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경신대기근 직전에 쌍혜성 소동
조선조 경신대기근 직전에 쌍혜성 소동
  • 이인호 기자
  • 승인 2019.08.10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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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도 관측, 월식까지 겹쳐 대재앙 불안감 확산…대역병과 런던 대화재 발생

 

조선 18대 현종 재위기간인 1670~71년엔 이른바 경신(庚申) 대기근이 발생했다. 1670(경술년)1671(신해년)에는 이상 저온으로 우박과 서리, 때아닌 폭설이 내렸고, 가뭄과 홍수가 반복됐다. 조선 팔도에 전염병이 유행했고, 조선 팔도에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병자호란 이후 흉년이 들어 백성은 신음하는데, 사대부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했다.

한국 역사상 전대미문의 기아사태가 발생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피해 살아남은 노인네들은 전쟁때도 이보다 나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피해는 엄청났다. 조선 팔도 전역에서 흉작이 발생했으며, 당시 조선 인구 1,200~1,400만명(추정) 30~40만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현종은 불쌍한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다는 말인가. 허물은 내게 있는데, 어찌 재앙은 백성들에게 내린단 말인가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경신 대기근에 앞서 현종 5년말에서 이듬해 초(1664~1665) 사이에 혜성(彗星) 두 개가 동시에 뜨는 이상 현상이 발생햇다.

조선왕조실록에 혜성에 관한 기록이 많다. 관상감이 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하다가 혜성이 나타나면 왕실에 보고하고, 임금과 조정은 별자리의 괴이함에 국정을 걱정하는 장면이 많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아 하늘의 움직임에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쳤던 시절이다.

현종기에 나타난 쌍혜성은 조정에 많은 우려를 낳았다. 이 혜성이 처음 관측된 것은 1664109(음력)이었다.

현종실록은 이날 밤에 별이 진성(軫星)의 동쪽에 나타나 한쪽을 가리키는 꼬리가 있었는데 색깔은 백색이었다. 이는 곧 혜성(彗星)이었다.”(夜有星見於軫星東側, 有偏指之尾, 色白, 卽彗)고 기록했다.

하지만 혜성이 오랫동안 나타나자 조정에서 불안한 마음이 생겨난다.

3일째 되던 날, 홍문관 부제학 이경억이 "지금 혜성의 괴이함에 몹시 놀라고 있습니다만, (, 임금)께서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기를 이렇게 하신다면 재앙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라고 임금을 안심시켰다.

이에 현종은 "홍수와 가뭄으로 기근이 없는 해가 없으니 내 마음이 기쁠 때가 없다. 지금 이 이변이 겹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니 진실로 나의 정치가 거칠어서 하늘에 죄를 얻었기 때문인 줄을 알겠다.“며 하늘의 괴이함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렸다.

혜성이 매일 출현하니, 백성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1013일자 실록에는 영상 정태화(鄭太和)근래에 천재 시변이 없는 해가 없는데 이번 이 혜성의 이변으로 인심이 두려워하고 있으니 장차 어디에 허물을 돌리겠습니까. 신이 정승의 직에 있은 지 가장 오래되었는데 재앙과 이변이 누차 나타났으니, 신을 속히 파하여 내치소서."라며 자신의 파직을 청했다.

 

1664년 유럽에서 혜성을 관찰한 익명의 그림 /위키피디아
1664년 유럽에서 혜성을 관찰한 익명의 그림 /위키피디아

 

혜성이 일주일 이상 나타나자 1017일 대신들은 환란을 걱정한다. 이조판서 이상진은 상소를 올려 혜성이 진성(軫星)의 성좌 안에 나타났는데 진성은 사()의 지방에 있으니 바로 우리 나라의 동남 지방입니다. 해도(海島)의 사정을 이미 환하게 알지 못하니 반드시 무사할 것이라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라며 과거 임진왜란·정유재란의 예를 들어 해안 경비를 강화할 것을 주청했다. 이에 임금은 그 상소문대로 하라고 지시했다.

일본이 다시 쳐들어 올지 모르니 동남 해안의 경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이 내려갔다.

 

이 무렵 제주도에 포착했다가 체포되어 전라도 여수 좌수양에 유배되어 있던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이 자신의 표류기에 쌍혜성 관측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일치한다.

