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바트화 폭락④] IMF에 손벌린 태국
[1997 바트화 폭락④] IMF에 손벌린 태국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8.11 11: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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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환율제 폐지 한달만에 구제금융신청…160억 달러 중 미국은 한푼도 안내

 

811IMF는 태국의 건의를 받아들여 16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태국에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이 계획은 나중에 172억 달러로 구체화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국이 한푼도 분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60억 달러중 IMF40억 달러를 지불하고 일본이 40억 달러, 홍콩과 오스트레일리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가 각각 10억 달러, 한국과 인도네시아 5억 달러를 지불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지원국은 모두 아시아 국가였다. 일본은 60~70억 달러를 낼 준비를 했으나, 이것마저 IMF가 깎았다.

 

태국은 2년전 멕시코 페소화 폭락사태와 비슷한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두 나라는 통화 위기가 발생하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펀더멘털이 좋았고, 정부의 경제정책도 성공적이었다. 외국에서 막대한 자금을 빌려 썼지만, 외국 은행들은 멕시코나 태국의 은행들이 떼먹을 의심을 하지 않고 돈을 빌려줬다. 그러나 두 나라는 어느 날 갑자기 통화 폭락의 나락에 빠져버린 것이다.

또 비슷한 것이 있다면, 멕시코와 태국은 이웃나라에 전염병을 급속히 확산시켯다는 점이다. 멕시코 위기가 발생하자 중남미 경제권의 아르헨티나, 브라질 경제가 휘청거렸다. 멕시코인들이 즐겨 먹는 술의 이름을 따 이른바 테킬라 효과라는 것이다.

태국 바이러스도 주변 국가를 순식간에 전염시켰다. 방콕 정부가 환율 밴드(제한폭)를 풀어버리자, 태국과 비슷한 경제모델을 유지했던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등 주변국가들의 화폐가 일제히 하락했다. 말레이시아와 태국은 환율 방어를 위해 금리 인상을 단행했고, 특히 필리핀에선 오버나이트 금리(만기 1~3일의 단기 금리)가 하루전보다 두배나 높은 25%로 폭등했다.

그러나 태국 바트화 폭락은 기본적으로 멕시코와 다른 입장에서 발생했다. 멕시코 위기는 미국이 한 해전에 금리를 대폭 인상하면서 발생했다. 미국의 Fed1994년 한해동안 기준금리를 대폭 인상하자, 멕시코에 유입됐던 핫머니가 미국으로 빠져나갔다. 멕시코에 들어온 국제유동성 자금의 대부분은 미국 자본이었는데, 미국 땅에서 이익이 나는데 굳이 위험성 있는 멕시코에 묻어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태국에서 들어온 외국 자본중에는 일본 엔화 자금이 가장 많았다. 엔화 가치는 1995년을 강세에서 약세로 전환, 하락 추세에 있었다. 일본 경제의 안방 격인 동아시아 국가들은 엔화가 약세로 돌아서면 수출이 둔화하고 수입이 늘어 경제 여건이 나빠진다. 그런데 2년여만에 엔화가 50% 가까이 절하됐는데, 그 타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방콕, 자카르타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국가들은 일본 돈 값이 떨어지면서 지반이 약해지고 있었고, 그중 가장 약한 곳에서 위기가 발생, 확산돼 나간 것이다.

또 위기가 닥쳐 왔을 때 도움을 받을 만한 여건도 달랐다. 멕시코는 이웃에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버티고 있었지만, 아시아의 맹주 일본은 버블 경제가 꺼지면서 7년째 경기 침체에 시달리고 있었다. 미국은 즉각적으로 파탄에 빠진 멕시코를 건져내기 위해 자금지원에 나섰지만, 일본은 그럴 형편이 못됐다. 미국에 기대는 것도 어려운 입장이다.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멕시코를 지원하면서 의회 반대자들에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선언해 더 이상 도와줄 여건이 못된다. 마지막에 호소할 곳은 국제통화기금(IMF)밖에 없었다. 월스트리트 저널 지는 태국 중앙은행이 환율 방어를 포기하자, 다음날 태국은 IMF의 지원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태국 중앙은행 /방콕포스트 캡쳐
태국 중앙은행 /방콕포스트 캡쳐

 

그러나 태국 정부는 IMF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멕시코도 페소화 폭락을 당하고 IMF의 도움은 받지 않겠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다. 태국 정부는 한달 가까이를 버텼다.

