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전투, 체코 군단의 미제 총으로 이겼다
봉오동전투, 체코 군단의 미제 총으로 이겼다
  • 이인호 기자
  • 승인 2019.08.17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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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인들, 식민지 민족에 연민 느껴…금비녀 등 민족 정성으로 산 무기로 승리

 

광복절 저녁에 영화 봉오동 전투를 보았다.

광복절을 앞두고 개봉한데다 반일감정이 달아있는 시기여서 약간의 기대를 품고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소감은 실망이었다. 우리 독립운동사 전투 중에 몇 안 되는 승전의 기록을 지나치게 희화화하고, 공상적 터치를 하는 바람에 역사적 의미를 오히려 반감시킨 영화였다.

우선 작가들이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역사에는 배경이 있고, 승전에는 이유가 있다. 그런 묵직한 주제를 가볍게 취급하면서 사실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가는 소재들에 값싸게 감성을 넣어 처리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수 없는 영화였다. 왜병은 말을 타고 달리는데, 부상당한 동지를 업고 뛰는 독립군은 축지법을 썼나, 홍범도 대장에 붙인 장군이라는 표현은 한번쯤 검증이라도 했나. 마치 김일성 장군이 만주에서 축지법을 쓰고 날아다니는 느낌을 줘 제작자들이 북쪽에서 영감을 얻었나 하는 의구심도 생겼다.

 

영화 '봉오동 전투'의 장면 /네이버 영화
영화 '봉오동 전투'의 장면 /네이버 영화

 

각설하고, 봉오동 전투는 1920720일 중국 지린성 왕창현 봉오동에서 홍범도 등 독립군 연합부대가 봉오동 산악지대에서 매복했다가 일본군 추격대를 삼면에서 포위해 궤멸시킨 승전의 기록이다. 3개월후 1021~26일에 김좌진과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 부대를 수백명을 사살해 대승을 거뒀다. 봉오동 전투보다 청산리 전투는 승리의 규모가 더 크고 갑진 전투다.

그렇다면 두 전투에서 독립군들은 어떻게 일본군을 격파했던가. 전술전략을 잘 쓴 것도 있지만, 일본군과 대등한 무기를 확보했다는 점을 간과할수 없다. 영화 봉오동 전투에서처럼 유해진이 부러진 칼로 수십명의 무장한 일본군을 갈대 쓰러 뜨리듯 베었다는 내용은 소설적 가미라고 하더라도 지나쳤다.

 

영화 '봉오동 전투'의 장면 /네이버 영화
영화 '봉오동 전투'의 장면 /네이버 영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는 항일 독립군들에게 최선의 방법은 최신 무기를 많이 확보하는 것이었다. 1910년 나라가 없어지자 독립지사들은 중국 땅인 만주로, 러시아 땅인 연해주로 가서 독립군 부대를 만들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무기를 구하는 것이었다.

1920년 청산리 봉오동 대첩의 승리는 우리 독립군은 러시아혁명 내전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해온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으로부터 다양한 최신 무기를 구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무기를 구입한 돈은 조국의 아낙네들이 금붙이를 판 돈등이 모아져 조성되었다.

 

1918년 귀국을 기다리며 블라디보스톡에 집격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위키피디아
1918년 귀국을 기다리며 블라디보스톡에 집격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위키피디아

 

러시아혁명 내전 과정(1919~1922)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역할은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19165월 우랄산맥 도시 첼랴빈스크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볼셰비키와 싸우면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이동하며 귀국길을 준비했다. 첫부대가 그해말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해 마지막 부대가 도착하는 19209월까지 블라디보스톡에 체류했다. 그들은 열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에 체류하면서 신문을 발행했다.

 

그 신문이 <덴니크>(Dennik). 90년후인 2011년 야로슬라브 올샤 2세 주한 체코 대사가 프라하 도서관과 고서점을 찾아다니며 수집한 한국관련 자료들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그의 수집품 중에는 체코 군단이 발간한 덴니크 원본도 포함되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발간된 덴니크 192037일자에는 체코 군단이 한국독립투사들 사이에 비밀스런 무기 거래가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 무기가 만주에 산재해 있던 우리 독립군에 전해져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청산리 대첩의 주인공 이범석(李範奭) 대장은 자신의 회고록 <우등불>에서 독립군 무기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서 구입했다는 사실을 회고했다.

