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포퓰리즘에 취해 있는 아르헨티나
70년 포퓰리즘에 취해 있는 아르헨티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8.14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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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금단현상에 우파 개혁 실패…“크리스티나가 돌아왔다” 시장 패닉

 

그녀가 돌아왔다. 페론이 다시 살아났다.

11일 치러진 아르헨티나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좌파 후보인 알베르토 페르난데스(Alberto Fernadez) 후보가 현직 대통령인 마우리시오 마크리(Mauricio Macri) 후보를 15% 포인트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날 현지 주가가 40% 가까이 폭락하고 페소화도 20% 가까이 급락했다. 달러 기준으로 치면, 주가는 50% 가까이 하락, 하루 사이에 반토막이 난 셈이다.

그러면 아르헨티나 금융시장이 왜 이처럼 경기를 부리며 발작했을까. 좌파연합 후보인 알베르토의 강세에 놀랐다기보다 마크리의 정적이자 이전 대통령이었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Cristina Fernandez)가 부활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는 아르헨티나에서 두 번째 여성 대통령으로, 페론주의자다.

금융시장의 참여자들은 좌파 연합이 집권하면 아르헨티나에 페론주의가 다시 등장하고, IMF와의 협상을 깨고 모라토리엄(부채지급유예)을 선언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빚을 떼먹힐 바에야 늦기 전에 아르헨티나를 떠나야 한다는 자본의 심리적 압박이 금융시장을 뒤흔들었던 것이다.

 

에바 페론(1947) /위키피디아
에바 페론(1947) /위키피디아

 

아르헨티나는 2차 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에 버금가는 경제력을 보유한 강대국이었다. 자연자원이 풍부하고 비옥한 땅덩어리에 스페인과 독일계 이민자들은 쉽게 잘사는 나라를 건설할수 있었다. 그러나 이 유럽풍의 아름다운 나라를 망친 것이 바로 페론주의, 즉 무산대중을 위한 포퓰리즘이었다.

아르헨티나는 페론과 에바(에비타의 애칭)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페론 장군과 그의 둘째 부인 에바의 이야기는 혁명과 야망으로 점철된 1940년대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페론 부부는 남미식 사회주의를 주창해 민간기업을 국유화하고 노동단체에 막강한 권력을 심어주었다.

페론주의는 오랫동안 아르헨티나를 지배했다. 페론주의를 신봉하는 노조는 곳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근로자들에게 직장을 철밥그릇처럼 보장해 주었기 때문에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고,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산업은 경쟁력을 잃었다.

아르헨티나는 2002년에 국가파산을 선언한 적이 있다. 오랫동안 아르헨티나를 집권한 페론당이 노조를 등에 업고 사사건건 정부의 개혁안을 반대하는 바람에 외국 자본이 대거 탈출했고, 이에 경제가 벼랑 끝에 몰리다 결국은 파산을 선고한 것이다.

나라가 파산된 상태에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좌파 정권을 선택했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부인 크리스티나 /위키피디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부인 크리스티나 /위키피디아

 

페론주의를 표방한 페르난데스 대통령 부부는 12년간 집권했다. 남편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Néstor Carlos Kirchner)가 먼저 6년간 대통령을 하고, 이번에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 크리스티나가 남편이 건네준 배턴을 이어받아 6년을 더했다. 부부 대통령은 페론과 에바 부부를 답습했다. 부부 정권은 노동자와 서민층을 기반으로 대중인기 영합주의적인 경제정책(포퓰리즘)을 운영했다. 이들 부부의 경제정책을 '키르치네르주의'고 했다.

12년간 번갈아 집권한 페르난데스 부부 대통령의 페론주의 정당은 미국 달러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자본통제(capital control) 조치를 취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전기를 무료로 공급했다. 경제는 엉망이 되었다.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물가는 폭등했다.

 

경제가 악화되자, 2015년말 대선에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보수 우파의 마크리를 선택했다.

마크리는 당선된후 페론주의의 포퓰리즘을 단절하고 경제 체질을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경제개혁을 단행했다. 외환규제를 풀고 관세율을 낮추고 외국인 투자자들을 유치했다. 덕분에 가라앉던 아르헨티나 경제는 플러스 영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국민들의 고통은 심했다. 전기와 에너지 산업에 주는 국가보조금을 감축하다 보니 에너지 가격이 두배 가량 뛰었고, 재정을 줄이니 복지혜택이 줄었다. 포퓰리즘에 젖어있던 아르헨티나인들에게 금단현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집권 2년 되는 지난해말부터 마크리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개혁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재정적자를 줄이면 국민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줄고, 물가를 잡기 위해 돈줄을 죄면 빚에 쩌들어 있는 가난한 대중이 고통스러워진다.

