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이 사할린섬을 공격한 사연은?
몽골이 사할린섬을 공격한 사연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8.06 16:3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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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브흐족의 요청에 아이누족 정벌…몽골이 이긴 유일한 해전

 

한때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한 몽골의 원()나라가 지금 러시아 땅인 사할린 섬을 공격한 적이 있다. 몽골이 고려를 복속한 후 여몽(麗蒙)연합군을 편성해 일본 규슈를 정벌하기 10년전부터 몽골은 사할린에 눈독을 들였다.

몽골의 사할린 정벌은 사할린에 살던 아이누족을 복속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정벌은 1264년에 시작되어 1308년에 항복을 받게 되는데, 이를 통해 연해주가 중국의 땅임을 확인하게 된다.

몽골의 사할린섬 공격은 일본 정벌, 인도네시아 자바섬 정벌과 함께 바다를 건너는 싸움이었다. 해전에 익숙하지 않은 몽골군은 일본, 자바섬에서 패했지만, 유독 사할린섬에서는 이겼다.

 

니브흐족 /위키피디아
니브흐족 /위키피디아

 

러시아 연해주 동쪽, 일본 홋카이도 북쪽에 사할린 섬이 있다. 이 섬에는 니브흐(Nivkh)라는 토착부족이 살았고, 2010년 러시아의 인구조사에서 4,6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도 어업에 종사하고, 곰 신앙을 유지하고 있으며, 내세를 믿고 있다고 한다. 이 부족의 주생활지는 사할린섬이며, 아무르강 하구에도 살고 있다. 러시아 탐사대가 니브흐인의 영토인 사할린을 발견한 것은 17세기였지만, 19세기 중반까지 어느 국가에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생활을 하다가, 1850년에 러시아로 편입되었다.

 

니브흐족의 거주지역 /위키피디아
니브흐족의 거주지역 /위키피디아

 

사할린섬의 니브흐족은 러시아인이 등장하기 앞서 오랫동안 중국과 교류를 해왔다.

니브흐족은 6세기경 북쪽 캄차카 반도의 코랴크족(Koryak)과 연해주의 흑수말갈의(黑水靺鞨)의 영향을 받아 오호츠크 문화를 형성하며, 홋카이도 북부와 쿠릴열도까지 지배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질리에미(吉列迷)로 알려져 있는데, 12세기까지 사할린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본섬(혼슈)를 차지하던 에조(蝦夷)족이 일본 야마토(大和)족에 밀려 홋카이도로 쫓겨오면서 오호츠크해에서 니브흐족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 에조족은 후에 아이누족으로 불린다. 11~12세기에 아이누족들은 홋카이도를 차지하고 사할린 남부를 침략하게 되었다.

13세기에 몽골이 중국 중원을 장악하고 있던 금()나라를 무너뜨리고 만주를 차지하게 되었다. 1263년 몽골은 아무르강(黑龍江) 하구까지 영토로 편입시켰다. 연해주에 살던 니브흐족은 처음엔 몽골에 저항했지만, 이내 조공관계를 맺어 복속했다. 일본 열도에서 밀려오는 아이누족과 대치하기 위해서였다.

니브흐족은 구이(骨嵬)와 일리유(亦里于)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몽골에 보고하고, 지원군을 요청했다. 구이는 니브흐어로 아이누족을 의미하고, 일리유는 사할린에 살고 있는 또다른 종족이었다.

니브흐족의 요청을 받은 몽골은 12641130일 사할린 섬의 아이누족을 공격했다. 하지만 이듬해 아이누족이 반격에 나서 니브흐족 전사들을 죽였다. 이번에는 몽골이 니브흐족에게 식량과 무기를 지원했다.

1271년 몽골은 국호를 원()으로 개칭하고, 만주지역에 탁시알라(塔匣剌)를 군 책임자로 임명했다. 탁시알라는 1273, 1274년 두해에 걸쳐 사할린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몽골군은 연해주와 사할린 섬 사이의 타타르 해협(Strait of Tartary)을 건너지 못했다. 타타르 해협의 가장 좁은 곳의 폭이 7.3km인데, 해전에 약한 몽골군은 이 해협 앞에서 멈춘 것이다.

탁시알라는 사할린섬을 어떻게 건너가야 하는지를 현지 부족들에게 물어보았다. 아무르강 하구의 부족들은 겨울이 오면 해협의 바다가 얼어붙는데, 그때 행군하면 사할린섬으로 건너갈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타타르 해협은 겨울에 4개월간 결빙한다.

탁시알라는 이 정보를 믿고 1273년에 원() 조정에 다시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탁시알라의 요청은 조정에서 거부되었다.

몽골이 왜 사할린 공격을 중단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몽골은 1274년과 1281년 두차례에 걸쳐 고려와 연합군을 편성해 일본 정벌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일본 역사가들 중에는 몽골이 남쪽으로 일본을 공격하느라, 북쪽 사할린 공격을 멈추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이도 있지만, 연관성을 찾아내지 못했다.

 

아이누족의 최대영역 /위키피디아
아이누족의 최대영역 /위키피디아

 

어쨌든 여몽연합군의 2차 원정이 실패한 직후 몽골은 사할린섬 공격을 재개했다.

1282년 아이누족들이 다시 사할린의 니브흐족을 침공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번에는 원 조정이 만주군을 보내기로 했다. 몽골군은 사할린 침공계획을 12849월로 잡았다가 11월로 연기했다. 해협이 얼어붙을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 몽골군은 사할린 공격에 성공했고, 이어 1285년과 1286년에도 1만명의 대군을 사할린섬에 파병했다.

