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군이 인도네시아 침공한 까닭은?…조공거부
몽골군이 인도네시아 침공한 까닭은?…조공거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8.05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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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선 1천척에 3만 병력 이끌고 자바섬 공격…현지 동맹세력 배신으로 철수

 

유라시아 대륙을 제패한 몽골 제국이 해전에는 약했다. () 세조 쿠빌라이는 고려와 연합군을 편성해 1274년과 1281년 두차례에 걸쳐 일본을 침공했지만 실패했다. 원인은 신풍(神風, 카미카제)라는 태풍 때문이라고 한다.

쿠빌라이는 일본 침공에 실패한지 10여년 후에 인도네시아를 침공했는데, 이 또한 실패로 끝났다. 두차례 해전에서 모두 실패한 후 몽골은 대륙 지배에 전념했다.

몽골의 중국 지배와 유럽 침공에 관한 연구는 많지만, 인도네시아 침공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면 몽골제국은 왜 인도네시아를 침공했을까.

 

원(元) 세조 쿠빌라이칸 /위키피디아
원(元) 세조 쿠빌라이칸 /위키피디아

 

1290년대 초, 쿠빌라이는 중국 남송을 멸하고(1279), 동남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고 각지에 사절단을 보냈다. 그 무렵 인도네시아에선 싱가사리(Singhasari) 왕조가 세력을 확장해 동남아의 해상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인도네시아에도 멩기(孟琪)라는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당시 싱가사리 왕조의 임금은 컬타네가라(Kertanegara)였다. 자바섬에서 왕국을 일군 이 임금은 수마트라섬까지 지배권을 확장해 기세등등한 군주였다. 그는 자존심이 상했다.

컬타네가라는 사신의 얼굴을 달군 쇠로 지지고 귀를 잘라 버렸다. 자바에서는 도둑에게 행하는 징벌이었다. 몽골의 사신이 남의 나라 재산을 빼앗으려는 도둑과 다를 게 없다고 판결한 것이다.

쿠빌라이는 이 모욕적인 행위에 대해 징벌을 내리기로 결정했다. 야만국을 복속시키기 위해 군대를 편성했다. 남송의 해안지대인 푸젠(福建)과 장시(江西)성에서 병력을 모집했다. 이렇게 해서 모은 병력은 3만명, 함선 1,000척에다 1년간 먹고살 보급품을 실었다.

 

원나라 시대의 정크선 /위키피디아
원나라 시대의 정크선 /위키피디아

 

몽골의 침공을 목전에 두고 자바섬의 컬타네가라 임금은 무모한 짓을 벌였다. 그는 수도를 비워둔 채 전군을 동원해 수마트라섬을 공격하러 나섰다. 자바섬은 이미 점령해 속국화시켰기 때문에 안심한 것이다. 이때 자바섬 동부에 케드리(Kediri)라는 속국의 군주 자야캇왕(Jayakatwang)이 배신을 때렸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텅 비어 있는 싱가사리 왕국의 수도를 남과 북으로 침공했다. 컬타네가라 임금은 급히 회군해 반란군과 교전했지만 체포되고 말았다. 그의 양자 라덴 위자야(Raden Wijaya)가 북부 전선에서 적을 몰아냈지만, 임금이 포로가 된 상황에서 반란자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자야캇왕은 인도네시아의 새 지배자가 되었고, 거창한 탄트라(tantra) 의식을 거행하며 포로로 잡은 컬타네가라를 죽여버렸다.

양부이자 임금을 잃은 라덴 위자야는 복수심을 불태웠지만, 속마음을 철저하게 숨기고 있었다. 그는 자야캇왕에게 항복하고 충성을 맹서했다. 자야캇왕은 관용을 베풀어 라덴 위자야에게 타릭(Tarik) 지방에 가서 나무나 재배하며 조용히 살라고 했다. 그는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해 그 곳을 마자파힛(Majapahit)이라고 명명했다. 쓴 맛(pagit)이 나는 마자(maja)라는 과일이 나는 곳이란 뜻이다. 그는 그곳을 개간하고 도시를 세웠다. 이 곳이 나중에 마자파힛 왕조의 수도가 된다.

 

라덴 위자야 /위키피디아
라덴 위자야 /위키피디아

 

12933만의 병력을 실은 1,000척의 몽골군 선단이 푸젠성 관조우(泉州)에서 출항했다. 목적찌는 인도네시아의 자바섬.

