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지식인들, 네덜란드 학문에 심취하다
에도 지식인들, 네덜란드 학문에 심취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8.05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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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실용학문에 매료…스기타 겐파쿠, 언어 배워가며 네덜란드 의학서 번역

 

에도 막부는 카톨릭을 금지하고 1639년 쇄국정책을 실시한다. 아울러 비()카톨릭 신교국가인 네덜란드에게 나가사키(長崎)의 데지마(出島)상관 개설을 허가했다. 네덜란드의 데지마상관은 쇄국정책을 실시하는 에도 정권의 유일한 대외출구였다.

막부는 네덜란드 무역관장에게 쇼군을 알현하는 에도참부(江戶參府) 행사를 갖게 했다. 하지만 중국 상인에게는 에도참부를 허용하지 않았다. 아마 중화주의에 빠져 있는 청나라도 자국 상인의 에도참부를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가사키에 체류하던 네덜란드 상관장의 에도참부는 1633~1789년 사이에는 연2, 1790~1850사이는 매년 1회로, 27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들이 나가사키에서 에도로 가는 행열은 가는 곳곳마다 일본인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네덜란드 상인들이 에도에 머물 때 의사나 학자, 쇼군의 부하들이 몰려들어 서양학문을 배우려 했다. 하지만 에도 체류기간이 짧은 탓에 나가사키로 가서 난학을 배우는 사람들이 늘어가게 되었다.

네덜란드 상관은 네덜란드 상관에 매년 <화란풍설서>(和蘭風說書)를 제출하도록 했다. 거기에는 서양의 정보가 들어 있었다. 막부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 카톨릭 국가들의 동향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는 카톨릭 세력이 다시 일본을 넘보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쇼군이 준 독점적 상권을 유지하기 위해 서양의 다양한 정보를 막부에 전해주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화란풍설서를 통해 베스트팔렌조약 체결(1648), 리스본 대지진(1755), 프랑스혁명(1789), 난징 조약체결(1842) 등 굵직한 국제정세를 파악하게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한편에선 쇄국정책을 강화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네덜란드 상관이라는 창문 하나를 열어놓고, 그곳을 통해 세계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선 입항도 (唐蘭館図 蘭船入港図, 川原慶賀) /위키피디아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선 입항도 (唐蘭館図 蘭船入港図, 川原慶賀) /위키피디아

 

일본인들은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대외무역만 하지 않았다. 그곳을 통해 서양학문을 받아들였다. 그 학문을 화란(和蘭)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난학(蘭學, らんがく)이라 했다. 난학은 네덜란드를 남쪽 오랭캐라는 부른 탓에 남만학(南蛮學) 또는 만학(蛮學)이라고도 했다.

시초는 1641년 데지마에 네덜란드 상관이 설치되고, 그곳에 상주한 네덜란드 상인과 의사들이 서양의 서적과 의학 지식을 일본인들에게 보급하면서부터였다. 막부는 카톨릭 서적과 정치서적 이외에 의학, 기술 서적의 보급을 허용했다.

도쿠가와 막부의 8대 쇼군 요시무네(德川吉宗)는 서양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서양 서적을 수입할수 있도록 양서 금지령을 완화하고, 지식인들에게 네덜란드어를 배우도록 명했다. 요시무네는 서양승마에 관심이 많아 네덜란드인이 에도에 와서 시범을 보이게 했으며, 서양의 달력에 관심을 가졌다. 서양학문에 극성스럽게 관심이 많았던 요시무네는 난학의 발전은 물론 일본 농업과 과학사에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난학에 대한 개방으로 네덜란드어를 번역하는 집단이 생겨났다. 나가사키에는 난학 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4개의 가문이 있었는데, 이들은 번역가들을 고용해 네덜란드 서적을 독점적으로 변역했다. 17세기 말에 나가사키에 네덜란드어 전문 번역가가 140명에 달했다고 한다.

 

스기타 겐파쿠의 난학사시(蘭学事始) /위키피디아
스기타 겐파쿠의 난학사시(蘭学事始) /위키피디아

 

대표적인 난학자는 에도에서 독학으로 네덜란드 의술을 공부하고 번역서를 낸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1733-1817)였다.

겐파쿠는 의관(醫官)으로 일하던 중, 17713월 여자 사형수 시체의 해부를 참관하게 된다. 켄파쿠 일행은 해부를 지켜보면서 인체의 내부를 자신의 눈으로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인체의 내부가 네덜란드 의서에 나오는 그림이 정확히 일치하는데 큰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한의서들에 나오는 오장육부와 12경락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날 돌아오는 길에 겐파쿠와 마에노 류타크(前野良澤), 나카카와 준안(中川淳庵) 동료 의사들은 네덜란드 의서를 해부하기로 결의했다. 그 책은 독일인 요한 아담 쿨무스(Johann Adam Kulmus)의 저서 ‘AnatomischeTabellen’이란 책의 네덜란드어 번역판인 ‘Ontleedkundige Tafelen’이었다.

다음날인 그들은 마에노의 집에 모여 책을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 중에 네덜란드어를 제대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가사키의 번역가들도 자신들의 독점적 지위를 잃어버리는 것을 우려해 그들의 번역작업을 돕지 않았다.

