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가르제국의 갈단, 강희제에 좌절하다
준가르제국의 갈단, 강희제에 좌절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8.16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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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러시아의 그레이트게임 앞서 청, 몽골, 러시아의 서역 주도권 전쟁

 

17~18세기에 중국의 신장(新疆), 외몽골(몽골인민공화국), 내몽골, 키르키즈스탄, 카자흐스탄, 시베리아 남부의 광활한 중앙아시아 스텝지역에 준가르(準噶爾)라는 왕국이 있었다. 티베트도 영향권에 넣었다. 유라시아 대륙을 제패한 대몽골제국이 분해된 후 마지막 남은 유목민족의 제국이었다. 이 나라는 1634~1758년 사이 10대 왕에 걸쳐 120여년간 중국 서부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다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왕은 홍타이지(Xong Taiǰi)라고 했는데, 4대 갈단은 칸의 지위에 올랐다.

19~20세기초 영국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놓고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는 패권 싸움을 벌이기 200년 전에, 중국과 러시아, 몽골이 서역의 주인공을 두고 100년 전쟁을 벌였다. 준가르를 제압함으로써 청()은 원()나라 다음의 광대한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고, 오늘날 중국이 신장과 티베트을 영토라고 주장하게 된다.

 

1716~1713년 사이에 준가르에 체포된 스웨덴 장교가 그린 준가르 지도 /위키피디아
1716~1713년 사이에 준가르에 체포된 스웨덴 장교가 그린 준가르 지도 /위키피디아

 

오이라트는 원()대에 같은 몽골족이면서도 색목인(色目人)으로 분류되어 우대받았다. 명대에 몽골 전체를 통일하며 위세를 떨쳤고, 1449토목의 변을 일으켜 명나라의 정통제(正統帝)를 인질로 잡기도 했다. 그후 오이라트는 내분으로 혼란에 빠져 약화되었고, 다른 몽골 부족들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후퇴했다. 알탄 칸이 등장할 때 오이라트는 몽골에 복속되었다.

오이라트는 명나라 말기인 1600년대 초반에 다시 부흥하게 된다. ·청 교체기에 몽골은 정치적으로 막북(幕北, 외몽골), 막남(幕南, 내몽골), 막서(幕西, 오이라트)로 나뉘어 있었다. 만주족이 청을 세워 한족의 중원을 지배하기 이전에 손을 잡은 몽골족은 막남 몽골이었다. 막북 몽골도 청에 조공을 바치며 복속했지만, 막서의 오이라트만은 강희제 이전에는 부족단위의 독자적인 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오이라트(Oirat)는 준가르와 두르버트, 투르후트, 허수트 등 네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중 준가르 부족이 가장 강력했는데, 17세기초 카라쿨라라는 인물이 나타나 오이라트족을 단합시켰다. 카라쿨라가 준가르를 세운 것은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황제라고 칭하기(1636) 바로 직전인 1634년이었다. 준가르는 막북의 칼카 부족을 공격하는 한편 티베트 고원을 침공해 달라이라마를 제압함과 동시에 티베트 불교를 받아 들였다. 이어 카자흐 칸국을 공격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영토를 확대했다.

 

갈단 칸 초상화 /위키피디아
갈단 칸 초상화 /위키피디아

 

청나라가 오이라트를 견제하게 된 것은 강희제(재위 1661~1722) 때였다. 강희제는 오삼계(吳三桂), 상가희(尙可喜), 경정충(耿精忠)이 일으킨 삼번의 난(16731681)으로 조정이 전복될 뻔했던 위기를 1681년에 이르러 겨우 수습하고, 2년후 정성공(鄭成功)의 손자가 통치하던 대만을 손에 넣게 되었다.

이 무렵 준가르의 지배자는 갈단이었다. 갈단의 어머니는 티베트을 지배하던 허슈트족의 공주로, 갈단은 어려서부터 라싸에서 라마승으로 수도했다. 그의 형이자, 3대 칸인 셍게가 동생들에 의해 암살되자, 그는 준가르로 돌아가 배신한 형제들을 누르고 형수를 부인으로 취해 왕이 되었다.

갈단은 달라이라마로부터 보지기트 칸을 부여받았다. (Khan)은 몽골족에게 징기스칸의 씨족에게 물려주는 황제격의 지위인데, 갈단이 몽골족의 칸에 오른 것이다.

갈단은 서쪽으로 카자흐를 제압하고, 동쪽으로 외몽골의 칼카족의 영역으로 공격했다. 칼카의 부족들은 준가르의 기병들을 막아내지 못하고 패퇴했다. 막북에 살던 칼카족은 청에 복속한 내몽골 지역으로 이동해 강희제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갈단 정벌에 나선 강희제 /위키피디아
갈단 정벌에 나선 강희제 /위키피디아

 

가까스로 내란을 진압한 강희제는 서북부의 강자 준가르 제국에 주목하게 되었다. 강희제가 두려워 한 것은 두가지였다. 첫째는 서몽골의 군사행동이 내지의 안전을 위협할 것이라는 점, 둘째는 오이라트가 러시아와 연합해 반청(反淸) 동맹을 맺을 경우, 북방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이미 시베리아 정복을 마치고 동으로 흑룡강(아무르강)에 이르렀고, 서쪽에서 외몽골을 위협하고 있었다.

