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가 유발한 역사 변동…미국 독립, 아편전쟁
차(茶)가 유발한 역사 변동…미국 독립, 아편전쟁
  • 김현민 기자
  • 승인 2019.08.21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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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차에 고율 관세부과, 보스턴 차 사건 유발…무역역조 해소 위해 중국에 아편 판매

 

유럽인들이 아시아와 아메리카로 가는 항로를 열면서 유럽에서 생산되지 않았던 새로운 작물들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 유럽인들은 감자를 몰랐다. 잉카인들은 유럽인들보다 수세기 전에 감자의 생육특성과 영양가를 알고 재배했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의 감자를 가져다 심었다. 처음에는 노예의 음식이라며 먹지 않았다. 하지만 아일랜드인들이 감자를 심었다. 잉글랜드 침략군이 곡물과 헛같을 모두 태워버리는 바람에 아일랜드인들은 감자를 심어 땅속에 보관하고 갖고 도망치기 쉬웠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에서 시작한 감자는 전유럽으로 확산되었고, 옥수수도 그렇게 유럽인들에게 퍼져나갔다.

새로운 작물들이 세계경제에 편입되었다. 아메리카의 코코아가 유럽인들의 입맛을 자극하고, 식민자들은 그것을 아프리카에 심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사탕수수를 가져가자 유럽인들은 달콤함에 빠져들었고, 카리브해 섬들은 사탕수수 농장으로 변했다.

 

영국인들의 입맛을 달군 것은 차()와 커피였다. 두 식품은 중독성이 강했다.

중국의 차 생산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에 유비가 홀어머니를 위해 차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도적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기록에는 남북조 시대에 돌궐의 상인이 중국 북쪽에 와서 차를 사갔다고 하고, ·청기에 차는 중국의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

·청기에 중국의 주요 수출품은 비단, 도자기, 차였다. 차 무역은 진상(晋商)과 휘상(徽商)에 의해 독점되었는데, 진상은 북쪽에서 캬흐타를 통해 러시아에 수출했고, 휘상은 남쪽에서 마카오를 통해 서양과 거래했다.

 

차와 도자기 /위키피디아
차와 도자기 /위키피디아

 

영국에 차맛을 소개한 사람들은 왕가였다. 1662년 찰스 2세 국왕에게 포르투갈 공주 캐서린이 시집을 가면서 포르투갈에서 중국 차를 마시는 풍습을 런던에 전한 게 시초였다고 한다. 그후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고 네덜란드에서 윌리엄 3세가 왔을 때 왕비 메리 2세가 네덜란드에서 익혔던 차 풍습을 왕실과 런던 상류계층에 전파했다. 이어 18세기초에 앤 여왕이 차를 즐겼다고 한다.

18세기에는 영국에 차() 소비가 확산되었다. 해상 무역로를 통해 중국의 차가 영국에 들어왔고, 상류계층 사이에 중국산 차, 중국산 비단, 중국산 도자기를 마시고 입고 쓰는 것이 유행으로 전파되었다.

영국인들은 중국 차를 사랑했다. 음차(飮茶) 습관은 영국인들의 생활을 바꾸었다. 점심이 조금 지나고 사람들은 차를 마시기 위해 휴식했다. 18세기엔 오후에 음식(주로 빵)을 먹은 후에 별도의 시간을 내 차를 마셨다.

처음에는 고상하고 미묘한 맛이 나는 녹차를 즐기다가 18세기 이후에는 점차 홍차가 인기를 끌게 되었다. 여기에 서인도에서 들어온 달달한 설탕 맛이 가해졌다. 영국인들은 아침부터 차를 마셨고, 여럿이 만나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는 티타임이 생겨났다.

서양인들에게 차는 좋은 점만 있고 해로운 것이 없다는 신념을 주었다. 하지만 차도 중독성이 있었다. 차에는 타닌산과 카페인, 아미노산등의 성분이 있는데, 이들 성분은 중독의 우려가 있었다. 이 중독 효과는 영국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중국산 차를 원하게 했다. 17~18세기만 해도 서양인들에게 차는 중국에서만 재배되는 줄 알고 있었다. 중국으로선 차를 팔아 은()을 수입했고, 영국은 차를 사기 위해 중국과 상거래를 원했다.

영국인들이 차맛을 알게되면서 중국의 차 수출이 급증했다. 1706년에 35,000 파운드이던 차 수입량이 1713~1720년 사이에는 연평균 30만 파운드로 증가했고, 1730년대에는 116만 파운드, 1740년대엔 202만 파운드, 1950년대엔 373만 파운드로 급팽창했다.

 

인도네시아 차밭 /위키피디아
인도네시아 차밭 /위키피디아

 

차 수입이 늘어나면서 영국은 중국과 직거래를 원했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17세기에만 해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가져온 차를 사서 영국으로 가져갔는데, 이젠 중국에서 직접 차를 사는 방법을 모색했다.

1697년 영국 선박 두척이 처음으로 중국 샤먼에 도착해 차를 사갔는데, 이 것이 중국과의 첫 직거래였다. 중국과의 공식적인 무역은 동인도 회사가 1704년 광저우(廣州)에 배를 보내 340톤의 차를 사가면서 시작되었다. 동인도회사는 급팽창하는 차의 수요를 대기 위해 1717년부터 광둥과의 무역을 정기화했다.

영국은 동인도회사로 하여금 중국 차 수입을 독점토록 했다. 1722년 동인도회사가 중국에서 수입한 금액의 56%가 차였고, 그 비중은 점점 늘어나 173073%로 급팽창했고, 19세기초에는 90%를 넘어섰다. 동인도회사는 영국인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진 차 맛을 맞추기 위해 중국산 차를 대량구매했다.

