳곳에 돌성(石城)을 쌓았다. 바닷가에 성을 쌓은 이유는 일본으로부터 보급이 원활하고, 패전할 경우 일본으로 도망하기 쉬운 입지 조건 때문이었다.

임진왜란때 남해안 일대에 지은 왜성은 본성 12, 지성(支城) 6곳이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8개의 왜성을 쌓았다. 왜군들은 지구전을 펼치기 위해 왜성을 쌓았고, 현대전 개념으로 보면 진지전을 펼칠 태세였다.

 

울산왜성 전투도 (후쿠오카시립박물관) /위키피디아
울산왜성 전투도 (후쿠오카시립박물관) /위키피디아

 

울산 왜성은 구마모토(熊本)의 번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축성했다. 가토는 왜의 2진을 맡아 부산 대대포에서 동해안을 따라 기장, 울산 서성포를 공격하고 이어 울산의 경상 좌병영을 함락한 이후 충주로 북상, 함경도로 진출했다. 명군이 참전한 후 한양을 거쳐 울산 지역을 근거지로 잔당들을 추스르며 재기를 도모했다.

가토는 학성산에 왜성을 짓기로 하고 울산읍성의 석재를 옮겨와 축성작업을 벌였다. 성의 남쪽에는 태화강을 통해 배가 들어올수 있도록 했다.

왜성이 거의 축조될 무렵이 15971223일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와 마귀, 그리고 조선 도원수 권율(權慄) 등이 조·명 연합군 5만명을 이끌고 울산 왜성을 공격했다. 왜의 병력은 16,000.

가토군은 성채에 기대어 완강하게 저항했다. 3단 성곽중 가장 바깥의 외성은 개전 초기에 무너졌지만, 내성은 왜군의 저항을 뚫지 못했다. 왜군은 가파른 지세를 활용하고 토굴과 성벽을 이용해 조총을 쏘아댔다.

·명 연합군은 왜성을 무너뜨릴 공성 기구를 갖지 못했다. 기존의 공성기구가 있다손 치더라도 일본의 성채는 조선이나 중국의 성보다 높게 쌓기 때문에 무용지물이었다. 왜군은 조선과 명군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적의 공성장비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을 높이 쌓아 요새화한 것이다.

왜군은 화포 공격도 이겨냈다. 자연의 구릉에 쌓은 성이기 때문에 당시의 화포가 성채를 깨뜨리지 못했다.

조명 연합군은 달리 쓸 전술이 없었다. 인근 서생포 왜성과의 연락을 차단하고 성을 포위해 왜군을 굶겨 죽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왜놈들도 질겼다. 그들은 전투에 필수적인 말까지 잡아 살과 피를 마시고, 오줌까지 버리지 않고 마셨다. 심지어 벽의 흙까지 끓여 먹을 정도로 버텼다.

조금만 더 오래 포위했으면 왜군들을 전멸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부산포와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울산의 가토군을 지원하기 위해 접근하고 남부 해안의 일본군이 울산왜성으로 총 집결했다. 그 숫자가 6만명에 이르렀다.

조명 연합군은 울며 겨자멱기로 경주로 철수하고 1차 공성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듬해 조명 연합군은 2차로 울산왜성을 공격했지만, 왜군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식량과 물을 비교적 넉넉히 비축해두고 화력을 보강했다. 2차 공격도 실패했다.

전투는 의외의 사건으로 종식된다. 오사카성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것이다. 막부는 조선 원정군에게 철수령을 내렸고, 울산왜성의 가토군도 199811월 성을 불태우고 태화강변에 배를 대고 일본으로 철수했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 초상화 /위키피디아
왜장 가토 기요마사 초상화 /위키피디아

 

울산 왜성은 섬()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도산성(島山城)이라고도 한다. 학성이라고도 하는데, 원래의 학성은 지금의 울산왜성이 위치한 곳이 아닌, 신라시대에 별도로 쌓은 계변성이라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한다.

 

1차 울산왜성의 전투기간은 보름정도였다. 1주일만 더 갔으면 왜군은 항복했을 것이다.

가토는 울산왜성 전투에서 워낙 고생을 했다. 16천명의 군사 가운데 전투에 죽거나 굶어 죽은 병사가 부지기수, 포위가 풀리고 살아남은 병력이 500여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가토는 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구마모토성을 지었는데, 방의 다다미를 토란 줄기로 만들고, 우물을 120개나 팠다고 한다.

 

구마모토성의 우물. /사진=김현민
구마모토성의 우물. /사진=김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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