블라디보스톡항에서 서유럽행 배편을 기다리고 있을 때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한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들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제국 식민통치 아래서 겪어온 노예 상태를 떠올렸고 우리에 대해 연민을 표시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는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무기를 북로군정서에 판매하기로 했다. 무기 거래는 깊은 숲에서 한밤중에 이뤄졌다. 이러한 무기들은 우리 진영으로 옮겨져 숲속에 무더기로 쌓아놓았다.”

라돌라 가이다 장군 /위키피디아
라돌라 가이다 장군 /위키피디아

 

이 무렵 체코슬로바키아 군단과 일본군은 동맹 관계에서 대립 관계로 변해 있었다. 1920년 초 체코 군단은 러시아 백군의 지도자 알렉산드르 콜차크를 체포해 볼셰비키에 넘겨주었고, 콜차크가 이내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군은 체코 군단의 귀국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7만명이나 시베리아에 파병하고 백군을 지원했는데, 체코 군단이 볼셰비키와 손잡고 백군에 등을 돌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간의 진영이 뒤바뀌었다. 일본은 더 이상 체코군의 귀국을 돕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일본은 체코군이 대량의 무기를 한국 독립군에 넘겨주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일본은 러시아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체코 군단이 볼셰비키 정부의 말을 듣지 않았고, 당시 블라디보스톡은 백군들이 마지막으로 통제하고 있었다.

체코 군단에서 구입한 무기를 수송하는 작전의 책임자는 김좌진(金佐鎭)과 이범석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에서 활약하던 이우석(李雨錫)이었다. 그는 나중에 이 작전에 동원된 한국인은 230명이었고, 200정의 권총과 기관총, 탄약을 옮겼다고 회고했다.

 

그러면 체코 군단은 왜 무기를 한국 독립군들에게 넘겼을까. 그 첫째는 더 이상 무기가 필요없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강대국에 의해 식민지가 된 한국에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다.

북로군정서 지휘관이었던 이범석은 체코 군단에 무기를 달라고 하면서 우리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던 당신들처럼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한국인들이오라고 했고, 그들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 제국 식민 통치 아래서 겪어온 노예 상태를 떠올리면서 연민을 표시했다고 회고했다. 게다가 1918년말 1차 대전이 종전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독립했고, 체코 군단이 돌아갈 땐 더 이상 무기를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

 

체코 군단의 총지휘자 라돌라 가이다(Radola Gajda) 장군이 1920년초 귀국하기 앞서 그의 부대가 보유 무기 일부를 우리 독립군에 팔도록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최재형 선생 /국가보훈처
최재형 선생 /국가보훈처

 

그때 독립군이 구매한 무기의 상당수는 미국제였다. 1차 대전때 제정러시아는 육군을 모신나강(M1891) 소총으로 무장했는데, 러시아 산업능력으로 충분히 생산할 수 없어 미국에 발주했다. 차르(황제)군에 소속된 체코 군단은 이 무기로 무장했고, 한국 독립군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러시아 무기를 들고 일본군을 물리쳤다.

당시 독립군이 체코군단에서 사들인 무기는 소총 1,200, 기관총 6, 탄약 80만발, 박격포 2, 권총과 다량의 수류탄 등이었다. 체코 군단에서 사들은 무기는 암시장에서보다 상대적으로 쌌다는 평가다.

무기구매에는 민족의 정성이 들어갔다. 나중에 체코 골동품 시장에는 종종 금비녀, 금반지, 비단보자기 등이 나왔다고 한다. 아마도 선조들이 총 한 자루라도 더 사기 위해 금붙이들을 요강에 숨겨서 가져갔던 것이 체코 병사들에게 넘어가 보관하던 것이리라.

항일 독립군들은 총 한 자루에 한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을 정도로 무기 조달에 최선을 다했다. 조국에서 금반지며 금비녀를 팔아 한푼 두푼 모은 돈을 모두 무기 사는데 썼다고 한다. 당시 체코 군단과의 무기거래협상에는 연해주에서 한인사회를 이끌던 최재형(崔才亨)이 나섰다고 한다. 그는 어린 나이에 블라디보스톡에 이주해 선원, 무기공장 노동자로 고생한 끝에 군수산업으로 돈을 벌어 안중근 의사를 후원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선생은 19204월 일본군에 피살돼 순국했다.

 

모신나강(M1891) 소총 /위키피디아
모신나강(M1891) 소총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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