하벨은 하멜표류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연말(1664)에 우리는 꼬리 달린 별을 보게 되었는데, 나중에 이 꼬리 달린 별이 두 개로 늘어났다. 처음 것은 동남쪽에 나타나 두달 가량 볼수 있었으며, 나중의 것은 서남쪽에 나타나 서로의 꼬리로 상대방을 가리켰다. 이런 현상은 조정에 큰 소요를 일으켰으므로, 국왕은 모든 항구와 전선(戰船)을 정비하고, 모든 성채에 군량과 탄약을 준비하라고 명했다.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기병과 보병들은 날마다 훈련을 받았다. 해안 지역에서는 집 안팎을 막론하고 밤에 불을 지피는 일이 금지되었다. 보통사람들은 다음 추수 때까지 버틸 만한 양식을 남기고는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먹어 치웠다. 타르타르인(청나라)이 국토를 침입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일본이 이 나라를 쳐들어왔을 때도 이와 유사한 징조가 하늘에 나타났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직도 그 때 일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신분이 높건 낮건 사람들은 이러한 징조가 보일 때 화란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우리에게 물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이 것은 천벌이 내리든가, 일반적으로 전쟁이 일어나든가, 아니면 흉년이 들든가, 또는 나쁜 병에 들 징조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은 우리 말에 동의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현종실록에 따르면 이 혜성은 이 해 1224일까지 나타났다가 형체가 희미해져 소멸되었다. 당시 혜성은 꼬리길이가 육안으로 1~2(30~60cm)으로 관찰되었으며, 한때 1(, 3m)나 되었다고 한다.

하멜이 관측하기로는 두 개의 혜성이 동시에 떠서 꼬리를 상대별에 행해 마주보았다고 했다. 천문학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에 지구인들은 엄청 놀랐을 것이다. 조선의 임금이 스스로를 책망하고, 이를 보다 못해 영의정도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했으니, 백성들이 크게 두려워 했을 것임은 불을 보듯 선하다.

이 혜성은 이듬해인 1665220일에 다시 나타나 꼬리가 2(6m)가 되도록 길게 늘어졌다가 35일 사라졌다.

 

1664~1665 유럽에서 나타난 쌍혜성과 월식 상상도 /김현민
1664~1665 유럽에서 나타난 쌍혜성과 월식 상상도 /김현민

 

혜성(comet)은 우리말로 살별이라고도 하는데, 태양 주위로 타원 또는 포물선 궤도를 가지고 도는 별이 태양 가까이 진입하면서 타는 현상을 말한다. 이런 현상에 대한 연구는 16세기 덴마크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가 혜성이 지구상 대기 현상이 아니라, 천체의 일종임을 밝혀낸 후에 천문학적 연구가 진척되었다. 그 이전에 인류에게 혜성은 무서운 존재였다.

1664~1665년 조선에 나타난 쌍혜성은 유럽에서도 나타났다. 유럽에서도 소동이 빚어졌다. 유럽에서는 두 개의 혜성과 그 사이에 월식까지 겹쳐 세 가지 불길한 조짐에 대해 인류 대재앙의 우려가 확산되었다.

당시 영국의 점성가 존 가드베리(John Gadbury)이 불타는 별들! 대기근과 대역병, 전쟁이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면서 왕자는 죽고, 왕국은 위기에 빠지고, 영주들은 반드시 큰 손해를 볼 것이다고 예언했다. (These Blazeing Starrs! Threaten the World with Famine, Plague, & Warrs. To Princes, Death: to Kingdoms, many Crises: to all Estates, inevitable Losses!.)’

그의 예측이 맞아 떨어진 것일까. 런던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역병이 돌았다. 페스트였다. 런던은 당시 템즈강 하중도에 지은 성채에 갇혀 있는 도시였다. 역병이 돌자 성채의 문을 닫았다. 그 안에 가난한 자들이 사는 지역은 인구가 밀집해 있었고, 위생시설이라곤 전혀 없었다. 페스트는 영국에서 약 10만 여명의 목숨을 빼앗아 갔고 1666년 가을이 되고서야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16669월 새벽 2시경 런던의 한 빵 공장에서 불이 일어나 시내로 번졌다. 세계 3대 화재로 기록되는 런던 대화재였다. 불은 5일 동안 87채의 교회와 15,000여 가구를 불태웠으며, 수많은 노숙자를 낳았다. 당시 영국인들은 런던이 3년 사이에 대역병과 화재를 겪은 이유가 혜성의 출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 혜성은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와 스페인, 이탈리아는 물론 일본에서도 관측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664년 혜성을 그린 그림 (작자 미상) /위키피디아
1664년 혜성을 그린 그림 (작자 미상) /위키피디아

 

조선에서는 경신대기근에 앞서도 3년간의 대흉작이 있었고, 그 후에 후 쌍혜성이 나타나 군왕과 신료, 백성들의 불안이 극에 달했다.

하멜은 1662년 대기근을 이렇게 서술했다.

이 해(1662)는 새 작물이 나올 때까지 상황은 한층 더 악화되었다. 수천명이 굶어 죽었다. 강도들이 많았기 때문에 길에 다니는 것이 어려웠다. 국왕의 명령에 따라 여행자들을 보호하고, 굶주림으로 길 위에 죽는 사람들을 묻으며, 또한 매일처럼 발생하는 살인, 강도 행위를 막기 위해, 모든 길목에 강력한 감시병들이 배치되었다.

약탈을 당하는 고을과 마을이 많았다. 나라의 창고들이 여기저기서 파괴되고 양곡이 약탈되었으나 범인은 잡을 길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약탈자들이 대부분 고관들의 하인이었기 때문이다. 묵숨을 부지하기 위해 평민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도토리, 송피, 잡풀 같은 것을 뜯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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