양약은 입에 쓰다는 말이 경제개혁에 딱들어 맞는 말이다. 경제개혁은 아르헨티나 경제를 살리는 원동력이었지만, 국민들의 불만을 키우고, 개혁을 추진한 정치인의 입지는 좁아들게 했다.

지난해 1월 마크리 정부와 중앙은행은 슬그머니 금리를 0.75% 포인트 내렸다. 12%였던 올해 물가목표도 15%로 변경해 물가 억제를 위한 국민고통을 덜어주려는 제스추어를 썼다. 게다가 세수확보를 위해 외국인 투자자들에 대한 소득세를 신설하려고 법안을 준비했다.

마크리 정부가 이처럼 경제 개혁 속도를 다소 늦춘 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자만감이다. 지금껏 개혁조치로 해외투자자들의 신뢰를 얻었고,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니 조금 천천히 가도 될 것이라고 믿었다. 마크리 대통령은 점진주의(gradualizm)을 표방했다.

둘째는 지지율 하락이다. 지난해 11월 여론조사에서 마크리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52%였지만, 올들어 지난 4월 조사에선 43%로 뚝 떨어졌다. 재정적자 축소를 위해 에너지산업에 대한 정부보조금을 줄이니 에너지 가격과 대중요금이 폭등했고, 결국은 지지율 하락으로 나타난 것이다. 국민들은 경제개혁이니 하는 거시적 원칙엔 찬성하지만, 자신에게 돌아오는 혜택을 줄이거나 요금이 인상되면 표를 주지 않는다.

정치인들은 지지율에 민감하다. 대선을 1년 앞두고 마크리 정부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결국은 개혁속도를 늦추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마크리 정부의 개혁지연 사인이 나타나자, 이번엔 외국인 투자자들이 아르헨티나 땅을 떠나기 시작했다. 불에 한번 데인 사람은 솥두껑보고도 놀란다고 한다. 앞서 페론주의자들이 집권할 때 투자한 돈을 떼먹은 적이 있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조급하게 탈출을 시도했다.

중앙은행이 지난해 1월에 단행한 금리인하 조치, 마크리 정부의 물가목표 상향조정, 해외투자자들에 대한 과세조치 등 일련의 조치들이 외국인 탈출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외국인들은 현지 페소화를 팔고 달러를 사재기 시작했다.

결국 아르헨티나의 정책당국자들은 극약처방을 썼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금리를 40%까지 올렸다. 금리 40%1억원을 빌리면 이자만 연간 4,000만원을 내는 폭리의 구조다. 이런 금리를 주고라도 달아나는 외국인 투자자들을 잡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IMF에 구제금융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마크리 정부는 구제금융을 준 IMF의 요구에 따라 금리인상에 이어 느슨했던 개혁조치를 다시 바짝 조이겠다고 선언했다. 재정적자 목표치를 낮추고, 물가 목표치도 하향조정했다. 재정적자를 줄이고, 물가를 낮추는 것은 세금을 덜 걷고, 지출을 줄이는 방법 이외에 없다. 결국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돌아갈 복지 혜택을 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015년 마우리시오 마크리의 대통령 선거 유세 /위키피디아
2015년 마우리시오 마크리의 대통령 선거 유세 /위키피디아

 

알베르토 후보는 지난 5월 페론주의자 크리스티나를 부통령 후보로 선택했다. 뇌물 수수 혐의로 재판중인 크리스티나의 입장에서는 권력을 쥐는게 유리하다고 판단해 자신이 대통령일 때 장관이었던 사람 밑에 들어가는 것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복지금단 현상에 정신줄을 놓고 있던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크리스티나의 등장에 환호했고, 이번 대선 예비선거에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는 것이 구미 언론들의 분석이다.

아르헨티나는 우리나라에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다. 그 나라는 지난 50년 동안 숱하게 금융위기를 겪었다. 가깝게는 2001년 현지 통화인 페소화 폭락사태를 겪었다. 이 나라에 다시 금융위기 조짐이 일고 있다. .

영화 에비타에서 마돈나는 페론의 아내 에바 역을 맡아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마라 (Don’t cry for me, Argentina)'를 노래했다. 하지만 에바의 나라는 그녀의 남편이었던 페론의 좌파 철학으로 무너졌다. 오랫동안 아르헨티나를 지배해온 국가사회주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단절하고 경제를 살리겠다던 현직 마크리 정부는 아르헨티나의 역사에 70년간 뿌리내린 페론주의에 좌초될 위기에 처해있다. 포퓰리즘의 독성이 이처럼 무서운 것은 남미의 베네수엘라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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