재무 관리라면 어느 나라나 IMF에 손을 내밀고 싶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태국 정부도 IMF에는 가지 않으려고 백방으로 뛰었다. IMF에 가면 준비된 패키지를 받아들여야 한다.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예산을 대폭 줄여야 하고, 세금을 늘려야 한다. 경제성장률, 물가상승률은 물론 금리도 통제를 받아야 한다. 한 나라의 거시정책이 IMF의 다국적군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을 좋아할 재무당국자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을 것이다.

태국 정부 관리들은 체면이 깎이는 것을 싫어했다. 바트화 폭락의 원인을 외국 자본의 공격에 있다고 생각한 태국 관리들은 고정환율제를 포기한 후 외국 증권사, 외환 거래자, 경제 분석가들을 비난했다. 717일엔 방콕 경찰이 시내 악성 루머 유포 혐의로 2개의 외국 증권브로커 회사를 급습하기도 했다.

변동환율제를 도입하면 곧 시장가격을 회복, 진정될 줄 알았던 바트화는 바닥이 어디인지 모른 채 떨어지기만 했다. 7월말에는 바트화 환율은 1달러당 32 바트까지 올라 밴드를 풀고 난 이래 25%나 가치가 떨어졌다. 외국 뱅커들은 이것도 모자라 바트화가 더 떨어질 것을 기대, 바트화 투매를 계속했다. 지금이라도 바트화에 묻어두었던 달러를 빼내면 나중에 더많은 바트를 얻을 수 있는데, 달러를 빼내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1년 내에 만기가 돌아오는 단기 외채는 450억 달러나 됐다. 200억 달러에도 못 미치는 보유 외환으로는 절대 부족했다.

이를 눈치챈 외국 펀드들은 12%의 금리도 모자라 2% 포인트 더 얹어주어야 한다고 배짱을 부렸다.

당시 월스트리트 저널 지에 실린 한 외국 펀드의 말을 인용해보자.

중앙은행의 보유 외환은 통화전쟁에서 군자금이나 다름없다. 태국에서 자본이 빠져나가는 것을 방어하는데는 외환보유액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우리가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면 태국 경제를 질식시킬 것이다. 금리 인상은 치명적인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금리를 올리지 않으면 우리는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

 

워싱턴의 IMF 본부에 있던 스탠리 피셔 부총재는 태국이 결정만 하면 자금지원을 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태국의 타농 재무장관은 IMF에 갈 계획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7월 중순 자금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말도 꺼내지도 못했다. 일본 정부가 단도직입적으로 IMF를 통하지 않고는 절대로 자금 지원을 할 수 없다고 못박았기 때문이다.

방콕 정부 내에서도 이제는 IMF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는 소리가 나왔다. 전직 재무장관 두 사람이 IMF에 지원을 요청할 것을 차왈릿 총리에게 건의했고, 총리실 경제수석비서관도 태국 경제를 살리는 길은 IMF에 가는 길밖에 없다고 건의했다.

타농 장관도 더이상 새는 물탱크를 막을 수 없다고 인정했다. 그 동안 통화정책을 종합지휘한 타일랜드 은행의 렁차이 마라카농드(Rerngchai Marakanond) 총재는 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핫머니와의 싸움에서 중앙은행 총재는 비운의 운명을 당하고 말았다.

고정환율제를 해제한 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728일 태국 정부는 IMF에 수백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대기성 차관(스탠드바이 론)을 제공해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

 

811IMF는 태국의 건의를 받아들여 16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태국에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이 계획은 나중에 172억 달러로 구체화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국이 한푼도 분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60억 달러중 IMF40억 달러를 지불하고 일본이 40억 달러, 홍콩과 오스트레일리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가 각각 10억 달러, 한국과 인도네시아 5억 달러를 지불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지원국은 모두 아시아 국가였다. 일본은 60~70억 달러를 낼 준비를 했으나, 이것마저 IMF가 깎았다. 1)

 


1) WSJ, 97812Asia pledges $16 billion for Thai bail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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