이번에는 배를 이용했다. 타타에르다이(塔塔兒帶)와 양울루다이(楊兀魯帶)가 이끄는 몽골군은 1,000척의 배를 동원해 1척당 10명씩 태우고 사할린으로 건너갔다.

소수의 아이누족은 몽골군의 대군을 이기지 못하고 섬멸되었다고 한다. 몽골군은 사할린 섬 남쪽 끝인 크릴론 곶(Cape Crillon)까지 진군해 아이누족을 쫓아냈다.

사할린 남쪽에는 시라누시(白主)토성의 유적이 남아 있는데, 이 성터가 아이누족의 것인지, 몽골의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분명한 것은 원조(元朝)가 이곳까지 장악한 것은 분명하다.

 

원나라 시대의 만주 /위키피디아
원나라 시대의 만주 /위키피디아

 

몽골은 사할린 지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아무르강 유역에 중국인 정착촌을 만들어 병농일치(兵農一致)의 방식으로 군사화했다. 몽골은 일찍이 멸망시킨 남송(南宋)의 한족을 아무르강 유역으로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했다.

하지만 아무르의 한족 정착촌은 오래가지 못했다. 만주에 있던 몽골 황족 나얀이 반란을 일으켜 1287년에 아무르 정착촌의 군대를 뺏기 때문이다.

아무르 유역에 몽골군이 사라지자 니브흐족의 백호(百戶) 대장 두명이 아우누족 편으로 돌아섰다. 1295년 아이누 추장 와잉(瓦英)이 타타르 해협을 건너 아무르 일대에 살던 니브흐족을 습격했다.

니브흐족들은 몽골에 이 사실을 알리고, 겨울이 되어 해협이 얼면 아이누들이 건너와 해협을 건너와 매사냥꾼들을 잡아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원나라는 광대한 지역을 소통하는 수단으로 매를 귀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1297년에 아이누족들이 아무르 일대를 다시 공격하자, 몽골은 군대를 보내 아무르 유역의 키지호(Lake Kizi) 근처에서 아이누 군대를 패퇴시켰다.

아이누족들은 1305년에 또다시 해협을 건너 아무르 일대의 몽골군을 공격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하지만 1308년에 아이누 추장 와잉과 유샨누(玉善奴)는 니브흐족을 통해 몽골군에 항복을 청했다. 아이누족은 사절단을 연해주의 누르간(奴兒干)에 보내 조공관계를 맺었다. 아이누족들은 칼과 무기들을 몽골족에게 선물했고, 매년 모피를 조공품으로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몽골과 아이누족과의 전쟁은 끝났다.

 

아이누족 /위키피디아
아이누족 /위키피디아

 

몽골의 사할린 침공은 중국 역사에서 처음이라고 한다. 그후 아이누 조공사절단은 원나라 국경 군사기지인 울리에헤(兀列河), 낭하르(囊哈兒), 볼우오헤(波羅河)로 찾아가 조공품을 받쳤고, 막대한 하사품을 받아서 돌아왔다. 그후 사할린섬은 일본 열도의 야마토족과 몽골족 사이의 조공무역 중심지로 자리잡게 된다. 동시에 홋카이도 아이누족들은 사할린을 니브흐족에게 내어주게 된다.

명조 영락제(永樂帝)와 선덕제(宣德帝) 시대에 이시하(亦失哈)라는 환관이 원정대를 이끌고 아무르강 하류에 와서 영령사(永寧寺) 절터에 칙수노아간영령사비기(勅修奴兒干永寧寺碑記)와 선덕중건영령사기(宣德重建永寧寺記)라는 두 개의 비석을 세웠다. 이 비석에는 명조가 누르칸도사(奴兒干都司)라는 기관을 만들어 흑룡강 하류와 사할린을 지배하에 두었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비석의 건립시기는 1413년과 1433년으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명 황제 정통제(正統帝)1449년 오이라트와의 싸움에서 포로로 잡히는 토목의 변(土木之變) 이후에 급격히 북방민족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니브흐족, 아이누족과의 조공관가 끊어진다. 이후 홋카이도의 아이누족들은 일본 본섬들과 교역을 강화하게 된다.

사할린 위치 /위키피디아
사할린 위치 /위키피디아

 

사할린섬에 중국의 영향력이 사라진 이후 근세들어 일본과 러시아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후 사할린의 역사는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799, 일본 에도 막부가 사할린섬 남쪽 끝에 영향력 행사

1821, 일본 마쓰마에 번(松前藩)이 사할린 일부를 영유

1853, 러시아가 영유 선언

1867, 러일 양국의 협동 관할지가 됨

1875,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사할린섬 전체가 러시아 영토가 됨

1905, 러일 전쟁 후 일본이 북위 50도선 이남의 사할린섬 남부를 넘겨받아 가라후토 민정서 설치 (일본에서는 사할린섬을 가라후토(樺太)라 한다)

1918-1925, 러시아 혁명후 내전을 틈타 일본군이 사할린섬 북부까지 점령

1942, 일본이 사할린섬 남부를 내지(본토)로 편입

19458, 2차 세계 대전 말 소련군이 사할린섬 남부까지 차지

1951,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이 사할린섬 남부에 대한 영유권 포기. 이로써 섬 전체가 소련 영토가 되었고, 현재는 러시아의 영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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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살 2023-04-27 22:26:31
'이를 통해 연해주가 중국의 땅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딴 개소리나 씨부리면서 동북공정을 옹호하는 이유가 뭐냐 기레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