장수는 세명이었다. 몽골족 출신의 시비, 위구르족의 이케 메세, 한족 가오싱(高興)이었다. 그들은 해안을 따라 항해했다. 우선 조공국인 대월(大越, 베트남)에 들렀다가 베트남 남부의 참파를 거쳐 말레이 반도, 수마트라섬으로 갔다.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의 소국 군주들은 몽골군에 항복하고 조공국을 자처했다. 몽골은 그곳에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설치하고 자바섬으로로 향했다. 그들은 자바섬 서부에 도착해서는 약탈을 일삼았다.

그리고 원의 사신을 모욕한 임금을 찾았지만 컬타네가라는 이미 죽고 없었다. 하지만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던 자야캇왕의 굴복을 요구했다. 하지만 자야캇왕은 거부했다. 전쟁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초기 몽골군의 공격은 순조롭지 않았다. 몽골군은 밀림 지형에다 열대의 무더위를 이겨내기 힘들었다. 그때 은인자중하던 컬타네가라의 양자 라덴 위자야가 몽골에 손을 내밀었다.

라덴 위자야는 몽골에게 복속을 약속하고 자야캇왕의 지배영역에 대한 상세한 지도를 넘겨줬다. 그리고 자신의 병력을 동원해 자야캇왕을 몰아내는데 연합군을 형성했다.

자야캇왕에게는 10만의 병사가 있었지만, 몽골과 라덴 위자야의 연합군에 패해 병력 2,000명이 죽는 가운데 몽골군의 포로로 잡혔다. 전쟁은 끝이 난 듯 싶었다.

 

몽골(元)의 인도네시아 침공로 /그래픽=김현민
몽골(元)의 인도네시아 침공로 /그래픽=김현민

 

라덴 위자야는 교활한 군주였다. 적을 철저히 속였다. 첫 번째가 자야킷왕이고, 두 번째가 몽골군이었다.

자야킷왕이 포로가 된 후 라덴 위자야는 조공품을 모으기 위해 자신의 영지 마자파힛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몽골족 출신의 시비와 위구르족의 이케 메세는 라덴 위자야에게 다녀오라고 했지만, 한족 출신 가오싱은 믿지 못했다. 가오싱은 그를 돌려보내면 변심할 것이라고 두 장군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한족 장군의 주장은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몽골족과 위구르족 장군의 목소리가 더 세었다.

라덴 위자야는 조공품이 많으니 무장을 하지 말라고 했다. 두 장군은 또 속았다. 200명의 비무장 몽골군 병사가 조공을 받기 위해 마자파힛으로 갔다.

기회를 노리던 라덴 위자야는 몽골의 부대를 기습공격해 몰살시켜 버렸다. 나아가 몽골군 본대를 쳐들어가 3,000명 이상 숨지게 했다. 몽골군은 뭍에서 도망쳐 함선에 올랐다.

 

몽골군은 더 머물며 라덴 위자야를 공격해야 할지, 퇴각해야 할지 고민을 했다. 원정군의 사기도 떨어졌다. 중국에서 따듯한 지역인 옛 남송에서 병력을 차출했지만, 열대 기후를 견디기 어려웠고, 언젠가 적이 출몰할지 모르는 밀림의 조건은 두렵기만 했다.

때마침 계절풍의 방향이 바뀌기 직전이었다. 1년에 한번씩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계절풍은 예로부터 항해의 기본조건이었다. 시기를 잘못 잡으면 바람의 방향을 거슬러 가야 하므로 철수 시기를 늦춰야 했다. 마침내 몽골군은 철수를 단행했다.

그후 몽골군 3명의 장수는 남은 병사를 이끌고 원나라로 돌아갔다. 쿠빌라이는 분노했다. 라덴 위자야에게 속은 시비는 곤장 70대에 재산 3분의1 몰수, 이케 메세는 재산 3분의1의 몰수의 벌을 받게 되었다. 이에 비해 라덴 위자야의 속임수를 경고했던 가우싱은 금 50냥의 상금을 받았다.

몽골군이 물러난후 1299년 라덴 위자야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반도를 아우르는 마자파힛 제국을 세우게 된다. 14세기에 마자파힛의 제국은 남지나해에서 동남아-인도-아라비아-투르크와 이집트-베네치아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해상 교역 루트를 잇는 제국으로 부상한다.

 

마자파힛 제국의 전성기 /위키피디아
마자파힛 제국의 전성기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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