강희제는 우선 동부의 흑룡강-연해주 일대의 안정을 위해 러시아와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네르친스크 조약은 허점이 있었다. 흑룡강을 두 나라의 경계로 한다는데는 합의했지만, 외몽골과 서북부 지역 국경선에 대한 합의는 없었다. 그 무렵 러시아는 바이칼호로 남하하면서 그곳의 몽골족과 전투를 벌였고, 외몽골의 칼카 부족들은 동쪽에선 오이라트, 북쪽에선 러시아와 싸워야 했다.

갈단은 러시아와 우호관계를 맺고 외몽골을 침공했다. 준가르는 러시아로부터 신식무기를 건네 받아 서쪽에서 공격했고, 러시아는 코사크족을 앞세워 복쪽에서 밀려 내려오면서 칼카족을 바이칼호에서 쫓아냈다.

 

청-준가르 전쟁도 /위키피디아
청-준가르 전쟁도 /위키피디아

 

갈단의 군사는 1688년 외몽골을 거쳐 베이징 북쪽에 도착해 만리장성을 넘보았다. 그러면서 청의 발원지 만주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갈단이 동몽골 원정에 떠났을 때, 그의 조카 체왕랍탄이 수도 굴자(현재 신장위구르자치구 이닝(伊寧))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외몽골 칼카족의 지원요청에 은인자중하던 강희제가 드디어 군사를 움직였다. 강희제는 1690년 말이 살찌고 초목이 풍부한 가을에 출정을 명령하면서 친형 유친왕(裕親王)을 대장군으로 삼아 몸소 출정했다. 전쟁터는 베이징에서 북쪽 700리 지점인 우란부퉁(烏蘭布通, 내몽골 츠펑(赤峰))이었다.

갈단의 군사는 10, 강희제의 군사는 6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숫적으로 갈단의 군사가 더 많았지만, 청군은 포병으로 무장해 있었기 때문에 갈단의 낙타 방어진지는 청군의 발포에 쉽게 무너졌다.

갈단은 내부의 반란자를 진압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강희제와의 협상을 원했다. 갈단은 몽골족과의 싸움에 청이 끼어들 필요가 없으며, 청군과 싸울 의향도 없다고 했다. 여기서 강희제는 속임수를 쓴다. 강희제는 협상을 위해 사절단을 보내라고 했다. 갈단의 사절단이 협상장소로 가는데 청군은 군사를 매복시켜 궤멸시킨다.

갈단은 재빠르게 도망을 쳤다. 갈단은 기명 3만명으로 외몽골 울란바토르 일대로 피신해 군사를 재정비했다.

강희제는 갈단의 무리를 뿌리뽑기 위해 군대를 3개조로 편성했다. 중군은 자신이 직접 지휘하며 갈단의 거점인 울란바토르를 향했고, 동군과 서군등 다른 두개조는 갈단의 거점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보내 도망치지 못하도록 길목을 막았다. 양쪽에서 포위해 갈단군을 섬멸하려는 의도였다.

갈단은 도망쳤다. 1696년 자오모도 전투에서 갈단군은 완패했다.

갈단은 40~50명의 병사를 이끌고 알타이산으로 도망갔다. 그곳에서 수천명의 군사를 모았으나, 나라는 조카 체왕랍탄에 빼앗기고, 천군은 압박해오고 선택의 방법이 없었다. 그는 169744일 부하 3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음독자살했다.

 

1696년 강희제가 갈단을 패퇴시킨 자오모도 전투 /위키피디아
1696년 강희제가 갈단을 패퇴시킨 자오모도 전투 /위키피디아

 

갈단은 야심가였다. 그는 청에 복속한 내몽골(막남)과 청에 조공을 바치는 외몽골(막북)과 달리 독자적인 몽골제국을 세우려 했다. 그는 칸의 지위도 물려받았고, 카스피해에서 만리장성 동쪽까지 넓디넓은 제국을 형성했다. 그는 또다른 칸인 청 황제(강희제)와 맞붙었다가 패퇴했다.

하지만 준가르는 아직 멸망하지 않았다. 갈단이 죽고 준가르는 체왕랍탄의 나라가 되었다. 비록 갈단을 배신하면서 왕권을 빼앗은 체왕랍탄이었지만, 그는 카자흐 초원과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를 공략하며 준가르의 영토를 넓혔다. 체왕랍탄은 러시아의 도움을 얻어 공업화도 진행하는 등 국력 신장에 노력하며 청나라와의 일전을 기대하고 있었다.

청은 갈단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외몽골과 신장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외몽골의 칼카 부족들은 1691년 원()나라 시대에 상도(上都)였던 옛터 도런 놀에 모여 연맹을 결성하고, 청조에 복속을 약속하게 된다. 청은 또 준가르가 지배하던 하미, 둔황, 투르판를 점령하고 둔전(屯田)을 설치했다. 청의 판도가 오늘날 신장지역까지 펼쳐진 것은 강희제 때였다.

 

자오모도 전투도 /위키피디아
자오모도 전투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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