중국은 차 수출로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 1817~1819년 사이에 광둥에서 차 수출로 벌어들인 돈이 약 900만 냥이었고, 1820~18241,100만 냥, 1825~18291,200만 냥, 1830~18331,100만 냥이었다. 19세기 중엽 당시 쌀 1석의 가격 3냥과 비교하면 1,200만 냥은 400만 석에 해당하고, 100만 명을 1년 동안 먹일 양이었다고 한다.

 

차는 영국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남성들은 커피를 즐겼다. 동인도회사가 커피를 취급한 것은 1660년대였는데, 아라비아 홍해인근의 모카 커피와 예멘커피가 영국에 소개되었다. 또 초콜릿도 수입되었다.

영국인들은 중국산 도자기를 좋아했는데, 차를 마시면 향이 배지 않아 그 수요가 급격히 증가했다.

한 세기 가까이 일방적인 무역거래가 진행되면서 영국과 중국 사이에 무역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8세기 중반에 영국의 대중국 수입액과 수출액의 차이는 3~4배로 벌어졌다. 중국은 자급경제를 이루었지만, 영국은 중국에서 차와 비단과 도자기를 사가기 바빴다.

당시 국제통화는 은()이었다. 영국의 은이 부족해졌다. 영국은 은을 수입해 중국에 지불했다. 1784년 동인도회사 광주 지점의 금고에 은이 부족해지면서 부도 직전에 몰렸다. 광저우 주재원들은 영국령 인도 총독에게 은이 부족하니 지원해달라고 요청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1773년 12월 보스턴 차 사건(그림) /위키피디아
1773년 12월 보스턴 차 사건(그림) /위키피디아

 

차 무역은 두가지 세계적인 사건을 유발했다. 1776년 미국의 독립운동을 촉발했고, 1839년과 1856년 두차례 걸쳐 영국과 중국 사이에 이른바 아편전쟁이 벌어졌다.

영국은 차를 사치품으로 보고 관세를 매겼다. 관세율이 시기에 따라 125%에서 65%로 변화가 있었지만, 대체로 84%의 고율이었다. 영국정부는 차에서 나오는 관세로 재정을 충당했다. 차에서 발생하는 영국의 세수입은 연평균 330만 파운드로, 그 무렵 영국 총세수의 10%를 충당했다.

그러자 밀수가 성행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가져오는 밀수 차는 세금이 붙지 않기 때문에 영국 동인도회사의 차보다 절반 값에 해당했다. 같은 제품에 두배의 가격차가 발생하므로, 무허가 수입품이 성행했다. 특히 영국의 행정력이 취약한 아메리카 식민지에 밀수품이 성행했다.

17735월 영국의회는 차조례(Tea Act)를 통과시켰다. 이 조례는 영국 동인도회사를 돕고, 영국의 재정누수를 메우기 위한 것이었다. 밀수 차가 범람하는 바람에 동인도회사가 수입한 차가 창고에 넘쳐났고, 영국이 기대한 재정 수입이 줄어들었다. 영국은 식민지에도 이 조례를 강행했다.

아메리카의 13개주 대표들은 영국 정부가 식민지에 세금을 직접 과세하는 인지세와 차세의 부과에 항의했고, 영국 정부는 그 항의를 묵살했다. 식민지와 본국 정부의 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 177312월 보스턴 항에서 차 상자를 바다에 던져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후 아메리카 13개주는 독립운동을 펼치게 된다.

 

1841년 아편전쟁시 영국군 포격(그림) /위키피디아
1841년 아편전쟁시 영국군 포격(그림) /위키피디아

 

1773년 동인도회사의 고위간부 왓슨 대령은 벵골만에서 생산된 아편을 중국에 팔아 무역적자를 메우자는 의견을 이사회에 제출했다. 그 제안은 이사회의 지지를 받았다.

방식은 아편 특허권자가 인도에서 아편을 도매해서 동인도회사 광주지점에 환어음을 받고 팔고, 영국에서 현금으로 회수하는 것이다. 영국의 인도총독은 이를 승인했고, 동인도회사는 아편사무국을 설립해 인도의 아편생산과 수출을 독점했다. 영국의 아편 생산과 수출은 처음부터 중국과의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은 인도에서 식민통치를 강화하면서 말와, 비하르, 바리나시등 주요 아편생산지를 식민화하고, 인도 농민들에게 아편 생산을 강요했다. 동인도회사는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을 집중적으로 사들여 가공하고 중국에 수출했다. 동인도회사는 생산된 아편을 이동시킬 때에도 통행세를 물렸다.

아편은 차보다 중독성이 강하다. 소량으로도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따라서 파급 속도도 차보다 빨랐다. 아편이 중국에 파고들면서 황실 귀족은 물론 관료, 군인과 민간인 등 다양한 계층에서 아편을 즐겼다.

중국인들 사이에 아편이 급속도로 파급되자 중국의 국제수지가 적자로 전환됐다. 청나라 조정은 1798년에 아편 밀수입과 아편 거래를 금지하는 법령을 반포했지만, 마약에 빠진 중국인들은 차 중독에 빠진 영국인들보다 더 심하게 아편을 찾았다. 1817~1833년 사이에 동인도회사가 중국에 수출한 대금 가운데 아편 대금이 아편 이외의 상품 대금보다 3배를 넘었다. 이젠 중국에 흘러들어오던 은이 영국으로 빠져 나갔다.

이 무역마찰이 서양과 동양의 두 제국 사이에 전쟁으로 비화한다. 이렇게 해서 동양과 서양의 두 제국은 역사적인 전쟁을 치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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