하는수 없이 네덜란드어에 문외한인 의원들은 자신들이 직접 번역하기로 했다. 그들은 우선 알파벳부터 외우고 여러 단어들을 하나씩 익혀 나갔다.

켄파쿠는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의 막막함에 대해 노와 키도 없는 배를 타고 대양에 나온 것과 같았다. 다만 질려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회상했다. “1년 정도가 지나자 번역어도 점차 많아졌고 책을 읽어나감에 따라 자연히 그 나라의 사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는 하루에 10행 혹은 그 이상을 특별한 노력이 없이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의학전문용어였다. 켄파쿠는 문장 하나를 놓고 긴 봄날 하루종일 매달렸으나 알수 없었다. 해가질 때까지 생각해보고 서로 쳐다보아도 한줄 밖에 안되는 짧은 문장조차 볼수 없었다.”고 했다.

그들은 새로운 용어를 만들었다. 가령 네덜란드어의 세이누(Zenuw)는 세이누(世奴)라고 음을 빌려 번역했지만, 뜻이 통하지 않아 신기(神氣)의 신()과 경맥(經脈)의 경()을 따서 새로운 말을 만들었는데, 오늘날 동양권에서 통용되는 신경(神經)이란 말이 되었다.

난학은 서양어를 번역하면서 새로운 용어를 많이 창조했는데, 오늘날 한국은 물론 한자의 고향인 중국에서도 그대로 도입되어 사용하고 있다. 난학이 동양의 학문 발전과 언어 다양화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켄파쿠 일행이 2년에 걸쳐 네덜란드 의서를 번역해 출간한 책이 <해체신서>(解體新書). 그때 켄파쿠의 나이가 39세였다. 이 책의 번역 출간은 일본 의학사에서 서양의학의 신기원을 이루는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겐파쿠는 말년(1815)<해체신서>의 힘겨운 번역 과정을 회고한 <난학사시>(蘭學事始)를 간행하기도 했다.

 

해체신서(解体新書) 복제판 (일본 国立科学博物館 전시) /위키피디아
해체신서(解体新書) 복제판 (일본 国立科学博物館 전시) /위키피디아

 

스기타 켄파쿠의 제자 오츠키 켄타쿠(大槻玄澤, 1757-1827)는 켄파쿠가 시작한 하이스터 (LorenzHeister,1683-1758)의 외과서 번역을 끝내고, 해체신서 번역을 다시 바로잡고 보충해 중정해체신서(中訂解體新書) 13권을 1826년에 출판했다.

겐타쿠는 1785년 최초의 난학 사숙인 지란당(芝蘭堂)을 에도에 설립했다. 지란당에서는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商館)에서 거행되던 새해 맞이 축하 연회를 모방해서 매년 양력 11일 새해를 축하하는 '오란다(화란) 정월'의식이 개최하기도 했다.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1837년까지 총 44회가 열렸다고 한다.

 

일본의 난학은 의학에서 시작해 지리학, 천문학으로 범위를 확대하며, 서양학술을 일본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에도 시대의 일본 학문은 이미 중화질서로부터 이념적, 정서적으로 벗어나고 있었다. 주자학을 받아들이면서도 독자적인 사고체계를 확립했고, 서양 학문에 대해 배타성을 버리고 합리적으로 옳을 경우 밤을 새워가며 배웠다.

이에 비해 조선의 유림들은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중화이데올로기에 매여 주자학 이외의 사상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매도하며 배우려 들지 않았다. 세계가 바뀌고 새로운 문물이 넘쳐 나는데도 조선의 학자들은 자신의 세계에 고집스럽게 매달렸다.

 

난학은 일본 개화기에도 이어진다. 막부를 지지하든, 천황을 지지하든 19세기 일본 지식인들은 서양문물을 배우기 위해 힘썼다.

막부파 지도자 가쓰 가이슈(勝海舟, 1823~1899)의 젊을 때 일화는 서양 지식에 목마른 일본 식자층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서구문물을 습득하려면 네덜란드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이슈는 23세때 네덜란드어 사전을 사려고 했는데 가격이 60냥이라는 말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난학 의사인 아카기(赤城)라는 사람이 그 사전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그 의사는 사전을 1년간 빌려보는 값으로 10냥을 내라고 했다. 가쓰는 1년 동안 58권이나 되는 사전을 두 벌 베껴 한 벌은 10냥에 팔아 빌린 대금으로 지불하고 나머지 한권으로 공부를 했다. 이 필사본 사전이 오늘날에도 전해진다고 한다.

가이슈는 난학 가운데 특히 병학(兵學)에 관심이 많았다. 일본을 강력한 국가로 육성하려면 서양의 전쟁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관련 서적을 알아보았더니 이미 서점에서 팔려 나가고 없었다. 다행히 그 책자를 가진 사람을 알게 되어, 그 책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밤 10시 이후에 와서 보고 가라고 했다. 가쓰는 매일밤 10시에 그의 집에 가서 반년만에 그 책을 모두 필사했다.

가이슈는 서양책에서 배운 지식으로 소총을 만들고 대포를 제작했다. 그는 막부군대를 총지휘하는 자리로 올라갔으며, ()막부파와의 막후협상에서 유신 세력에 손을 들어주었다. 메이지 유신은 그렇게 이뤄졌다.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위키피디아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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